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 입문자에게 처음 권하는 소설은 단연코 사조삼부곡으로 불리는 <사조영웅전> <신조협려> <의천도룡기> 순서다. 저작권 계약을 하지 않고 무단발간된 고려원판이 사조삼부곡을 <영웅문> 3부작으로 국내 소개해 엄청난 인기를 끌면서, <영웅문> 3부작이라는 이름이 오히려 원래 책 제목보다 더 잘 알려졌다. 또한 사조삼부곡이 그렇듯 영화와 드라마 등으로 여러 번 영상화되었거나 김용의 팬들 사이에서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작품들인 <소오강호> <녹정기>를 함께 소개한다. 방대한 세계를 짧은 글로 축약하느라 무리가 발생한 데 대해서는 강호 대협들의 양해를 바라는 바다.
<사조영웅전> 전 8권
사조삼부곡 첫 번째 작품. 대만에서 1천만부, 중국에서 1억부 이상 판매됐다. 몽골이 세워지고 송나라가 멸망하는 시기까지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임안(현 항저우) 인근을 무대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권선징악의 구도가 뚜렷한 편으로, 다소 평범해 보였던 청년의 성장담 구성을 하고 있다. 주인공은 금나라 조왕에게 아버지를 잃은 곽정이다. 곽정은 활쏘기에 능한데 제목의 ‘영웅’은 독수리를 쏘아 맞히는 뛰어난 무사라는 뜻. 의협심이 강한 성격이지만 타고난 무공의 고수라기보다는 우직하게 무공을 쌓아가는 의지의 사나이. 하지만 배우는 족족 최고 무공의 경지에 오르고 이유는 불분명하지만 여자들에게 인기가 좋다. 남장여자인 황용 역시 그런 여성 중 하나인데, 둘은 마지막에 칭기즈칸과 만난다. “큰 협객은 나라와 백성을 위한다”라는 책 속 문장은 중국 <CCTV>가 김용 타계 소식을 전하며 내세운 말이기도 하다. 칭기즈칸, 왕중양, 구처기, 악비 장군 등의 실존 인물이 나온다. 김용으로 가는 문과 같은 소설. 이야기의 시대순으로 따지면 <사조영웅전>에 선행하는 <천룡팔부> 역시 놓치기 아까운데, 읽는 순서로는 <사조영웅전>을 먼저 읽기를 권한다.
<신조협려> 전 8권
김용 작품 중 연애소설로는 첫손에 꼽힌다. <사조영웅전>의 곽정과 황용은 황약사의 주례로 결혼했다. 두 사람은 도화도에 은거해 살고자 하지만 세상이 그들을 가만두지 않는다. 주인공은 곽정이 돌보게 되는 양강의 아들 양과와 그의 스승 소용녀. <사조영웅전>에서 사망한 양강의 죽음과 관련된 진실을 파헤치는 와중에 스승과 금기의 사랑에 빠진 양과는 사랑을 이루기 위해 중원을 들었다놓는데, 무협 소설에서의 사랑이라는 주제를 끝까지 탐구하는 동시에 무협물로도 완전하다. 요즘으로 치면 연상녀 연하남 커플의 사랑 이야기를 무협물로 풀어낸 셈인데 곽정의 모범생 같은 면에 매력을 못 느꼈다면 양과의 반항아 캐릭터를 만나보시길. <사조영웅전>에서 이어지는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별개의 독립적인 작품으로도 흥미롭다. 드라마에서 양과와 소용녀를 연기한 배우들의 조합은 유덕화-진옥련, 고천락-이약돈, 황효명-유역비, 진효-진연희 등이 있다.
<의천도룡기> 전 8권
원나라 말엽, 무림에 떠돌던 풍문이 있었다. 의천검과 도룡도를 가진 자 무림을 평정하리라. 제목은 바로 그 두 무기에서 비롯됐다. 사조삼부곡 마지막 작품인데, 시간으로 따지면 거의 100년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인 원명 교체기. 앞선 작품들과 세계관은 공유하지만 이제 <사조영웅전>의 영웅들은 없다. 하지만 의천검과 도룡도에 얽힌 진실이 드러나는 과정에서 곽정, 황용, 양과의 존재가 다시 드러나는 식. 주인공 장무기는 장취산과 은소소의 아들. 그의 성장과정이 작품의 뼈대를 이루는데, 천성이 순진하달까 매사에 우유부단하달까, 권모술수에 당하는 것으로 따지면 좀 너무하다 싶을 정도인데, 결론적으로는 명교 교주로 추대되는 인물이다. 앞선 작품들이 영웅에 대해, 사랑에 대해 물었다면 이쪽은 무림 정파 출신인 아버지와 사파 거두의 딸인 어머니의 아들이 주인공이라는 설정에서부터 정사의 대립과 더불어 부모에 대한 애정을 다루고 있기도 하다. 장무기가 조민과 주지약 사이에서 우유부단한 갈등을 이어가는 점 역시 애정의 문제에 더해 그가 생각하는 대의란 무엇인가와 연관지어 이해할 수 있다.
<소오강호> 전 8권
문화대혁명 시기에 집필된 김용의 소설이라는 점에서, 그 시대를 (무협 소설이라는) 우회하는 방식으로 담아냈다는 추측을 할 수 있는 소설이기도. “신공을 익히고 싶다면 자신의 궁전에 칼을 뽑아야 한다”는 표현처럼, 천하무적의 경지를 얻는 데 필요한 희생, 그리고 정의연하는 불의에 대해 말한다. 강호의 신의는 땅에 떨어졌다. 정파와 사파의 갈등은 두 남자의 우정을 통해 승화되는데 정파와 사파는 과연 다른가, 하는 질문을 던지게 한다. 화산파 대사형인 영호충이 무림 각 정파의 계략에 휘말리면서 겪게 되는 일을 그렸다. 작가 자신이 꼽은 최고의 작품 중 하나로 꼽히고, 허무주의적인 정서가 매력적이다. 실제 역사와의 연관성이 유난히 흐린 작품이라 오히려 김용이 자유롭게 정교한 무협의 세계를 창조했다는 인상. 영화 <동방불패>(1992)의 원작이긴 하지만 중요한 캐릭터 설정에서는 큰 차이가 있음을 명심할 것. 세계 최대 전자상거래 업체인 알리바바의 마윈 회장이 예명을 <소오강호>의 화산파 검종 고수로 나오는 풍청양이라고 지었다는 뉴스도 나왔는데, 심지어 알리바바의 9대 가치관을 묶어 풍청양이 영호충에게 전수한 무술인 독고구검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소오강호>에는 “무초가 유초를 이긴다”는 문장이 나오는데, “검술이 절정에 이른 사람마저 그 초식을 깨뜨릴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초식 자체가 없기 때문이니라”라는 풍청양의 입을 빈 문장이 그 깊은 뜻을 헤아리게 한다.
<녹정기> 전 12권
김용의 마지막 무협 소설. 청나라 초를 무대로 한다. 마지막 작품이기도 하지만, 이전 작품들과 를 가르는 점은 무협소설의 판타지적 성격을 많이 걷어내고 장르를 리얼리즘에 가깝게, 그래서 반무협이면서 무협을 추구하는 작품이 바로 <녹정기>라는 데 있다. 절대선과 절대악이 없음은 물론, 영웅적인 활약은 있어도 영웅을 내세우지 않는다. <천룡팔부>의 교봉을 자살로 맺은 이후 영웅을 앞세워 세상의 의를 실천하는 대신 그 반대되는 인물을 내세운 대표적인 캐릭터가 바로 위소보. 주인공 위소보가 청나라 강희제의 우정을 얻어 그를 위해 많은 사건을 해결한다. 재물과 여색을 적극적으로 탐하는 위소보는 일곱명의 아내를 얻어 은둔한다. 무림의 고수라기보다는 잔머리의 고수라고 할 수 있는 위소보가 자신의 성격과 욕망 때문에 부딪히는 온갖 부비트랩을 설치한 김용의 글에 감탄하게 되는 소설이기도 한데, 시정잡배 혹은 동네 양아치 같은 위소보라는 캐릭터의 특징을 떠올리면 왕정 감독이 연출하고 주성치가 위소보를 연기한 1992년작 영화 <녹정기>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무협 소설에 비판적인 (문학)평론가조차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김용의 걸작으로 가 꼽히곤 하는데, 김용의 소설 세계가 무협을 쌓고 반무협으로 허물어가는 거대한 우주와 같다는 점을 떠올리면 무협 소설에 비판적인 이들의 인정 같은 것이 중요할 리 없지 않나 싶어진다. 어느 한 작품만으로 김용의 소설을 말하기 어렵다는 것이 김용 작품들의 특징으로, 어떤 성격의 인물이 주인공이 되는가, 그 변화를 알아가는 과정이 김용 독서의 재미 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