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마, 딸처럼 생각해주기 때문이겠지. 대견하다고 생각하는 마음에 그런 행동을 한 거겠지.”
2월 28일 <씨네21>에서 영화계 미투(#MeToo) 제보를 받고 있는 계정(metoo@cine21.com)으로 메일이 한통 날아왔다. 영화 제작자에게 수차례 성희롱을 당한 A씨는 처음에는 애써 이렇게 받아들이려고 했다고 전했다. 당시 막 사회생활을 시작했던 A씨에게 1958년생인 그는 거의 아빠뻘이었기 때문이다.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은 1985년 장선우, 선우완 감독의 <서울예수> 연출부로 데뷔한 이래 (주)영화세상의 대표이사·(주)다세포클럽/주식회사두타연의 프로듀서 등으로 30년 넘게 일해온 안동규 제작자다. 지금은 대진대학교 연극영화과 교수로서 학생을 가르치고 있다. 그는 A씨보다 많은 나이만큼 많은 경력을 쌓은 영화계 대선배이고, 좋은 멘토가 될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의 경력은 A씨가 자신의 성희롱 피해 경험을 쉽게 털어놓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됐다.
‘중요 정보는 인맥, 술자리를 통해 전달’된다는 게 문제
지난 3월 초 A씨를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A씨는 모 영화 스탭이었고, 안씨는 제작자로서 종종 그 영화의 현장을 찾았다. 당시 촬영장에서 A씨는 안씨가 그저 인자한 교수님 같은 분이라고 생각했다. 문제는 영화 촬영이 끝난 후에 벌어졌다. 안씨는 잠시 다른 일을 하고 있던 A씨에게 밤중에 사적인 만남을 제안하기 시작했다. 영화계 고위 인사가 모인 술자리에 A씨를 불러내거나, 따로 밥을 사주겠다고 연락을 하기 시작했다.
첫 사건은 서울의 한 식당에서 만나 밥을 먹던 날 벌어졌다. 이곳은 안씨가 오랫동안 다니던 유명한 식당이었다. 이날 안씨는 A씨가 자신의 차에 타자마자 손을 잡았다. A씨는 놀랐지만 안씨가 아버지 또래였기 때문에 ‘설마 날 여자로 보는 건 아니겠지. 딸처럼 생각한다는 뜻이겠지’라고 억지로 상황을 좋게 이해하려고 했다. 이후 안씨의 스킨십과 말은 보다 노골적으로 바뀌었다. 안씨는 거의 자정 가까이에야 일이 끝나는 A씨에게 연락을 해서 “집까지 데려다주겠다. 그게 더 집까지 빨리 가는 방법이 아니겠느냐”고 제안했고, A씨는 만남을 회피하고 싶었지만 마땅한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던 까닭에 그의 차를 얻어 탔다. 밀폐된 차 안에서 성희롱은 크게 두 차례 이루어졌다. 남자인 지인과 잠시 통화를 했던 A씨에게 안씨는 “남자친구냐”고 물었고, A씨는 “남자친구”라고 거짓말을 했다. 안씨는 애인과의 ‘진도’에 대해 묻더니, 등근육이 뭉친 것 같다며 A씨의 등쪽 옷 속으로 손을 넣어 주무르기 시작했다. A씨는 그 상황이 너무 당황스러웠지만 당장 항의하면 상대가 어떤 행동을 취할지 예상되지 않아 두려웠다고 전했다. 최대한 그 상황을 자연스럽게 넘기기 위해 웃으면서 그의 손을 뺐고, 가족이 늦게 귀가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집에 들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차에서 빠져나와 집에 돌아온 A씨는 무서운 마음에 손과 다리가 덜덜 떨렸다고 전했다. 그리고 안씨의 번호를 차단했다.
처음에 A씨는 안씨와의 만남을 멘토와의 그것으로 받아들였다. 영화계 선배를 알고 지내면 커리어와 관련한 조언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그를 믿었고, 실제로 현장에서도 인자한 교수님 같은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실제로 안씨가 처음에는 식사를 할 때 영화계 선배로서 많은 조언을 해줬다. 한국영화성평등센터 든든이 발표한 영화계 성평등 환경 조성을 위한 성폭력·성희롱 실태조사에 따르면, 특히 여성 영화인들은 직무 및 영화계 현장에 대해 “중요 정보는 인맥, 술자리를 통해 전달”된다는 것에 72.6%(남성 영화인들의 경우 44.6%)가 동의했다. 여성 영화인들일수록 술자리 인맥을 통한 정보 전달에 뒤처질 수 있다는 불안감을 갖기 쉽고, 일을 더 잘하기 위해 선배와의 좋은 관계가 필요하다는 생각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
송란희 한국여성의전화 사무처장은 “여성 영화인들이 그렇게 이야기했다면 사실일 것이다. 인맥과 술자리가 너무 중요하고, 비공식적 테이블에서 결정되는 것들이 있다. 소외되지 않기 위해, 묻히지 않기 위해 그런 만남에 참여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제작사 대표와 스탭이 일을 이유로 따로 만날 필요는 없다는 것이 요즘 분위기다. 영화 제작사 대표 B씨는 “제작사 대표와 이제 막 경력을 시작한 스탭이 일에 대한 조언을 이유로 따로 만나야 할 일은 정말 드물다. 예전에는 도제 시스템이 영화계에 존재했지만 요즘에는 그때그때 필요한 스탭을 고용한다. 조언을 해주겠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아주 뚜렷한 다른 목표를 갖고 타기팅을 한 것 같다”고 말했다. 게다가 공개 채용이 아닌, 인맥이 고용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는 영화계에서 제작자 안동규의 힘은 결코 무시 못한다. 안씨는 영화 일을 하고 싶다고 밝힌 A씨에게 직접 쓴 시나리오를 보여 달라거나, 연출부 일을 하고 싶으면 연락하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송란희 사무처장은 “권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통화를 하는 등 여자 앞에서 스스로를 과시하는 행위도 가해자의 프로세스에 포함된다. 자신의 말을 거절하지 못하게 하거나 자신을 더 신뢰하게 만들려는 의도”라고 설명했다.
A씨가 피해 사실을 즉시 알리지 못한 것은 영화 일을 계속 하고 싶다는 소망 때문이었다. 이런 문제를 가족에게 알리면 가족이 영화 일을 하지 못하게 할 것 같았고, 동료들에게 말하기에는 “어느 곳도 자신을 보호해줄 수 없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고 한다. 든든의 성폭력·성희롱 실태조사에 따르면 성범죄 피해 경험이 있는 여성 영화인의 31.%가 사건을 알리지 못하는 이유로 “업계 내 소문, 평판에 대한 두려움”을 꼽았다. 일에 있어 중요한 정보는 인맥을 통해 전달되고, 성폭력·성희롱 범죄 사실을 주변에 털어놓으면 자칫 경력에 불이익이 생길 수 있다. 이에 대해 B씨는 “영화계의 권력관계 안에서 벌어질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인 사건이다. 경력 초기의 영화 종사자들에게 위계질서 안에서 가해질 수 있는 폭력”이라고 말했다. 한편 A씨에게는 “피해 사실을 털어놓았을 때 따라간 네가 잘못 아니냐”는 반응이 돌아오면 도리어 상처를 받을 것 같다는 걱정도 있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왜 손을 잡을 때 이상함을 바로 감지하지 못했는지, 자신이 너무 눈치가 없었던 게 아닐까 하는 죄책감이 있었다”고 A씨는 전했다. 한국성폭력상담소의 김신아 활동가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같은 업계 종사자로서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에게 성희롱을 당할 때 이의를 제기하기가 정말 어렵다. 하지만 심각하게 저항하지 않았다고 성폭력이 아닌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안동규, 이미 한국영화제작가협회에서 성희롱 건으로 제명
기자가 확인한 결과 그는 안동규 제작자가 참여한 모 영화 현장 스탭이 맞았다. 기자는 안동규씨를 만나 제보 내용을 확인하고 충분한 반론권을 주고자 했으나 그는 기자의 연락에 반응이 없었다. 3월 16일 취재차 연락을 드린다는 문자를 그에게 남기자 “회의가 아직 안 끝나서 연락이 늦어질 것 같다. 혹시 무슨 내용의 취재인지 알 수 있을까”라는 내용의 답장이 돌아왔다. “미투 관련 제보”가 있었으니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다고 다시 문자를 남기자 그는 “제보 내용을 먼저 알고 만났으면 좋겠다”며 메일을 달라고 답했다. 하지만 원래 미투 제보의 구체적인 내용을 메일로 2차 전달하는 일은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라면 지양해야 한다. 취재원의 신원 보호가 어려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같은 입장을 전하며 직접 만나고 싶다고 다시 연락을 취했으나 이후 한번도 답을 받을 수 없었다.
한편 안동규 제작자가 2000년대 중반쯤 한국영화제작가협회(이하 제협)에서 성희롱 건으로 제명당한 적이 있다는 또 다른 제보가 있었다. 당시의 사건을 기억하고 있는 몇몇 영화인을 만났고, 자신이 아는 한 사실이라는 답을 받았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영화계에서 수면 위로 올라와 공론화되지 않았다. 때문에 이미 성범죄로 문제가 된 적이 있던 사람이 영화계에서 계속 일을 할 수 있었고, 또 다른 피해자가 나온 것이다. 마지막으로 A씨가 어렵게 자신의 일을 고백한 이유는 영화계 내 성희롱 문제가 실질적인 징계로, 또한 업계의 근본적인 변화로 이어져야 할 필요성을 보여준다. “사실 나 한 사람의 이야기만으로는 힘이 발휘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제보를 하게 된 것은, 다른 피해 사례도 추가적으로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문제의 원인이 이 사람에게만 맞춰지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근본적으로 시스템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계속 가해자가 나오는 거 아닌가. 두려움 없이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던 이유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
최근 각계의 미투 운동이 한국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킨 후, 정부는 문화예술계 성희롱·성추행 문제에 다양한 방책을 내놓았다. 여성가족부는 권력형 성폭력 가해자의 법정형을 최고 10년으로 상향하고, 피해자에 대한 민·형사상 무료법률 지원을 강화하는 등의 내용이 포함된 대책을 발표했다. 고용노동부에서는 3월 8일부터 직장 내 성희롱 익명 신고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다. 한편 진선미 더불어민주당 의원(서울 강동구갑·행정안전위원회)은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영화계 내 격년에 한번 정도 형식적으로 진행되었던 성범죄와 관련된 기초 조사의 결과가 2014년 1건, 2016년 1건만 보고되었던 통계를 지적하며, 근본적으로 영화계의 폐쇄적 시스템이 개혁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이번 미투 운동이 이전과 다른 것은 사회적 대화가 이루어지며 새로운 관계 맺기 방식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고 있는 것이라면서 법적, 제도적 해결과 더불어 우리 사회가 새로운 방식을 배워가야 한다고 말했다.
22일 오후 5시경 기사가 보도된 이후 23일 오전 10시쯤 한동안 답이 없던 안동규 제작자로부터 기자에게 메일이 왔다. 그는 "할 말이 없다"며 "제보자에게 진심으로 사과한다. 반성의 시간을 갖겠다"는 요지의 글과 함께 "현재 재직 중인 학교에서 사직하겠다"는 뜻을 측에 전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