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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성철 편집장] 김기영 감독의 80년대를 떠올리며
주성철 2018-11-23

몇주간 추모 소식을 전하느라, 지난 1181호에 실렸던 김기영 감독 타계 20주년 추모 대담에 대한 얘기를 덧붙이지 못했다. 그사이 <남과 여>(1966), <러브 스토리>(1970)의 영화음악가 프랑시스 레이도 안타깝게 세상을 떴다. 그의 추모 기사 또한 이번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아무튼 언제나 김기영 감독에 대한 추모는 후대에 끼친 영향력 면에서 ‘영화감독들의 영화감독’이라는 평가처럼 남성 감독 위주로 진행돼왔던 게 사실이다. 그래서 모은영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프로그래머, 손희정 평론가, 이언희 감독, 차성덕 감독 등 여성 감독과 평론가로만 대담을 진행했고, 이전 다른 인터뷰나 비평에서 접하지 못한 새로운 시각을 엿볼 수 있었던 것 같다. 뒤늦게나마 흥미로운 일독을 권한다. CGV아트하우스의 김기영 헌정관 개관 기념 영화제는 11월 28일까지 열린다.

김기영 감독의 대표작은 역시 <하녀>(1960)로부터 시작되는 ‘女’ 시리즈라고 할 수 있는데, 그로부터 11년 뒤 <화녀>(1971)를 만들었고, 또 그로부터 11년 뒤 <화녀>와 거의 같은 내용으로 <화녀 ’82>(1982)를 만들었다. 대략 10년 주기로 각각 시대에 맞게 <하녀>를 변주하면서, 그사이에는 흥행에 힘입어 만들어진 <충녀>(1972)와 그를 리메이크한 <육식동물>(1984)이 자리한다. 기본적으로 불륜과 여성의 욕망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화녀 ’82>가 안타까운 것은 같은 해 개봉한 <애마부인>의 성공과 비교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녀> 시리즈가 언제나 20만 관객 안팎의 높은 흥행을 기록한 반면, 1982년 6월 26일 개봉한 <화녀 ’82>는 4만 관객 정도밖에 모으지 못했다. 하지만 앞서 <애마부인>은 2월 6일 개봉 첫날 1500석의 서울극장에 5천여명의 관객이 몰리며 극장 유리가 깨지는 소동까지 있었고, 최종적으로 30만 관객을 돌파하며 달라진 분위기의 80년대를 알리는 신호탄이 됐다. 같은 해 프로야구가 출범했다는 사실 또한 기존 대중문화 시장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물론 김기영 감독이 <화녀 ’82>를 작업하던 도중 <애마부인>을 봤는지 안 봤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충녀>에서 알사탕 정사 장면, <화녀 ’82>에서 두 남녀가 몸에 온통 금칠을 하고 벌이는 정사 장면 등 언제나 표현주의적 화법에 몰두했던 그가 볼 때, <애마부인>의 성공과 <화녀 ’82>의 몰락 사이에서 변해가는 세상이 어떻게 느껴졌을까(한참 후배이긴 하지만 이두용 감독은 같은 해 1982년 3월 7일 개봉했던 걸작 액션영화 <해결사>의 실패 이후, 전영록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전혀 다른 스타일의 액션영화 <돌아이>(1985)를 만들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화녀 ’82>가 그 스스로 시리즈를 마무리 짓는 느낌으로, 가장 극단의 그로테스크 취향을 보여준 작품인 것 같다. 그의 전매특허와도 같은 대저택의 스테인드글라스가 와장창 쏟아지는 장면을 무척 길게 보여주는 장면이 그 증거다.

더불어 김지미가 연기하는 부인의 카리스마가 가장 도드라지고, 어린 장서희가 연기하는 딸의 비중도 높다. 죽은 아버지에 대해 애도할 겨를도 없이, 오래전 한강에 두었던 어머니의 병에 물고기가 잡혀 있자 “엄마, 운수대통이야!”라고 외치는 장면은 단연 압권이다. 어쨌거나 지금 한국영화계의 중추를 이루고 있는 60년대생 중견 감독들이 김기영의 영화를 그나마 극장 개봉의 형태로 실시간으로 접한 영화가 <화녀 ’82>가 아닐까 싶다. 그로부터 한국영화의 새로운 기운이 감돌던 1997년이 되기까지 15년의 세월이 걸렸다. 어느 순간 쥐도 새도 모르게 찾아오게 될 침체의 순간, <화녀 ’82>의 1982년을 떠올리며 괜히 바로 ‘지금’의 한국영화들을 되돌아보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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