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rry Christmas Mr. Lawrence>와 <Rain>으로 잘 알려진 피아노 연주자, 아카데미 음악상을 수상한 영화 <마지막 황제>(1987)의 음악감독…. 일본의 거장 뮤지션 류이치 사카모토에겐 늘 이러한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눈 밝은 독자라면 지난해 개봉한 한국영화 <남한산성>(2017)의 음악감독 크레딧, 올해의 화제작 <콜 미 바이 유어 네임>(2017)의 사운드트랙 목록에서 그의 이름을 발견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류이치 사카모토는 이처럼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모습 이외에도 다채로운 면모를 지닌 예술가다. 그는 백남준, 알바 노토 등 진보적인 아티스트와의 협업을 통해 고정관념을 타파하는 작업을 이어왔으며 20세기를 개괄하는 파격적인 오페라 <라이프>(1999)를 연출했다. 최근에는 다양한 아티스트와의 협업을 통해 음악과 설치 미술, 영상이 한데 어우러진 공감각적 전시를 일본을 중심으로 개최해오고 있다. 그런 그가 한국을 찾았다. 5월 26일부터 10월 14일까지 회현역 근방에 위치한 문화공간 ‘피크닉’에서 열리는 특별전 <류이치 사카모토: 라이프, 라이프>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이번 특별전은 류이치 사카모토의 삶과 예술을 총망라하는 최초의 전시라는 점에서 개인적으로도 무척 중요한 의미로 다가온다고 그는 말했다. 전시 준비가 한창인 ‘피크닉’에서 류이치 사카모토를 만났다. 대화가 이어질수록, 그에게 음악과 영화는 별개의 예술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까 사진 촬영하는 모습을 봤다. 촬영 도중 피아노 연주를 하듯 손가락을 끊임없이 움직이더라. 어떤 소리를 떠올렸는지 물어봐도 되나.
=요즘 피아노 연습을 별로 안 해서 손가락 운동을 좀 했다. (웃음) 딱 어떤 소리라고 꼬집어 말하긴 뭐하지만, 내 안에서는 늘 시끄럽다고 생각할 정도로 어떤 소리가 울리고 있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손을 움직인 것 같다.
-새로운 소리를 수집하는 것이 취미라고 들었다. 이곳, 서울에서 인상깊게 들은 소리가 있나.
=당신의 말대로 서울이든 도쿄든 뉴욕이든, 어떤 장소에는 나름의 소리가 있다. 내가 처음 서울을 방문한 건 1980년 즈음이었다. 그때와 지금의 서울을 비교해보면 많은 변화가 있는데, 도시의 인상이 바뀌어가듯 서울의 소리도 점차 변모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1980년대의 서울로부터 내가 받은 첫인상은 ‘소음’이 크다는 거였다. 지금의 서울은 그때에 비해 훨씬 더 세련된 소리들을 지닌 도시가 됐다. 그렇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서울의 소리가 다른 도시의 그것과 점점 비슷해져간다는 아쉬움은 있다.
-<류이치 사카모토: 라이프, 라이프>는 지난 2017년 당신이 발매한 신보 《ASYNC》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전시다. 《ASYNC》의 수록곡과 설치 미술, 영상이 한데 어우러진 이번 전시는 ‘설치 음악’으로서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설치 음악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기존 음악과는 다른, 설치 음악만의 특성은 시공간적 제약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거다. 클래식 음악이든 연주든 음반이든, 모든 음악에는 시작과 끝이 있다. 설치 음악은 그런 제약에서 자유롭다. 아티스트는 설치 음악을 통해 어떤 공간에서 하루 종일 음악이 흐르게 할 수도 있고 영상을 통해 음악 속으로 직접 들어갈 수도 있다. 일례로 이번에 전시하는 작품 중 <LIFE-FLUID, INVISIBLE, INAUDIBLE…>(2007, 류이치 사카모토가 1999년에 발표한 창작 오페라 <LIFE>를 해체하고 재구성하여 만든 설치 작품이다.-편집자)은 10년에 걸쳐 다섯번 정도 전시를 열었는데, 공간에 따라 조금씩 내용을 바꾸었고 소리도 많이 수정했다. 이처럼 기존에 이미 존재했던 음악을 상황에 맞게 바꿔가는 과정에 즐거움을 느낀다.
-당신처럼 시공간과 매체의 제약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예술 작업을 하는 시네아스트가 있다. 타이 감독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이다. 이번 전시에는 《ASYNC》의 수록곡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작업한 위라세타쿤의 영상 <ASYNC-FIRST LIGHT>(2017)가 소개된다. 그와는 어떻게 협업하게 되었나.
=5년 전 아피찻퐁 감독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평소 그의 영화와 설치 작업을 좋아해왔기에 언젠가 영상을 만들어야 할 일이 있다면 꼭 그에게 부탁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차였다. 《ASYNC》를 발매하기 전, 그에게 먼저 앨범을 보내 이런 말을 전했다. “이 음악을 한번 들어보시고, 영상을 만들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면 10년 뒤든 다음달이든 관계 없으니 언제든 만들어주세요”라고. 그로부터 2~3달이 지난 뒤 고맙게도 아피찻퐁 감독이 내 음악을 토대로 영상을 만들어 보내왔다. 《ASYNC》의 수록곡 중 <Disintegration>과 <Life, life>를 조합해 새로운 곡을 만들어왔더라. 1분 정도 음악이 모자라니 좀더 늘려달라는 부탁과 함께. 생각지도 못했던 방식으로 협업을 하게 되어 굉장히 재미있었고, <ASYNC-FIRST LIGHT>가 그간 아피찻퐁 감독이 만들어온 설치 미술과 영화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작품이라는 점도 흥미로웠다.
-《ASYNC》를 작업하는 데 영감을 받은 아티스트로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를 언급했다. 《ASYNC》를 ‘가상의 타르코프스키 영화 사운드트랙’이라는 컨셉의 앨범으로 만들고 싶었다고.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를 오랫동안 좋아해왔다. 그는 살아생전 단 7편의 영화를 만들었는데, 내 머릿속에는 어떤 특정 영화의 특정 장면이 아니라, 그 7편의 영화로부터 받은 인상이 뒤섞인 가공의 타르코프스키 영화가 담겨 있는 것 같다. 《ASYNC》를 작업하는 데 이 가공의 영화가 영감을 주었다는 의미로 생각하면 된다.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를 생각하며 숲속을 걷는 나의 발자국 소리, 6월 뒤뜰의 빗소리, 샤미센(일본 현악기)을 스치는 소리, 뮤지션 데이비드 실비언이 아르세니 타르코프스키(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아버지이자 러시아의 유명 시인이다.-편집자)의 시를 낭송하는 소리 등을 넣은 곡을 만들었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가 사운드를 설계하는 방식을 좋아한다.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에서는 음악도 음악이지만 발소리, 물소리, 빗소리 등의 음향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더불어 그의 영화는 음악적이다. 영상으로 작곡을 한다고 할까. 그의 일기를 수록한 <타르코프스키의 순교일기>(두레 펴냄)를 보면 ‘시간 속에서 조각을 한다’는 말이 있는데, 나는 그의 영화를 볼 때마다 타르코프스키가 정말로 그렇게 하고 있다고 느낀다. 짜여진 영상 안에서 그가 시간을 조각하는 방식은 마치 작곡과도 같아서, 나는 그로부터 많은 음악적 영감을 받는다. 시간을 조각한다는 건 영화뿐만 아니라 음악을 만들 때에도 굉장히 중요한 작업이니까.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마지막 사랑>(1990) 또한 《ASYNC》에 음악적 영감을 제공했다고 말했다. 베르톨루치는 <마지막 황제>(1987)부터 <마지막 사랑>, <리틀 부다>(1993)까지 당신과 가장 자주 협업한 영화감독이다. 그와의 인연이 궁금하다.
=베르톨루치 같은 유럽의 지식인들을 만날 때마다 부러운 마음이 든다. 이탈리아의 건축, 프랑스의 예술, 독일의 문화 등 유럽의 예술적 유산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베르톨루치는 재미있고 변화무쌍하며 특별한 사람이다. 최근에도 어떤 계기로 그의 영화를 몰아서 봤는데, 베르톨루치의 영화를 볼 때마다 어떤 한 장면을 보더라도 굉장히 강렬한 아우라를 지니고 있다는 걸 느낀다. 그와 처음 작업을 했던 순간이 생각난다. <마지막 황제>를 만들 당시, 기존에 음악 작업을 하던 대로 디지털로 만든 음악을 베르톨루치 감독에게 들려줬다. 그랬더니 그가 이렇게 말하더라. 왜 연주자의 의자가 삐걱거리는 소리나 옷이 닿는 소리는 들어가지 않았냐고. 그런 연유로 <마지막 황제>의 음악은 직접 연주해 녹음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베르톨루치 감독은 하나의 결과물로 완성된 음악을 원했다기보다 퍼포먼스로서의 음악을 원했던 것 같다.
-그런 협업 과정의 경험이 《ASYNC》에도 반영된 듯하다. <Fullmoon>이라는 수록곡에서 당신은 베르톨루치의 <마지막 사랑>을 퍼포먼스적으로 해석한다. 동명 원작을 집필한 소설가 폴 볼스의 낭독을 10개의 언어로 번역하고, 이것을 지인과 아티스트들의 낭독 사운드와 콜라주 했다.
=당신의 말처럼 요즘의 나는 평면적인 음악보다 움직이는 음악에 더 관심이 간다. 말하자면 ‘신체성’을 가진 음악을 만들고자 한다. 이건 영화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결과라고도 할 수 있겠다. 예를 들어 음악을 만드는 사람들은 대개 시간과 소리의 높낮이를 염두에 두며 곡 작업을 한다. 이런 방식으로 작업을 한다면 자꾸 평면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생기기 마련이다. 반면 영상을 만드는 사람들은 시간과 소리뿐만 아니라 움직임과 신체성이라는 또 다른 차원을 포함해 작업을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최근의 나는 영상을 만드는 사람들의 방식으로 음악을 만들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ASYNC》의 제작 노트를 읽었다. ‘이 앨범은 어디에서 마침표를 찍어야 할지 정확하게 계산해 붓을 내려놓은 것’이라는 설명이 인상적이었다. 내려놓아야 할 때를 안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이것은 지난 2014년 인후암 투병 뒤의 깨달음일까.
=병을 얻고 그것을 치료하는 과정은 내 인생에서 굉장히 중요한 경험이었다. 《ASYNC》는 8년 만에 낸 앨범인데, 스스로도 다음 앨범을 언제 낼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하겠더라. 10년이 걸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ASYNC》는 내가 작업하는 마지막 앨범일 수도 있다는 마음으로 만들었다. 남은 날이 하루밖에 없을 때 내가 듣고 싶은 음/음악만을 넣었다.
다큐멘터리 <류이치 사카모토: 코다>
올봄, 류이치 사카모토의 삶과 예술에 대한 일화는 갤러리뿐만 아니라 극장에서도 만날 수 있을 예정이다. 그를 주연으로 한 다큐멘터리 <류이치 사카모토: 코다>가 6월 14일 국내 개봉을 앞두고 있다.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2003)의 일본 담당 프로듀서이자 <호타루>(감독 가와세 나오미, 2000)의 프로듀서였던 스티븐 노무라 시블 감독이 연출을 맡은 이 영화는 지난 5년간 류이치 사카모토를 밀착 취재한 결과물이다. 뮤지션이자 영화음악 감독으로, 사회운동가로 누구보다 열정적인 삶을 살아온 사카모토는 지난 2014년 갑작스럽게 인후암 판정을 받는다. 하지만 그는 1년 만에 복귀해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2015)의 영화음악을 작업하고 8년만의 신보 《ASYNC》를 준비한다. “일상을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어 하는 타입의 인간이 절대 아니”라고 말하는 류이치 사카모토는 “3·11 동일본 대지진 이후 40년 만의 반핵 시위 등 격변하는 일본 사회 속에 놓인” 자신을 조명함으로써 일본 사회의 변화를 담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출연을 결정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촬영을 준비하던 도중 암 진단을 받게 되면서, 이 작품은 일본 사회의 초상보다 자신이 쌓아올린 모든 것들을 뒤로하고 새로운 마음으로 곡 작업을 하는 거장 뮤지션의 내면을 조명하는 쪽으로 방향성을 잡게 되었다. 하지만 류이치 사카모토는 앞으로도 활동가로서의 정체성을 꾸준히 유지할 예정이다. 대지진 피해 지역 청소년들과 함께하는 ‘도호쿠 유스 오케스트라’ 활동과 후쿠시마 원전을 반대하는 ‘노 누크’ (No Nukes) 운동, 아베 정권의 전쟁법안(안보법제)을 반대하는 시위에 적극적으로 임했던 것처럼. “우리 모두는 우리가 생각하는 정의가 늘 옳은 것은 아니라는 점을 반드시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한다. 내가 생각하는 옳음을 위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는 건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태도”라고 그는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