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에 준공되었고 1999년에 재건축 논의가 시작돼 2018년에 마침내 이주와 철거가 모두 진행된 서울 강동구의 둔촌주공아파트. 143개동, 5930세대가 거주했던 오래된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철거되기 전, 누군가는 이 공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둔촌주공아파트에서 나고 자란 이인규씨는 독립 출판물 <안녕, 둔촌주공아파트>를 펴냄으로써 아파트 단지에 깃든 사사롭지만 기억할 만한 시간들을 정리한다. 라야 감독의 <집의 시간들>은 그 기록 프로젝트의 연장선상에 놓인 작품이다. 영화는 여러 개인의 구술 인터뷰와 아파트 내외부의 이미지로 이루어진다. 서울의 아파트 단지로선 드물게 녹지를 끼고 있는 아파트. 그곳에서 20년 넘게 살며 자식들을 키운 중년의 여성과 남성, 자신이 유년기를 보낸 곳에서 자식을 낳아 키우는 여성 등 10여명의 인터뷰 대상자들은 둔촌주공에서 살며 느낀 것들을 들려준다. 휴식 공간으로서의 집, 공동체의 토대로서의 집에 대한 얘기를 듣다보면 사람과 집과 동네가 얼마나 밀접하게 영향을 주고받는지 알 수 있다. 무엇보다 사람들은 초록의 자연이 가까이 있다는 데서 확실한 행복을 느낀다. 이처럼 내가 자란 공간을 기억하고자 시작된 사적인 프로젝트는 재건축의 방향은 어떠해야 하는지 생각하게 만드는 공공 프로젝트로 완성되었다. 가족사진, 꽃이 핀 화분, 시계와 거울 등 일상의 물건을 담은 영상은 정물 화가의 시선으로 기록한 사진 앨범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