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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의 정신①] 페르난도 E. 솔라나스 특별전에 부쳐 - 제3영화의 가치, 혹은 정치영화를 본다는 것

저항의 연대기는 계속되어야 한다

<불타는 시간의 연대기>

페르난도 E. 솔라나스 감독이 지난 9월 13일 개막한 제10회 DMZ국제다큐영화제를 찾았다. 여든이 넘은 감독의 한국행을 성사시킨 데는 김동원 감독의 공이 컸다. 김 감독이 남미 여행 도중 만난 솔라나스 감독에게 참석을 제안했고, 솔라나스 감독이 고민 후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다. 두 사람의 만남은 제3세계 영화 운동의 기수와 그와 영향관계에 있음이 분명한 한국 영화 운동사를 대표하는 감독의 역사적인 만남처럼 보였다. 그러나 마스터클래스 자리에서 재회한 두 사람이 밝힌 인연은 사적인 부분에 관한 거였다. 두 감독은 영화를 시작하기 전 음악과 연극을 한 적이 있다. 솔라나스 감독은 피아노와 작곡을 공부한 적이 있고, 김동원 감독은 밴드 멤버로 활동하기도 했다. 다큐멘터리가 아닌 극영화 연출을 꿈꿨다는 것도 통한다. 30대 초반에 첫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공통점이다. 김동원 감독은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로 인해 삶의 터전을 잃은 채 사람들과 함께 지내며 <상계동 올림픽>(1988)을 찍었다. 솔라나스 감독은 신식민주의 정책으로 인한 라틴아메리카 및 아프리카, 아시아의 고통을 <불타는 시간의 연대기>에 담았다. 솔라나스 감독은 김 감독에 대해 ‘오래된 새로운 친구’라는 표현으로 애정을 표했다.

페르난도 E. 솔라나스 감독을 생각하면 자동 기술적으로 떠오르는 것은 ‘제3영화’ 개념이다. 페르난도 E. 솔라나스와 옥타비오 게티노는 ‘제3영화 서설’이라는 논문에서 영화를 3가지 범주로 구분한다. 제1영화는 ‘현실의 이미지가 현실 자체보다 더 중요한’, 지배계급의 욕구에 봉사하고, 대중의 마취제 역할을 하는 할리우드영화를 말한다. 제2영화는 지식인 등 선택된 관객의 욕구를 충족하는 작가영화다. 이에 대항한 제3영화는 제3세계 해방을 위한 혁명적인 영화를 말한다. 이러한 이론을 바탕으로 그들이 만든 영화가 <불타는 시간의 연대기>다(<새로운 영화를 위하여>, 서울영상집단 펴냄). 어떤 영화들은 정치성이나 메시지가 전부인 양 오해되기도 하는데, <불타는 시간의 연대기>도 그런 축에 속한다. 그러나 내가 영화에 매혹된 이유는 그것의 정치성이나 생생한 프로파간다 때문이 아니라 너무나 영화적이었기 때문이다. 영화적인 것은 다시 시대 혹은 정치성과 접속할 수 있는 창이 되어주었다. 제3영화의 의미는 아마도 둘 사이의 어디쯤 있을 것이다. 극영화와 다큐멘터리를 넘나들며 실험적이고도 시적인 영화를 만들어온 페르난도 E. 솔라나스 감독의 방대한 영화 세계를 정리하기에는 글을 쓸 지면도, 펼쳐낼 나의 식견도 좁디좁다. 여기서는 이번 영화제에서 상영된 그의 데뷔작과 최근작인 <불타는 시간의 연대기>와 <죽음을 경작하는 사람들>(2018)을 언급하며 50년의 고리를 상상하고 가늠해보려고 한다.

붙타는

4시간20분에 달하는 <불타는 시간의 연대기>는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각각은 ‘신식민주의와 폭력’, ‘해방을 위한 행동’, ‘폭력과 해방’이라 이름 붙여졌다. 각각에 담긴 내용보다 주목되는 건 그것이 지닌 형식이다. 감독은 인터뷰에서 3부를 각각 다른 형태로 구성했음을 밝힌 바 있는데, 간단히 말하면 영화사적 맥락이 각 부의 형식 속에 녹아 있다. 무성영화를 연상시키는 1부는 대부분 사진과 텍스트 이미지로 구성된다. 2부에 이르러 뉴스릴과 인터뷰 등 육성이 포함된 아카이브가 사용된다. 3부에 이르러서는 명상적 내레이션을 통해 회고하고 정리하는 느낌을 준다.

개별적으로 분리된 챕터는 모종의 연계성을 지닌다. 그중 가장 핵심적인 것이 영화가 관객에게 무언가를 말하려 한다는 사실이다. <불타는 시간의 연대기>는 관객을 직접 소구한다. 영화를 상영할 때마다 극장 앞에 ‘모든 관객은 배신자이거나 방관자다’라는 플래카드를 써붙이며 관객을 도발했다는 일화 때문만은 아니다. 영화가 그 내부에 관객의 자리를 마련해놓고 있기 때문이다. 2부 끝에서 영화는 ‘동지’라는 호칭으로 관객을 소환한다. 관객은 영화적으로 완결된 결론을 제공받는 대신, 토론을 통해 나름의 결론에 도달하도록 강제당한다. 3부는 라틴아메리카를 넘어 아프리카, 아시아 등 제국주의의 식민지 정책의 폐해를 겪은 국가들이 연대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강하게 전한다. 영화 내부에 잠재된 관객을 향한 말 걸기는 이 영화가 상영될 때마다 다시 관객의 몸을 통해 가장 현재적인 것으로 살아나도록 만드는 힘이 된다.

<죽음을 경작하는 사람들>

시간의

영화는 관객을 호명하지 않고도 관객에게 말을 건다. 1부의 마지막 체 게바라의 얼굴을 응시하는 장면이 그렇다. 눈 뜬 채 죽은 체 게바라의 정면 얼굴 사진으로 바짝 다가간 카메라는 꼼짝없이 3분30초간 그 얼굴을 보여준다. 그의 얼굴을 마주하고 있노라면 그것이 죽은 사람의 것임을 잠시 잊게 된다. 그와 동시에 그가 곧 입을 열고 말을 할 것만 같은 초조함에 빠진다. 이때 흐르는 강렬한 타악기 소리는 장면을 더욱 강렬하게 만든다. 죽은 것을 산 것처럼 만드는 것은 <불타는 시간의 연대기> 전반에 흐르는 정조이자 목적이다. 이는 곧 영화의 존재론과도 관련된다. 영화는 지나간 것과 지나가지 않은 것을 섞이게 하며, 영원히 현재화하는 힘을 지녔기 때문이다. 앙드레 바쟁은 ‘사진적 영상의 존재론’이란 글에서 사진의 발명이 회화를 비롯한 조형예술의 유사성을 굴레에서 해방하는 동시에, 그 자신이 회화와 조형예술이 가진 영속성의 욕망을 떠안았으며, 또한 그 욕망을 변형시켰다고 보았다(앙드레 바쟁, <영화란 무엇인가>). 체 게바라의 얼굴을 향한 카메라의 집요한 응시는 영상을 통한 시체 방부처리 작업이며, 이를 통해 그의 얼굴은 영구 보존된다. 숏 위를 흐르는 음악의 운동성은 살아 움직이는 듯한 환영을 더욱 부추긴다.

이러한 맥락에서 영화가 활자를 사용하는 방식이 주목된다. 영화에서 텍스트는 단지 제목과 중간제목의 기능을 한다거나 어떤 내용을 전달하는 수단이 아니라 영화 내부의 당당한 주인공이다. 영화에 쓰인 텍스트는 영상 타이포그래피로, 일종의 이미지다. 텍스트의 나타남과 사라짐을 통해 다른 서사를 암시한다. 이를테면 ‘인간의 가치’라는 활자가 점점 조그맣게 줄어드는 이미지는 인간의 가치가 말소되어가는 현실에 관한 코멘트다. 정지된 이미지에 급박한 화면 전환과 음향을 덧입혀 역동성을 부여하기도 한다. 이는 체 게바라의 죽음에 관한 영화의 코멘트, ‘죽음을 선택하며, 삶을 선택한 것’이라는 역설적 문장과 조응한다. 죽은 것을 살게 하는 것은 곧 영화다. 영화는 활자, 사진과 같은 정지된 이미지에 움직임과 시간성을 부여해 그것들이 다시 작동하게끔 만든다. 이 영화가 여전히 선동적이라면 무엇보다 영화 속에서 창출된 무수한 움직임들이 얼마간 관객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연대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들은 현재 이곳에 발 딛고 선 사람들이다. 2부에서 광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이 주는 스펙터클의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가난하고 힘없이 카메라를 응시하는 사람들이 비칠 때 역시 시대를 증언하는 자로서의 위엄이 도사린다. 물론 이것이 대상화의 시선일 수 있음을 안다. 그러나 영화 속 사람들의 모습이 주는 매혹을 부인할 수 없다. 인물을 보여주는 다른 방식도 주목된다. 영화는 대상을 원래의 것에서 다른 것으로 이행하는 몽타주 기법을 통해 대상화에 저항한다. 이를테면 고공에 난 기찻길을 따라 구걸하며 달려오는 아이의 모습과 함께 카메라를 내려보는 듯한 고층 건물 이미지를 충돌시킬 때,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그것 사이에서 발생하는 어떤 부딪힘이다. 우아한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동물들이 희생당하는 장면과 광고 이미지가 교차되는 시퀀스 역시 이와 비슷한 맥락 안에 있다. 보이는 것은 각각의 대상이 아닌, 그것의 간격이다.

<죽음을 경작하는 사람들>은 언뜻 보면 굉장히 전형적인 인터뷰 다큐멘터리 제작 방식을 따르는 듯 보인다. 솔라나스는 아르헨티나 농업 현실을 발견하기 위해 이곳저곳을 다니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처음에는 별다른 정책적인 언급이 없다는 것이 의아했다. 그는 영화감독이자 정치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곱씹어 생각하다 보니 이 영화의 목적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영화가 이야기를 끌어내는 방식 때문이다. 영화 속 사람들은 질문에 맞춰 대답하는 것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하며 솔라나스를 이끈다. 이야기가 감독으로부터가 아닌 그곳의 사람들로부터 흘러나오게 하는 것, 여기에 솔라나스의 영화가 보여준 제작자의 태도가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오직 뚜벅뚜벅 걸으며 사람들의 고립된 외로움과 삶에의 열정을 잇는 하나의 선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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