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두명의 주목할 만한 신인배우에 대해 말하려 한다. <박열>의 최희서는 그야말로 ‘올해의 배우’다. 대종상영화제 여우주연상·신인여자배우상 수상, 부일영화상 신인여자연기상,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신인여우상 등 연말 시상식의 주연으로 자리매김했다. 대종상영화제에서 최희서는 “90년 전 23살 나이로 세상을 떠난 가네코 후미코로부터 많은 것을 얻었고, 나이 서른에 이제야 어른이 된 것 같다”고 수상 소감을 전했다. 마침 지난 10월 부산국제영화제에서는 <죄 많은 소녀>로 전여빈이 올해의 배우상을 수상했다. “여배우상만 둘을 선정해야 하는 게 아닐까”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돌 정도로 올해 부산에서는 여자배우들의 캐릭터가 유독 강렬했고, 그만큼 좋은 연기를 보여주었다. 각축전 끝의 수상이라, 전여빈의 수상도 전에 없이 의미가 큰 해였다. <킹콩을 들다>(2009)로 데뷔해 <동주> <박열>로 기막힌 리듬감으로 인물을 창조한 배우 최희서. 그리고 그간 독립 장·단편을 오가는 꾸준한 활동에 이어 <여배우는 오늘도>에서 당돌한 신인배우 이서영 캐릭터로 각광받았으며,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뉴커런츠상을 수상한 <죄 많은 소녀>의 영희로 극한의 연기를 보여준 전여빈. 다소 늦게 연기를 시작했고 각각의 핸디캡으로 힘든 시간도 보냈지만, 연기를 향한 열정과 노력이 컸다는 점, 그리고 지금 충무로가 가장 주목하는 신예배우라는 점에서 두 배우는 공통분모가 많았다. 함께 만날 자리를 모색한다면, 앞으로 더 좋은 협업을 기대할 수 있을 거라 생각됐다.
따로 있을 때는 미처 몰랐으나 한자리에서 한 프레임에 담는 순간, 두 배우에게서 강렬한 스토리가 느껴졌다. 최희서에게 프리다 칼로의 작품 속 여성이 지닌 강인한 생명력이 느껴진다면, 전여빈에게는 신윤복 풍속화의 여성이 가진 고운 선이 연상되었다. 지극히 상반된 비주얼과 그 외형이 담을 수 있는 전혀 다른 캐릭터로 한국영화의 외연을 넓히고, 또 다른 인물을 창조해내고 있는 두 신예배우에게서 그간의 고민과 앞으로의 다짐을 들어보았다.
-먼저 지면을 통해 수상 소감을 이야기해보자. ‘너무 길다, 그만해라’라는 무대 뒤 음성이 들렸던 대종상시상식과 달리, 여기서는 아무런 제한 없이 마음껏 이야기할 수 있다. (웃음)
=최희서_ 내 취미가 배우들 수상 소감, 인터뷰 같은 것들을 유튜브로 찾아보는 거다. 칸국제영화제 인터뷰 이런 영상들을 보면 일을 하면서 힘들 때 많은 위로를 받는다. 그런데 너무 영향을 많이 받았나보다. (웃음) 중간에 제작진이 ‘길다’고 그렇게 말하는데도 내 할 말을 다 했으니. 근데 언제 또 이런 자리에 설지 몰라 말이 길어진다고 한 게 내 정확한 심정이었다. 지금까지 ‘브런치’에 글을 쓴 것 외에는, 영화를 제외하면 내가 직접 내 말을 전할 기회가 없었다. 사람 최희서, 내가 되고 싶은 연기자, 이런 이야기는 말할 기회가 없겠더라. 사실 신인상은 기대도 했고 해서 노트에 좀 적어갔다. (웃음) 그런데 여우주연상은 정말 아직도 얼떨떨하고 어떻게 단상에 올라갔는지도 모르겠다. 이병헌 선배님이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활짝 웃으시면서, ’축하합니다’ 하시는데 정말 TV를 보는 기분이었다.
=전여빈_ 상을 받고 레드카펫을 밟는 게 나한테는 너무 먼 일이었다. 연기를 너무 하고 싶고 배우가 되고 싶었던 시기에 <죄 많은 소녀>를 만났다. 캐스팅 때 주변의 우려가 많았는데 감독님이 일일이 설득하시고 믿어달라고 해주신 덕분에 이 자리까지 왔다. 시사를 하고 ‘세다’, ‘씹어먹는 영화가 나왔다’ 이런 평가들이 나오더라. (웃음) 영희는 같은 반 친구의 죽음에 가해자로 몰리고 선생님, 그 아이의 부모 같은 어른뿐만 아니라 친구들에게도 자살을 부추긴 것으로 의심받아 고통을 당하는 소녀다. 궁지에 몰려 자신을 가해하는 극단적인 선택까지 하는 그녀를 최대한 가까이 이해하고 담고 싶었다. 그런데도 막상 영화를 보니 내가 잘했나 의심이 들더라. 영희로 살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한 것 같아서 눈물이 났다. 그런데도 영화제에서 ‘배우상은 누가 받을까’ 하고 관심사가 모아지니, 마지막엔 기대를 하게 되더라. 그때 처음으로 욕심이 생겼다. 수상 전날 아침에 김의석 감독님이 “여빈씨에게 축하해줄 일이 있을 것 같아요” 하셨다. 같이 함께해준 스탭들, 배우들에게도 나의 수상이 보람이 된 것 같아 더 기쁘다.
최희서_ <죄 많은 소녀>는 소문이 파다한 작품이었다. 마침 부산국제영화제 수상 때 역시 한국영화아카데미 장편제작과정 작품인 <아워 바디>(감독 한가람)를 한창 촬영할 때였는데 ‘<죄 많은 소녀>가 상 받았대!’ 하고 다들 들떴다. 한국영화아카데미 작품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수상한 게 오랜만이라 다들 경사라고 좋아하며 한편으로는 ‘우리도 잘해야지!’ 이런 분위기였다. 나는 집중이 흐트러질 것 같아서 귀로만 소식을 들었는데, 영화가 보고 싶고 여빈씨 연기도 보고 싶더라. <죄 많은 소녀>는 아직 개봉을 안 했으니 풀지 않은 선물 꾸러미 같다. 트로피가 이게 끝이 아닐 거라고 본다. <박열>이 올해 초 개봉을 하고, 이 작품 덕으로 많은 상을 받아 감사하는 한해를 보냈다. 여빈씨는 더 많은 관객이 인정하는 배우가 되었으면 좋겠다.
-수상 후 시간이 많이 지나지 않았지만 실질적으로 ‘수상 효과’라 할 만한 제안이나 반응을 경험했나.
전여빈_ 트로피를 책장 정가운데 고이 놓아두었다. (웃음) 기사가 나가니 축하 연락도 많이 받았다. 일단 미팅가면 다들 농담을 많이 해주신다. “올해의 배우가 등장하셨습니다!” 사실 올해 29살인데 엄마한테 항상 “서른까지만 엄마 괴롭히고, 정말 이 길이 아닌 것 같으면 다른 행복한 일을 찾아볼게요” 했었다. 내 선택으로 가족을 너무 괴롭히고 싶지 않았고, 안심시켜드리려고 한 말인데 늘 마음 한켠이 아프더라. 수상하고 나서 “네가 고생을 많이 했잖아” 하시면서 엄마가 오열을 하시더라. 카드 영업 일을 하시는데, 요즘은 밤늦게까지 일해도 힘들지 않다고 하셨다. 밥을 안 먹어도 행복감에 배가 불러 요즘은 살이 빠졌다고 하신다. 수상 효과라면 엄마의 다이어트를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웃음) 거실 칠판에 ‘내 인생에도 꿈만 같은 일이 일어났다!’고 적어두기까지 하셨다. 좋으면서도 더 부담도 크고 책임감도 생겼다.
최희서_ 촬영 때문에 수상 때 새벽 6시 촬영이 끝나면 메이크업을 받고 시상식 가고 그랬다. 이번주에 크랭크업하고 나니 실감이 되더라. 아, <박열>이 나를 떠나는구나. 수상은 좋은데, 나 역시 좀 두렵다. 아직 <박열>이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차기작인 <아워 바디>도 크랭크업을 했지만, 아직 후미코에 대한 애정이 크다. 그만큼 내겐 강렬한 캐릭터였고, 마음속에 어떤 사람이 자리잡고 있는 느낌이었다.
여성 캐릭터를 ‘여성’ 안에 가두지 않기
-작품으로도, 개인적으로도 인연이 없는 두 배우를 <씨네21>이 한자리에서 만나게 ‘강제’했다. 두분은 어떤 호기심과 질문이 있어서 이 자리에 선뜻 응하게 됐는지, 서로 상대배우에 대한 어떤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는지 궁금하다.
전여빈_ <동주>를 보면서 최희서라는 배우가 굉장히 신선하게 다가왔다. 새로운 배우가 나타났다는 느낌이 강하게 오더라. 처음에는 일본인을 섭외한 줄 알았다. 그 정도로 완벽하더라. (웃음) <박열>의 후미코를 보면서는 부러움도 컸다. 이 배우가 얼마나 설레는 마음으로 후미코를 붙들고 있었을까 하는 마음이 느껴지더라. 열정을 가지고, 그것을 가진 채로 오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배우라는 생각이 들어 기뻤고, 열심히 하다보면 나도 언젠가 함께 연기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이렇게 만날 기회가 되어서 너무 좋다.
최희서_ 전부터 나도 여빈씨를 주목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죄 많은 소녀>를 보면서 많이 놀랐다. 정말 ‘후벼파는’ 영화였다. 연기할 때 너무 힘들었겠다는 생각 한편으로, 배우가 이런 역할을 만나고 표현하는 게 자주 오는 기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 후미코가 애틋하듯이 여빈씨에게도 그런 마음이겠다 싶더라. <죄 많은 소녀>는 ‘여성 버전 <파수꾼>’이라고 평하는 이야기를 많이 듣고 봤는데, 그렇게만 말하기는 아깝더라. 나는 오히려 토마스 빈터베르그의 <더 헌트>(2012)가 많이 생각났는데, 한 인간이 가진 죄책감, 그 사이에서 흔들리는 존재를 그리고 있다. 영희로만 본다면 여성이라는 성별을 떠나 이 사회에서 살아가는 약자로서의 고충이 잘 표현되어 있더라. 가끔 우리가 ‘여성’이라는 캐릭터로 인물을 한정적으로 가둬버리는 게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어떻게 다가가야 이 경계를 허물고 인간 자체로 받아들이는 캐릭터를 만들 수 있을까, 그런 캐릭터를 연기할 수 있을까, 늘 고민한다.
-연결해서, 여성이자 배우로서 최근 영화에 구현된 여성 캐릭터에 대한 고민도 많아질 텐데. 상업영화가 남성 중심의 서사 전개와 캐스팅으로 비판을 받는 반면, 소수자의 삶을 다룬 독립영화에서 여성 캐릭터들의 목소리는 높아지고 변화하고 있다. 최근 받는 시나리오를 보면서 어떤 변화를 체감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전여빈_ 여성의 시선에 좀더 관심을 가지고, 여성의 고충을 반영한 영화, 여성이 주체적으로 역할을 하는 영화들이 부쩍 많아졌다. 그럼에도 가끔 트렌드에 영합해 여성 캐릭터를 앞세워 코스프레를 하는 것처럼 과장되게 표현하는 작품도 많았다. 감독님과 <죄 많은 소녀>를 이야기하면서도 영희를 ‘여성’에 가둬두지 말자, 사람으로 다가가자, 이런 이야기도 많이 했다. 영희를 여학생으로 표현하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아직 상업영화 대본을 접할 기회가 별로 없었지만, 최근에는 그래도 전형적인 시선에 갇혀 있지 않은 여성 캐릭터들도 대본에 속속 등장하기 시작하더라. 아직 3∼4년은 지켜보고 노력해야 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그런 캐릭터들을 앞으로 만날 기회가 더 많아지지 않을까 기대를 걸게 된다.
최희서_ <박열> 끝나고 시나리오가 5편 정도 들어왔는데, 두 작품이 여성이 주인공이자 스토리를 이끌어가는 작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상 따져보면 기존 시나리오 작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내용이더라. 여성 혼자 사건을 해결하고 중심을 끌고 나가지 못하고, 남자 캐릭터가 도움을 주는 구도다. 드라마는 영화와 달리 여성 캐릭터가 굉장히 능동적이고 쿨하고 대담해 보인다. 그런데 캐릭터 설정만큼 이야기가 따라오지 못한다. 막상 이야기가 전개되면 남성이 오히려 여성을 주도한다. ‘걸크러시’라는 트렌드에 멜로가 결합되는 순간, 사랑하는 남자가 혼자 헤쳐나가지 못하는 여성을 도와주는 구도가 형성되는 거다. 그런 면에서 나는 <아워 바디>의 자영이라는 캐릭터가 미칠 영향도 궁금하다. 자영은 대한민국 여성이라면 공감하기 굉장히 쉬운 캐릭터다. 공부를 해야 해서 하고, 좋은 곳에 취직하라는 엄마의 잔소리를 들었고, 안정적인 직장에 들어가야 한다는 사회의 기준에 맞춰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며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을 보낸 여성이다. 정작 본인이 정한게 하나도 없는, 한번도 본인의 삶에서 주체가 되지 못했던 여성이다. 이제부터 변하자 하는 마음으로 운동을 하게 되고 집착하게 되는, 그렇게 2017년을 사는 31살의 평범한 여성이다. <죄 많은 소녀>의 영희처럼 커다란 사건에 휘말린 여성들도 있을 테고 자영처럼 그렇게 평범한 문제의식을 가진 인물들도 있다. 다른 젊은 감독들도 앞으로 여성을 어떻게 그릴지 점점 기대가 된다.
<죄 많은 소녀>의 영희와 <박열>의 후미코
-두 배우 모두 한국영화사의 강렬한 여성 캐릭터를 만나 그 인물을 최대한 표현하려 노력했고, 또 떠나보내는 시기를 거치고 있다. 그 과정들을 돌아본다면.
전여빈_ <죄 많은 소녀>를 지난해 11월 시작해 보충촬영까지 4개월 정도 했는데, 영화를 볼 때마다 그때의 내 상황이 떠오르더라. 부산국제영화제 때는 영화 보며 내가 너무 울어서 옆의 관객이 좀 의아해했을 것 같다. 연기할 때 서러웠던 감정이 자꾸 되살아나더라. 영희의 상태로 아픈 게 아니라, 영희를 연기한 나도 숨이 막혔다. 친구의 죽음은 김의석 감독님이 직접 겪었던 이야기에서 시작됐는데, 중학생 때 나 역시 비슷한 경험을 했었다. 그 감정이 마구잡이로 들었고 어떤 날은 감당이 안 돼서 촬영하는 동안 악몽을 자주 꾸었다. 그 기억들을 계속 떠올리고 사용해도 될까 죄책감이 들면서도, 한편으로 쾌감도 들더라. 배우라는 직업을 택해서 그런 고통의 기억을 표현해낼 수 있다는 점에서, 내가 앞으로 감당해야 할 부분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최희서_ <박열>의 후미코는 언어적으로 과제가 컸다. 영화 속에서 어눌하게 구사해야 하는 한국어를 어떻게 해야 할까 걱정이 많았던 캐릭터다. 반면 <아워 바디>는 체력과의 싸움이었다. 운동은 하는 만큼 정확하다. 2시간 운동하면 그만큼, 닭가슴살만 먹으면 딱 그만큼 몸에 변화가 온다. 너무 솔직하고 단순한 과정이고 속일 수도, 도망갈 수도 없었다. 내가 원래 먹는 거, 술마시는 거 너무 좋아하는데, 그걸 다 하면 화면에 고스란히 나오니 어쩌겠나. 매일 아침 일어나면 한숨부터 쉬었다. ‘오늘도 못 먹어’, 몸을 단련하기 위한 정신력의 싸움이었다. 휴대폰 화면을 복근이 잘 발달된 여자 사진으로 올려놨다. 5분에 한번씩 휴대폰을 보니 세뇌가 되더라. (웃음)
-두 배우를 알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작품, 연출과의 만남이 있었다. 최희서 배우가 <동주> <박열>로 이어지는 이준익 감독과의 작업에서 발견한 배우로서의 즐거움, 그리고 전여빈 배우가 문소리 감독과 <여배우는 오늘도>로 만나 알게 된 배우로서의 어떤 깨달음이 두 배우의 연기 여정에 밑거름이 되어주었다고 본다. 각각의 작품에서 얻은 것, 그리고 이를 통한 결심이 있다면 어떤 것인가.
최희서_ 이준익 감독님은 항상 본인을 동료로 생각하라고 하신다. 큰 방향을 제시해주시긴 하지만 디테일한 건 배우를 신뢰하고 맡겨두는 스타일이다. 그런 믿음이 배우한테는 자신감이 된다. 박정민씨가 송몽규 역할을 맡아 눈에 띄게 캐릭터를 만들어주고 힘을 준 건 이준익 감독님이 뒤에서 받쳐주셨기 때문이라고 본다. 나 역시 그런 연출을 만났을 때 맑은 물을 만난 고기처럼 헤엄치는 기분이 들었다. 다들 그렇겠지만 나는 비난보다 잘한다, 다른 것도 보여줘, 라고 격려해주는 게 나를 더 끌어내게 하더라. 그런 면에서 정말 값진 경험을 한 것 같다.
전여빈_ 문소리 선배님과의 만남은 내 인생의 행운이었다. 동덕여대 방송연예과를 나왔는데, 사실 내 마스크는 다른 화려한 동기들에 비해 인정을 못 받았다. 매니지먼트사에 들어가서도 배우 같지 않다, 너무 평범하다는 말로 무시를 많이 받았다. 울기도 많이 울었는데 그럴수록 독립영화의 문을 더 많이 두드렸다. 나 스스로 시도할 수 있는 공간, 힘이 닿을 수 있는 공간이라 생각했고 그런 와중에 문소리 선배님에게 연락을 받았다. 단편 <최고의 감독>은 처음으로 내 목소리를 내비치게 해준 작품이다. 한번 리딩하고, “여빈씨 같이 합시다” 하셨는데, 내가 100% 잘해서는 아니었을 거다. 본인도 배우 생활을 하시면서 거절과 기다림의 시간이 어떤 건지 아셨기에 거절보다는 같이 가고 싶었다고 하시더라. 정말 꿈같은 기회였다.
최희서_ 문소리 선배님은 정말 배우들에게 우상이었다. <오아시스>(2002)를 중학생 때 몰래, 사실 보면 안 되는데 봤다. 그러다 최근 <더 테이블> 시사 때 처음 뵀는데, 너무 아는 척을 하고 싶어서 “저 중학생 때부터 팬입니다” 하고 인사를 했다. 그런데 너무 기쁜 나머지 소리를 지르다 그만 침이 튀었다. (웃음) “<박열>의 그 배우지” 하면서 고맙다고 하시기에, “네, 감사합니다!” 하고 돌아서는데 너무 부끄럽더라.
전여빈_ 선배님과 함께 개봉 때 많은 사람들을 만났는데, 어떤 상황에서도 현명하게 대처하는 걸 봤다. 대한민국에서 ‘여성’을 가진 배우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옆에서 많이 느꼈다. 그런 시간들이 큰 힘이 되는 것 같다.
최희서_ 사람들이 이번 대종상영화제 수상 소감 때 일어난 사고를 보면서, 내가 너무 서러울 것 같다고 위로를 많이 해주셨다. 이준익 감독님과 나는 그냥 블랙코미디 같다고 받아들였다. 면전에서 안 좋은 소리를 하도 많이 들어서 그 정도는 단련이 되어 있다. (웃음) 연기를 시작하고 비난을 많이 들었다. 공부를 더하지 연기를 왜 하려고 하냐. 그분들은 내 연기도 안 보고 프로필만 보고 그런 이야기를 했다. 그게 너무 싫어서 포털 프로필 난에서 학력을 빼고 이름도 바꾸고 그랬다. 외모 지적도 많았고, 25살 넘으니 나이 많다는 이야기도 나오는 등 별 이야기를 다 들었다. 그럴수록 ‘이 싸움에서 나는 이길 거야’ 하는 오기로 버텼던 것 같다. 이번에 수상을 하면서 SNS 피드백이 몇 백개가 왔는데, 그중 10%는 ‘넌 안될 거야’ 했던 사람들이 ‘잘될 줄 알았어’ 하는 내용이었다. 씁쓸한 생각이 더 크더라. 31살까지 버텨오면서 설움이 컸는데, 앞으로는 못난 투쟁심으로는 살지 말자 다짐했다.
전여빈_ 그 마음을 너무 잘 알겠다. 나는 ‘라이징 스타’로 언론에 소개된 적이 있는데, 그때도 ‘네가 뜨려면 벌써 떴지. 네 나이가 몇인데’ 하는 소리를 들었다. 인스타그램으로 뜨고 연기는 보여준 게 없다는 말도 들었다. 그런 사람들이 너무 밉기도 한데, 또 한편으로는 고마운 마음도 든다. 그런 말을 들으면서 더 열심히 하겠다고 다짐했다. 사람을 저평가하는 당신의 태도가 더 부끄러운 거라고 혼자 삭이곤 했다.
세상에 좋은 영향력을 퍼트리는 사람 혹은 배우
-최근 하비 웨인스타인 성추행 사건이 불거지면서, 할리우드에서 여성으로 감내해야 했던 시간들이 폭로되고, 배우들의 목소리도 높아졌다. 한국영화계도 결코 예외가 아닌 문제이고 같이 고민해야 할 지점인데, 여성배우들이 걸어온 길을 되돌아볼 때 현재의 변화는 어떤 것이고, 또 불합리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필요한 요소는 무엇이라고 보나.
최희서_ 페이스북을 하는데 하비 웨인스타인 사건이 폭로되면서 해외 친구들이 경험담을 공유하며, 해시태그로 ‘#MeToo’를 붙이더라. 내 친구만 10명이 넘었다. 물론 나도 그런 경험이 없지 않다. 술자리에서 남자 선배가 손잡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던 회식 문화를 비롯해 이게 문제다, 라고 생각할 만한 의식을 못하게 했던 지금까지의 문화가 문제였다. 이제 문제제기를 적극적으로 하고 있어 다행이고 좋은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현재는 씁쓸하지만 미래가 아주 어둡지는 않다. 나나 여빈씨처럼 시작하는 배우들이 어떻게 대처할지가 중요한 시점이다.
전여빈_ ‘OO계_내_성폭력’을 통해 이 문제를 제기한 게 올해 초였다. 주변에 글쓰는, 사진하는, 모델하는 친구들이 이 문제에 대해 심각성을 인지하고 많은 참여를 했다. 나 역시 5~6년 전 연극을 할 때 모 선배의 스토킹에 고통을 받은 적 있다. 신고를 해야 하나 고민하던 차에 다른 선배에게 도움을 청했고, 그 선배가 도와줘야 하는 순간 나를 외면했다. 예술, 사랑, 정의를 부르짖던 사람이 가진 이중성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한편으로 우리는 그런 문화에 대해 자신의 책임으로 가져가고, 스스로를 가해하는 입장이지 않았나 싶다. 다행히 이런 부분에 대해 피해자의 상황을 지지하고 연대하는 문화가 생기고 있어서 반가운 마음이 든다.
최희서_ 비슷한 경험이 있지만 나 역시 말을 못했다. 연극할 때는 매 신 같이 나오게 되는데, 그런 이야기를 하면 공연을 못 올릴 것 같았다. 나는 너무 작은 역할의 배우에 불과한데 그럼 내 책임이 되는 것 같아서 조용히 있었다.
전여빈_ 맞다. 내가 입을 여는 순간 내가 문제의 핵심이 된다는 생각이 여배우들에게 있다. 어디까지나 가해자의 문제임을 알릴 수 있는 문화가 되어야 하고, 그런 분위기에서 당당해질 수 있게 노력해나가고 싶다.
-아직 보여준 게 많지 않은 신인이다. 또 한국영화계에서 성비가 낮은 여배우이다. 취약점을 극복하고 배우로 표현하고 싶은 것들이 있다면.
최희서_ 나는 배우이기도 하고 여성이기도 하다. 그래서 어떤 작품을 선택할지, 연기적인 욕심 이상의 책임도 수반되는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책임감을 느끼기 시작한게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여성으로서 가지는 부당한 대우들을 내 안에서 소화하면서, 내 역할로 보여드리고 싶다. 연기뿐만 아니라, 기회가 된다면 글로도 이런 마음을 표현하고 싶다. 이준익 감독님에게 <박열> 끝내고 “다시 이런 캐릭터를 못 만나면 어떻게 하죠” 했더니, 그럼 직접 시나리오를 써보라고 하셨다. 아직 못 쓰긴 했는데, 구상은 정말 많이 하고 있다. 이번주에 감독님의 차기작인 <변산> 촬영장을 응원 방문했는데, 본인 작품에 나왔던 여배우들이 다 출연하는 영화도 찍고 싶다고 하셨다. 진짜 내가 시놉시스로 써가면 뭐라도 되지 않을까. 빈말 하시는 게 아니구나 싶더라.
전여빈_ 배우를 선택하고 연기를 하면서 요즘은 욕심이 더 커졌다. 선후배, 동료 배우들을 만나면서 우리가 세상에 좋은 영향력을 낼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구나, 그런 존재가 될 수 있구나 하고 많이 느꼈다. 그러면서 배우가 단순한 일이 아니구나 하는 책임감도 커졌다. 조금 더 좋은 환경을 만들어가는 사람이자 배우가 됐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