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닝>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직장 동료들은 앙투안(드니 메노세)이 성실하고 괜찮은 남자라고 평한다. 그러나 전처 미리암(레아 드루케)과 두 자녀의 의견은 다르다. 가정법원에 “그 사람을 만나기 싫다”는 11살 막내 줄리앙(토마 지오리아)의 편지가 제출되자, 앙투안과 변호인은 아내가 세뇌한 탓이라 주장한다. 아직 관객은 누가 진실을 말하는지 판단할 수 없다. 그러나 소년이 스크린에 나타나는 순간 답은 자명해진다. 아빠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엿듣는 줄리앙의 얼굴은 굳다 못해 바스라질 지경이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의 긴장은, 소년이 아빠를 겁낼 뿐 아니라 그로부터 엄마를 보호하고 싶어 하기 때문에 더 치솟는다. 아빠와 둘만 있는 차 안은 세상 어디보다 줄리앙에게 위험한 장소다. 안전벨트 경보음의 반복이 그 사실을 불길하게 환기시킨다.
05/20
이창동 감독의 영화는 내게 숨이 턱턱 차오르는 여름이다. 극중 배경이 전부 여름이란 의미는 아니다. <초록물고기> <박하사탕> <오아시스> <밀양> <시>를 떠올리면 언제나 후덥지근하고 매캐하고 날벌레가 윙윙거리는 한국의 눅진한 여름 공기가 코끝에 끼쳐온다. <버닝>도 예외는 아니다. 이 영화의 여름 햇볕은 먼지와 냄새, 아스라한 소음과 어울려 있다(유일하게 눈발 날리는 에필로그 시퀀스가 환상 내지 종수(유아인)가 쓴 소설로 보이는 이유 중 하나다). <버닝>의 특기할 점은 카메라가 여름 안에서도 빛이 결핍된 시간과 장소를 집요하게 더듬는다는 것이다. <버닝>의 빛은 사위어가고 있거나 역광이거나, 대체로 광량이 부족하며 해미(전종서)와 종수의 공간에는 극히 드물게 떨어진다. 홍경표 촬영감독은 이 어둑함의 ‘50가지 단계’를 분별하고 음미한다. 대사를 소거하고 이미지와 음향만으로 <버닝>을 보아도 영화의 요체를 따라갈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잠시 상상했다.
세 캐릭터가 주역이지만 <버닝>은 이창동 감독의 어떤 영화보다 한 사람의 의식 흐름에 집중한다. 이종수 외 두 인물은 놀랄 만큼 도구로 쓰였다. 원작으로 명시된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헛간을 태우다>로부터 가장 동떨어져 있는 인물도 종수다. 종수만 두고 보면 하루키가 제목(Barn Burning)을 가져온 윌리엄 포크너의 단편 <타오르는 헛간>의 주인공이 모델에 더 가깝다(<타오르는 헛간>의 ‘나’는 분노조절장애로 지주의 헛간에 불을 지르는 소작인의 어린 아들로, 아버지를 닮았지만 동시에 번듯한 삶을 동경한다. 불은 무력한 ‘나’의 아버지가 삶을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으로 나온다). 화면에 빛이 결핍된 <버닝>은 지금 한국 무산 계급 남성 청년의 좌절과 분노를 말하며, 이종수의 특징은 행동의 결여다. 작가 지망생이라지만 글 쓰는 모습은 좀처럼 보이지 않으며 늘 입을 조금 벌린 채 세상을 구경하고 무던히 순응한다. 생의 여름을 지나고 있지만 그는 무기력하고 약간 마비된 것처럼 보인다. 종수의 세계에서 먼지처럼 떠돌기만 하던 인화물질에 부싯돌이 쳐지는 순간은, 우연히 만난 고향 친구 해미의 집에 초대된 날이다. 해미의 옥탑방으로 올라가는 층계참에서 그는 서울의 전망에 시선을 멈춘다. 허겁지겁 선물 같은 섹스를 하고, 남산타워로부터 반사된 귀한 햇볕이 벽지에 그리는 무늬를 본다. 적막 속에 잠들어 있던 가능성들이 별안간 일제히 신호를 보낸다. 해미와 헤어져 파주 집으로 돌아온 종수에겐 바깥세상으로부터 정체 모를 전화가 걸려오기 시작하고, 아버지가 남긴 열쇠 꾸러미는 그에게 낡은 트럭과 칼이 즐비한 금고 문을 열어준다.
발연점은 해미가 부유한 새 남자친구 벤(스티븐 연)과 함께 종수의 집을 방문해 대마초를 나눠 피우는 저녁이다. 벤은 비닐하우스 방화 취미를 털어놓으며 종수의 머리에 이미지의 씨앗을 심는다. 두 사람이 서울로 떠난 후 종수는 어린 자신이 활활 타는 비닐하우스를 황홀하게 지켜보는 꿈을 꾼다. 그동안 출구 없이 축적된 박탈감과 질투는 한번의 화염으로 타오르게 될 것이다. 이후 해미의 실종을 포함해 종수가 보고 듣는 사건은, 이미 머릿속에 붙여진 불꽃을 향해 놓인- 어쩌면 종수의 자의식으로 왜곡된- 징검돌처럼 보인다. 종수가 선망하는 동시에 혐오하는 남자 벤을 해미를 해친 용의자로 점찍고 시골길에서 미행하는 장면은, 포르셰를 사이에 두고 지평선을 유유히 바라보는 벤과 웅크려 몸을 숨긴 종수를 잡은 정적인 롱숏으로 귀결된다. 이 하나의 선명한 이미지로 종수를 움직이는 질투와 욕망이 정리된 직후 마치 그것이 꿈인 양 종수는 잠에서 퍼뜩 깨어 오래전 가출한 어머니로부터 전화를 받는다. 종수는 어머니의 가출이 자신을 무력하게 만든 트라우마라고 여겨왔으나 재회는 충격적일 만큼 무의미하다. 단순히 500만원이 아쉬워 연락한 어머니의 속된 표정은, 어떻게든 삶의 의미를 구하려고 애쓰던 신애(전도연)의 시도를 거절하던 <밀양> 속 소도시의 축소판이다. 그러나 종수는 개의치 않는다. 이미 그에겐 해미와 벤이라는 출구가 생겼기 때문이다. 이제 엄마는 해미가 진짜였는지, 진실을 말했는지 판가름할 우물에 대한 증인으로서만 의미가 있다. 아니, 해미조차 핑계에 불과하다. 종수는 벤에게 “해미를 사랑한다”고 선언하지만 현실의 해미가 둘 사이에 들어서는 순간 그 말은 흩어져버린다. 그는 해미가 빚이 있는지, 가족과 어떤 상태인지 그녀의 곤경을 자세히 알지 못했고 해미 역시 종수의 처지를 묻지 않았다. 종수는 고백하지 않은 채 혼자 짐작하고 실망하고 분노했다가 대신 복수하겠다고 비장할 뿐이다.
‘버닝’의 원형인 동사 ‘burn’은 ‘타다’와 ‘태우다’의 두 의미를 갖는다. “연기처럼 사라진” 해미는 스스로 타서 소멸하기 원하고, 벤은 세상의 잉여들을 태우며 쾌감을 느낀다. 결말에서 종수는 상대를 태워 복수하는 동시에 완전히 벌거벗고 해미처럼 무화하고자 하지만, 소멸의 해방감에도 복수의 성취감에도 닿지 못하고 액셀을 밟는다. 해당 에필로그는 앞선 장면들과 달리 종수가 볼 수 없는 벤의 생활을 전지적 시점에서 보여주며, 종수가 처음 파주로 돌아가던 장면의 건널목 종소리 같은 사운드로 이전 장면이 마무리된 후에 진행된다는 점에서 비현실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이 현실이냐 아니냐는 <버닝>에서 중요하지 않다. 어느 쪽이건 종수는 기이하리만큼 외톨이다. 타인과 외부 세계는 그에게 기척과 암시로서만 존재한다. 이창동 감독 역시 <밀양>이나 <시>에서와 달리, 절망의 현상을 해부할 뿐 이 절망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말하기를 삼간다. <버닝>의 지옥은 희망의 부재 자체보다 절망과 질투를 곧게 발설할 수 없는 상태에 있다. 종수는 현재 내가 뭘 하든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고 느끼는 한국 젊은 남자들의 거울이고, 해미는 그가 남성으로서 품은 선망과 열패감을 직시하도록 벤 앞에 데려다주는 장치다. 그런데 나는 해미에 대해 더 알고 싶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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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마르크스>는 이를테면, 산업화의 모순으로 고통받던 19세기 유럽 노동자들에게 새로운 역사의 비전을 제시한 ‘저스티스 리그’의 히어로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오리진 스토리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관계가 영화의 등뼈를 이루는 가운데, 라울 펙 감독과 파스칼 보니체 작가는 두 사상가의 동지적 배우자였던 예니 폰 베스트팔렌과 메리 번스를 조명하고자 현대적 노력을 기울인다. 프러시아 귀족 집안을 박차고 마르크스의 반려가 되길 선택한 예니 역은 <팬텀 스레드>에서도 비슷한 조건의 여성 캐릭터로 분했던 룩셈부르크 출신 비키 크리엡스가 연기했다. 프랑스어와 독일어로 크리엡스가 연기하는 예니는, <팬텀 스레드>의 알마가 그랬듯 결코 희생자 자리에 서지 않으며 지칠 줄 모른다. 판이한 계급적 배경을 가진 메리와 예니가 결혼생활과 투쟁을 대하는 태도를 비교할 수 있는 장면도 흥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