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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애도자들
김혜리 2018-09-18

<살아남은 아이> <죄 많은 소녀>

*<살아남은 아이>와 <죄 많은 소녀>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체실 비치에서>

잉글랜드 도싯의 체실 비치는 해안 어디께냐에 따라 자갈의 마모 정도가 달라 캄캄한 밤에 닿아도 어부들이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있다는 곳이다. 그러나 막 체실 비치에 도착한 1962년의 신혼부부 플로렌스(시얼샤 로넌)과 에드워드(빌리 하울)는 경우가 다르다. 둘은 삶의 희망찬 출발점에 서 있다고 믿지만 하루도 못 돼 의심에 사로 잡힌다. 순진하고 자존심 강한 젊은이들은 한번의 어긋남에 너무 멀리 내다보고 성급한 결론을 낸다. 앞으로도 당신이 원하는 걸 나는 못 채워줄 거고 그러면 대화가 줄 거야. 우린 불행해질 테고 내가 그 원흉이 되겠지? 영화를 함축한 한숏에서, 플로렌스는 해변에 부려진 조각배에 올라 마치 떠날 준비를 마친 것처럼 보인다. 분노한 에드워드는 소금기둥이 된 양 우두커니 서 있다. 도미닉 쿡 감독은 영화 내내 두 인물의 거리와 배치 구도에 정성을 들였다. 이 장면에서 프레임 밖으로 나가는 행위는 곧 관계의 종말을 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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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은 아이>는 애도의 첫 단계가 지나간 다음 시작한다. 아이를 사고로 여읜 아버지는 아들 명의의 장학 재단을 학교와 의논하기 시작하고 어머니에게는 친지의 백일잔치 초대가 조심스럽게 다시 들어온다. 인테리어 가게를 운영하는 성철(최무성)과 미숙(김여진)의 고등학생 아들 은찬은 물놀이를 갔다가 동급생 기현(성유빈)을 구하고 강에서 미처 나오지 못했다. 똑같은 비극을 한시에 겪어도 헤엄쳐 나오는 방식은 다르다. 성철은 공사 현장에서 몸을 괴롭히고 미숙은 커튼 내린 방에 모로 웅크린다. 그리고 부부는 낮 동안 무엇을 했는지 서로에게 말하지 않는다. 누구하고도 나눠지지 않는 슬픔이 있다. 영화 초반 부부의 대화 신은 나뉜 숏으로 찍혀 있다. 그러다 남편에게 비밀이 생긴다. 현장 옥상에서 배선 공사 자리를 어림잡던 성철은, 응어리 뱉듯 소리를 지르며 스쿠터를 달리는 기현을 본다. 소년 뒤에는 한무리의 남자아이들이 웅성거린다. 아들이 구한 소년이 학교를 그만두고 부모에게 방치돼 생활비를 벌고 있음을 안 성철은 도배 일을 가르쳐주겠다고 제안한다. 은찬이 하려던, 그 아이를 구하는 일을 완수하려는 듯. 기현을 ‘은찬이 죽인 애’로 여기는 미숙에게는 우선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테이블이 뒤집혀 영화 후반부에는 미숙이 남편 모르는 기현의 비밀을 끌어안게 된다. 자식을 잃은 남자들은 아이가 성장해 어떤 존재가 되지 못한 것을 슬퍼하고, 여자들은 기억하는 과거의 아이를 그리워한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미숙은 은찬이 제일 친했다고 믿는 준영(박찬)을 만나려고 처량하게 애쓰는 한편 인공수정으로 둘째를 가질 결심을 한다. 아들이 구한 아이, 아들의 친구, 아들의 동생. 요컨대 부부는 은찬의 흔적을, 애도를 사랑으로 전환해 쏟을 수 있는 대상을 애타게 찾는 중이다. 이야기 측면에서 <살아남은 아이>와 줄곧 비교되는 다르덴 형제 감독의 <아들>(2002)에서, 목수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는 어린 아들을 살해한 소년을 견습생으로 받길 거부하지만 그날 저녁 전처가 새 파트너와 아기를 가졌다고 알리자 생각을 바꾼다. 아내에게 화가 나서일 수도 있지만, 소년범에게서 죽은 아들의 유일한 대역을 무의식적으로 보았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숙련된 장인 올리비에는 아들이 무탈하게 자랐다면 아버지로서 보여주고 가르쳐주고 싶었던 것들을 어느새 가해자에게 가르친다.

마침내 미숙도 기현을 가족의 친구로 받아들인다. 이해하기 힘든 상황은 아니다. 깊은 상실을 경험한 이들은, 구구절절한 위로를 건네는 혈육보다 온 우주로부터 고립된 ‘그때 그 자리’를 동시에 체험한 타인을- 심지어 그가 비극의 원인을 제공했더라도- 가깝게 느끼기도 한다. <래빗홀>(2010)의 베카(니콜 키드먼)는 갑자기 차도로 뛰어든 5살 아들을 칠 수밖에 없었던 10대 소년 제이슨(마일스 텔러)에 집착한다. 그리고 소년과의 대화에서 평화를 찾는다. 게다가 기현은 은찬의 죽음에 원인을 제공한 사람이 아니라 은찬이 자발적으로 구한 사람이다. 소년은 착한 아들의 살아 있는 증거이고 곁에 둠으로써 애도를 건강하게 이전할 장소가 되어줄 수 있다. 이렇게 <살아남은 아이>는 일단 조화로운 ‘바른 마침’에 한번 당도한다. <밀양>(2007)의 신애(전도연)도 기독교에 귀의함으로써 잠시 머무를 수 있었던 기착지다. 그런데 관객이 안도했을 때 <살아남은 아이>는 완전히 다시 시작한다.

은찬의 죽음에서 기현이 한 역할은 세상에 알려진 것과 달랐다. 모두가 평화롭게 은찬의 죽음을 잊으려는 순간 기현은 뒤늦게 그 죽음의 의미를 깨닫는다. 은찬의 죽음과 기현의 삶이 끊을 수 없는 매듭으로 결박돼 있음을 진실로 ‘아는’ 자는 기현뿐이다. 같은 자리에 있었던 아이들은 기술적으로는 진상을 알지만, 진정한 의미에서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는) 무지하다. 사실은 언제나 거기 있지만 진실은 보고자 하는 사람에게만 존재한다. 자살을 포함해 부자연스런 원인으로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람들은 모두 ‘왜’와 ‘어떻게’를 알기 전까지 죽음은 끝나지 않는다고 고통을 호소한다. 기현은 단도직입적으로 이 각성에 도달하고 실천해버린다. 은찬은 의롭게 죽은 아이에서 죽임을 당한 아이로 바뀌고, 성철과 미숙에게 이는 완전히 새로운 두 번째 죽음이다. 부부는 애도의 여정을 처음부터 다시 걸어야만 한다. 훨씬 낮은 톤이지만 <래빗홀>에도 유사한 광경이 있다. 제이슨은 베카에게 문득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꺼낸다. “그날 어쩌면 제가 시속 30km를 넘었을지도 몰라요. 보통은 계기판을 보는데 그날은 확실치 않아요. 그러니까 어쩌면 31km나 32km로 운전했을 수 있어요. 이 말을 꼭 드리고 싶었어요.” 이때 애도하는 어머니의 얼굴에 떠오르는 감정은 분노가 아니라 고마움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불시에 빼앗긴 이들은 관계 속에 형성한 본인의 정체성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고통을 겪는다. 그들의 일부도 순장된 것이다. 어째서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에 관한 질문에 더 많은 대답이 제시되고 퍼즐의 조각이 채워질수록 애도하는 사람들은 천천히 다시 삶을 납득할 수 있다. 제이슨과 기현은 본능적으로 이를 이해한다. “진실을 밝힌다고 죽은 아이가 살아 돌아오는가?”라는 말은 공허하다. 이 반문에서 생략된 괄호 안의 지적은 “산 사람들만 피해를 볼 뿐”이다. 그러나 진실을 묻어버린다고 해도 죽음을 돌이킬 수 없음은 마찬가지다. 앎이 만들어내는 차이, 줄 수 있는 위로는 궁극적으로 망자와 애도하는 이들에게만 해당된다. 관건은 이 차이의 의미를 사회가 얼마나 존중하느냐다(제3자에게는 차이가 없다는 표현은 세월호의 경우를 염두에 둔 것이 아니다. 사회 시스템의 역기능이 초래한 재난의 경우 진실까지 가기 전 사실관계 규명부터 비극의 반복을 방지하는 데에 필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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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은 아이>에서 가장 윤리적인 ‘단독자’는 기묘하게도 철 없는 소년 기현이다. 이 말은 기현이 도덕적으로 가장 훌륭한 캐릭터란 뜻이 아니다. 고아나 다름없는 처지의 소년은 성철 부부가 유일한 자신의 사회적 보호막임을 알면서도 누구에게도 상의하지 않고 진술을 번복해 죄를 인정한다. 다른 아이들의 책임을 거론해 책임을 나누려는 시도도 없다. 어리고 철없기 때문에 자신이 잃어버릴 것들을 헤아리지 않은 채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에만 몰두했을 수도 있다. 나는 기현에게 부모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상상해보았다. 극중에서 은찬의 죽음과 관련된 보호자가 있는 다른 아이들, 그리고 교사들은 침묵을 택한다. 이해는 가능하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아이를 온전한 어른으로 키우는 책임을 가진 부모의 존재가 성장을 차단하는 형국인 것도 사실이다. 자백에도 불구하고 죄가 인정되지 않은 기현은 다시 스스럼없이 일을 하고 성철과 미숙을 만난다. 신동석 감독은 영화 속에서 단 한숏도 사고 현장의 플래시백을 넣지 않았다. 기현은 은찬의 죽음에 대한 직접적 책임을 인정하고 다른 아이들도 기현이 애초 준영을 괴롭혀 사고를 초래한 주모자라고 증언하지만 그것은 영화적으로는 ‘진술’ 일 뿐이다. 그럼으로써 영화는 기현의 기억과 양심에 의거한 일말의 진실을 전하는 데에서 멈추기를 택한다. 엄청난 일을 겪으며 가능한 대로 생존해가는 10대 기현은 고정되지 않는 존재다. 그는 애도하지만 애도에 고착되지 않는다. 은찬의 부모와 달리 소년은 아직 한번의 삶을 살지 않았다. 아마도 본인에게조차 소년은 아직 미스터리일 터다.

<살아남은 아이>는 클로즈업을 허비하지 않는 영화이기도 하다. 드라마와 영화에서 투박한 무사형 캐릭터를 주로 연기해온 배우 최무성의 성철은 타입 캐스팅이 얼마나 영화의 막대한 손실인지 알려준다. 전에 없이 카메라가 깊이 응시하는 이 배우의 얼굴은 감정을 쉽게 흘리고 남에게 전가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최무성이 체현하는 성철은 한국영화에 만성적으로 결핍된 두 가지를 확인시킨다. 하나는 설명할 필요도 없이, 존경할 만한 남성성이다. 둘째는 몸의 연기다. 오해하지 말자. 한국영화는 싸우는 액션 연기의 과잉 상태다. 여기서 말하고 싶은 피지컬 연기는 노동이다. 인간이 사회에서 처한 위치나 자기 정체성에서 직업과 노동이 차지하는 비중을 표현하는 데에 한국영화는 대체로 취약하다. 인물의 성격은 물론 직업도 주로 대사와 의상이 대변할 뿐, 한 사람이 오랫동안 반복하는 일이 신체에 새기는 흔적과 퍼스낼리티에 끼치는 영향에 한국영화의 카메라는 무심한 편이다. 인테리어숍 사장이자 기술자인 성철은 부수고 고치고 개축하는 일을 한다. 낡은 집들이 그럭저럭 구조를 버티고 안온한 분위기로 거주자를 보호할 수 있도록 하는 작업이다. 아들을 잃은 비극에 대해서도 성철은 자기가 아는 방식으로 대처하고자 노력한다. 마침내 그것이 불가능해졌을 때 그는 평생의 일도 놓아 버린다. 또한 성철은 정확하고 실질적인 인간이다. 기현이 엄마는 연락 끊긴 지 오래고 아빠는 재혼하더니 알아서 잘 살라고 했다고 처지를 밝혔을 때 성철은 연민의 정을 표하는 데에 숨을 낭비하지 않고 곧장 “앞으로 어떻게 할 건데?”라고 묻는다. 그리고 줄 수 있는 도움을 제시한다. <살아남은 아이>는 대단한 물리적 충동 없이 매 순간 배우들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긴장하게 만드는데, 주된 원인은 미숙 역의 배우 김여진이다. 미숙은 날 때부터 비탄을 뒤집어쓴 캐릭터가 아니라 계속 뒤돌아보면서 끈질기게 살고자 하는 활달한 사람이다. 고객의 상담 전화를 처리할 때, 아들의 친구를 만나 짐짓 명랑한 척할 때, 문병 온 기현을 마지못한 척 끌어 앉힐 때 우리는 그가 본래 어떤 여자였는지 본다. 내가 이 영화에서 너무나 옳다고 여긴 김여진 배우의 연기는 친구 부부들과 오랜만에 회식을 한 후 남편과 둘만 남았을 때의 모습이다. 포상금 액수를 묻던 무신경한 인사들을 미숙은 아주 심상하게 비난한다. 피곤에 전 스타킹을 훌훌 벗어던지며 층간 소음을 내는 칠칠치 못한 이웃을 타박하듯 욕한다. 영화에서 아들의 의사자 표창식에서 미숙이 곧 뛰쳐나갈 것처럼 속울음을 울던 날과 같은 날의 일이다. 미숙은, 성철에게만큼은 슬픔의 깊이를 시위하고 타인의 무신경을 지적할 필요가 없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냐고 말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소외는 이 부부의 일상이다. 다음 순간 미숙은 은찬이 보고 싶다고 운다. 문득 허기를 깨달은 사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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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의 원점으로 재차 멱살잡혀 끌려간 부부는 진상 규명이 수포로 돌아가자 사회로 복귀할 기력을 잃는다. 남은 것은 정념 뿐이고 그것을 쏟아낼 대상은 기현뿐이다. 성철은 기현을 마지막 소풍에 초대하고 미숙은 묵과한다. 은찬이 죽어간 강이 보이는 숲에서 벌어지는 마지막 시퀀스에서 성철의 의지는 <복수는 나의 것>(2002)의 동진(송강호)과 <아들>의 올리비에의 중간 어디쯤이다. 동진처럼 “착한 놈인 것 알면서도” 결연히 형을 집행하지 않지만, 도망치는 소년을 수동적으로 제압하다 목을 조르게 되는 올리비에보다는 의지가 선명하다. 퍼뜩 깨어난 듯 손을 떼는 성철에게 깔린 기현의 상의에 달린 안전핀이 관객의 눈을 찌른다. 언젠가 실리콘 작업에 유용한 팁으로 성철이 알려준 도구다. 성철이 그것을 보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 작은 사물은, 은찬을 향한 애도를 지울 수 없듯 부부와 기현의 관계도 무화할 수 없다고 희미하게 속삭인다. 유사 부모라는 표현을 꺼내지 않더라도, 두 사람과 기현은 이미 연결됐고 결과를 막론하고 서로가 삶을 지속할 수 있도록 돕고자 했다. 신동석 감독은 머뭇거리는 것처럼 보인다. 인물의 의식보다 영화가 앞질러나가기를 두려워하며. 우리는 기현의 마지막 행동이 그에게 가능한 마지막 대속-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의 시도라고 볼 수 있고, “은찬아, 안 돼!”라고 외치며 그를 붙든 미숙의 손길은 실현되지 못한 간절한 구명의 대신으로 읽을 수도 있다. 혹자는 선한 부부가 끝내 살의에 사로잡혔다는 사실을 안타까워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복수를 원하는 마음을 비윤리적이라 할 수는 없다. 비윤리적인 것은 복수에서 얻는 쾌감일 터다. 결국 은찬이 죽어간 물에 들어갔다 나온 세 사람은 침례로 거듭난 것일까?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 정경은 엉망진창이다. 겨우 숨만 쉬는 성철과 기현은 한동안 일어날 수 없을 것 같다. 소년은 자신을 향한 증오를 확인했고 부부는 출구를 찾지 못했다. <살아남은 아이>의 결말에 남은 것은 오로지 결국 누구도 죽이지 못했고 죽지 않았다는 사실뿐이다. 두 번째로 영화를 보면서 나는 어쩌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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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하는 자들을 바라보는 나머지 세상의 둔감함을 <죄 많은 소녀>는 다소 잔인하게 표현한다. 실종된 딸의 시신을 찾는 현장에 필요한 텐트를 사러 온 엄마(서영화)에게, 아무것도 모르는 여행용품 가게 사장은 “어디 좋은 데 가시나봐요?”라고 말을 건다. 김의석 감독은 10대 소녀 경민(전소니)의 자살이 불러온 눈덩이 효과를 호러의 무드로 그린다. 아니, 솔직히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2000)의 잔상이 아니었다면 이렇게까지 쓰진 않았을지도 모른다. 영화 도입부는 웅성거리는 여고생들의 실루엣으로 시작해, 무슨 사연인지 목의 부상으로 말을 못하는 영희(전여빈)가 교실에 돌아와 수화로 인사를 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담임 교사와 급우들은 영문도 모르고 박수를 보내지만 나중에 영화가 같은 신으로 돌아오면 소녀의 수화가 “너희가 그토록 원했던 나의 죽음을 가장 멋지게 완성하기 위해 돌아왔어”라는 의미임을 보태진 자막으로 알게 된다. 가장 공포스러운 점은 말의 내용이 아니라 “너희가 알아듣건 말건 나는 선언하겠다”는 영희의 태도, 그리고 그것을 자막 없이 롱숏으로 지켜보는 영화의 시선이다. 경민과 영희는 지난해까지 친했지만 새 학년 들어 멀어졌고 분리의 고통을 심하게 느끼는 쪽은 경민이다. 유복한 모범생은 경민쪽이었지만 둘 사이 권력자는 이미 새 단짝 한솔(고원희)을 만든 영희다. 경민은 어느 밤 영희와 한솔에 합류해 클럽에 놀러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실종된다. 애정이 그렇게 간절하면 증명해보라는 말다툼이 오간 직후고 마지막 지하도 CCTV에는 영희와 경민의 입맞춤이 찍혀 있다. 영희를 향한 고발의 대사인 “네가 나쁜 생각을 전염시킨다며?”는 자못 추상적인 마녀 사냥의 언어다. <죄 많은 소녀>의 전반은 자신은 선의를 가진 일인일 뿐이라 믿는 어른과 아이들이 영희에게 단도를 한번씩 휘두르는 일종의 ‘오리엔트 특급 살인’이 되어버린다. 하필 경찰이 학교를 찾아온 날 영희는 생리로 심한 출혈 중이다. 통증에 짓눌리며 경찰의 적대적 심문에 응하는 전여빈의 연기는, 여성 관객으로 하여금 인물이 빠진 구렁텅이의 질감을 생생히 전한다. 레즈비언적 관계뿐 아니라, 뒤이어 일어나는 소녀들의 가학적인 패닉 현상과 희생양 찾기까지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로 거슬러가는 연상도 불가피하다. <죄 없는 소녀>는 죄의식의 핀볼 게임으로서, 섬세한 반면 스릴러로서는 요령부득이다. 시나리오는 경민의 실종과 관련된 정보를 가두었다가 하나씩 뒤늦게 흘리는데, 수수께끼로서는 불공평하고 인물에게 들어가고자 하는 노력을 간헐적으로 좌절시킨다. 교사 캐릭터들의 동떨어진 코믹한 연기도 집중을 방해한다.

<죄 많은 소녀>에는 의로운 자도 악한도 없다. 영희가 잠정적으로 선한 희생자로 비쳐지는 것은 미성년 관련자를 제대로 보호하지 않는 극중 어른들의 행동 때문이다. 설령 자살을 부추겼다 해도 직접 가해하지 않은 이상, 영희는 죽은 아이 다음가는 피해자로서 보호받아야 마땅하지만 실상은 딴판이다. 영희는 심지어 아이들에게 린치를 당한 멍든 얼굴로 조문을 강요받는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사랑받지 못한 아이의 복수로 시작한 영화는 모함당한 아이의 복수로 넘어간다. 영희와 직접 대립하는 상대 축은 군중심리로 우왕좌왕하는 동급생들이 아니라, 마지막으로 딸과 함께 있던 소녀가 죄가 있다고 믿고 싶은 경민의 엄마다. 장례식장에서 가장 크게 목놓아 울며 천도제를 치르는 경민의 할머니가 가장 후련해 보인다는 사실은 역설적이다. 엄마는 소리내어 곡하지 못하고 영희는 독한 세제를 들이켜 호흡기를 상하고 만다. 두 번째 역설은 목소리를 잃고 난 영희가 권력을 얻는다는 점이다. 경민의 보복을 열망하던 소녀들은 앞다투어 영희에게 친절히 군다(동영상 편지로 잘못을 씻을 수 있다고 믿는 아이들의 모습이 또 다른 호러다). 영화는 기도에 삽관을 꽂은 영희가 테이프를 붙인 풍선을 주삿바늘로 찌르는 모습을 보여준다. 풍선은 터지지 않고 영희는 더이상 다치지 않을 것이다. 죽은 피해자 이외에 모두의 마음에 흡족한 피해자는 없다.

경민을 가장 사랑한 엄마와 경민이 가장 사랑했던 영희는 서로를 가해자로 지명하며 ‘누명’을 벗으려 한다. 영희와 경민 어머니가 애도하는 대상은 프로이트식으로 말하면 죄 없으나 상처받은 자신이다. 상실감을 옮겨놓을 대상을 찾지 못한 사람들은 애도에 중독되고 그 안에 같이 있던 자가 혼자 빠져나가는 것을 막으려 한다(“잊어? 너네가 뭔데 잊어”). 제목의 ‘죄 많은 소녀’는 과연 누구일까? 생의 의지를 잃은 경민은 자살의 방아쇠로 영희의 모진 한마디가 필요했고, 영희는 경민의 죽음에 대한 결백을 입증하기 위해 자살을 기도했고, 경민의 어머니는 영희가 다시 놓은 덫에 걸리지 않으려고 자해를 감행한다. 살아서 책임짐으로써 반성하기보다 자해하여 세상을 후회하게 만들려는 황폐한 몸부림의 악순환이다.

<어른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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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희

<어른도감>의 세 주인공 가운데 독신의 약사 점희는, 그의 돈을 노리고 접근한 몽상가 재민(엄태구)과 놀랄 만큼 조숙한 경언(이재인)에 비해 땅에 두발을 딛고 있는 인물이다. 점희는 시를 줄줄 외지만 아무 앞에서나 암송하지 않고, 이성교제가 숨은 목적인 산악회에 진짜 등산을 즐기러 나갔다가 기분 잡쳐서 돌아오는 중년이다. 스러지지 않은 청춘의 빛과 삶이 가르쳐준 경계심이 공존하는 점희의 얼굴은 천변만화한다. 냉철하다가도 들뜨면 어설퍼지고 길고양이나 엄마 없는 소녀 앞에서는 깊은 사려를 내비친다. 10여년 만의 섹스를 앞두고 감상에 휘말린 점희의 모습은 코미디로 소모되기 쉬운 장면이지만 그때까지 서정연 배우가 쌓아올린 캐릭터의 복합성이 관객으로 하여금 점희의 감정을 존중하게 만든다. <환절기>(2018), <당신의 부탁>(2018)에 조연으로 출연한 이 배우의 진면목은 김인선 감독의 단편 <수요기도회>(2016)와 신동석 감독의 초기 단편 <물결이 일다>(2005)에서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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