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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①] 영화 속 인공지능의 변화, 현실의 인공지능 발전상, 그리고 우리
송경원 2017-11-06

오래된 상상이 현실이 될 때

<블레이드 러너 2049>

“인간이 패배한 것이 아니라 내가 진 거다.” 딥마인드의 인공지능 알파고와의 경기에서 내리 5전3선승의 경기에서 3연패를 당한 이세돌 9단은 인터뷰 말미 심경을 묻자 이렇게 밝혔다. 그리고 다음 경기에서 이세돌은 알파고에 1승을 거둔 유일한 사람으로 기록된다(알파고는 이후 커제 9단에게 3판 전승 승리를 거둔 후 공식 은퇴했다). 당시 네티즌들은 이세돌 9단의 발언을 뒤집어 이렇게 평가했다. “인간이 이긴 게 아니다. 내가 이긴 거다.” 농담 같은 패러디지만 인공지능과 인간의 대결로 한껏 부풀려진 이벤트의 본질을 꿰뚫는 한줄인 것 같다.

기계의 등장 이래 사람들은 기계가 인간의 자리를 밀어낼 거라는 불안에 사로잡혔다. 인간이 직접 해야 할 일들을 기계가 하나씩 대체하는 순간마다 언젠가 기계가 인간의 자리를 차지할 거라는 공포에 빠진다. 재미있는 상상이다. 말이 인간보다 빨리 달린다고 해서 말이 인류를 지배할 거란 생각을 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기계는 두려워한다. 인간의 것을 빼앗고, 인간의 자리를 차지한다는 표현 자체가 재미있지 않나. 기계는 아직 그럴 의사조차 지니지 않았는데 사람들은 이미 기계를 의인화하고 있는 셈이다. 기계를 사람 닮은 인형의 연장에서 본다면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다.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는 믿음처럼 인간이 창조한 무언가가 우리의 자리를 위협할지 모른다는 건 신화시대부터 이어져온 거의 모든 이야기의 원형이자 욕망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기계가 하드웨어를 넘어 소프트웨어의 영역, 그러니까 인격 혹은 지능의 영역에 다다랐다는 신호를 목격하고 있다. 종래의 육체노동자의 일자리를 대체했던 것과는 상황이 약간 다르다.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혹은 그렇다고 믿고 싶은) 영역, 다시 말해 직관, 이성, 감정, 지능 등의 요소들을 사람의 손으로 창조할 수 있는 시대가 온 것이다. 1956년 인공지능이라는 용어가 탄생한 지 겨우 60년 만에 우리가 막연히 상상했던 미래가 하나씩 현실이 되는 순간을 목도한다. 최근 SF적인 상상력을 발휘한 영화가 각광을 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비주얼을 구현할 수 있는 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인간과 기계, 인공지능과 정체성에 대한 오래되고 새삼스러운 상상이 스크린 위에 끊임없이 되살아나는 중이다.

<블레이드 러너>

SF는 현재의 거울이다

인간이 상상하는 모든 것은 실재한다. 우리는 한번도 보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어떤 상상력이라고 해도 현실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현상들을 어떻게 조합하는지에 따라 미래를 그려볼 수 있다. 가령 한번도 본 적 없는 공룡을 영화 속에 재현할 수 있는 건(<쥬라기 공원>(1993)) 우리가 이미 화석을 통해 그 골격과 크기, 후손이라고 할 수 있는 파충류의 피부 질감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블레이드 러너>(1982)의 하늘을 나는 자동차 스피너는 이미 1940년 포드자동차의 헨리 포드에 의해 언젠가는 가능할 것이라 예견된 상상력이다. <스타트렉>(1979)의 원격통신기 역시 전화라는 개념을 우주 단위로 확장한 것에 불과하다. 요컨대 구체적인 실행 기술에 대한 프로그램이 구비되지 않았을 뿐 틀은 이미 완성된 디자인들이다.

공학도와 디자이너 사이에 재밌는 우화를 하나 예로 들어보자. 디자이너는 소비자를 매혹할 만한 휴대폰 디자인에 집중한 결과 아주 작고 매끈한 형태를 상상한다. 이음매 없이 외형은 마치 조약돌처럼 매끄러워 모든 이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하다. 함께 감탄하던 공학도가 디자이너에게 묻는다. 어떻게 여기 버튼 하나 없이 작동할 수 있냐고. 제품의 아름다움에 대해 열변을 토하던 디자이너가 의아한 얼굴로 답한다. “그건 이제부터 네가 생각해야지.” 공상과학의 상상력이란 대개 이와 비슷하다. 결과를 먼저 생각하고 기술은 소위 말하는 ‘그렇다 치고’의 영역으로 미뤄둔다. 그게 문제라는 게 아니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건 거의 모든 공상과학이 실은 ‘여기가 아닌 어딘가’를 무대로 지금 여기를 말하고자 하는 일종의 우화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미래라는 거울에 지금 현재의 욕망과 삶을 투사한다. 인공지능에 대한 상상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아직 오지 않은 미래, 인공지능이나 기술에 대해 던지는 질문은 대부분 지금 현재 인간의 본질에 대한 것이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요소는 무엇인가.’ ‘영혼은 존재하는가.’ ‘인간을 제외한 다른 존재를 차별하는 것이 합당한 일인가.’ ‘감정은 어떻게 발생하는가.’ ‘기억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발화된 기억은 어디에 머무는가.’ ‘나를 나답게 만들어주는 정체성의 조건은 무엇인가.’ 인류가 시작된 이래 한번도 멈춘 적 없고, 한번도 도달한 적 없는 질문들. 해답이 아니라 답을 찾아나가는 과정 자체로 우리를 고양시키는 가치들. SF라는 시공간을 빌린 상상은 이 질문을 좀더 폭넓고 자유롭게 하기 위한 최적의 무대인 셈이다.

하지만 예전에 상상했던 것들이 현실로 다가오는 사이 질문도 자연스레 변화한다. 인공지능이 몇몇 분야에서 인간의 인지 작용을 뛰어넘을지도 모르는 지금, 이미 여러 차례 해서 식상하다고 느꼈던 질문들도 새로운 형태로 얼굴 바꾼 채 되돌아오고 있는 중이다. 1982년 구현했던 상상을 새롭게 디자인한 <블레이드 러너 2049>(2017)가 좋은 예다. 혹자의 표현을 빌리면 <블레이드 러너 2049>는 클래식한 영화다. 주제는 예전부터 반복되었던 식상한 질문이며 소재도 숱한 영화에서 소재로 삼아왔던 오래된 상상력이다. 그럼에도 만약 당신에게 이 영화의 질문과 상상력이 전혀 오래된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다면 이유는 한 가지다. 미래가 가까워진 만큼 상황이 구체적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막연했던 상상의 간극이 구체적인 기술로 메워지는 사이 우리의 인식도 변화한다. 가령 한번도 프로그래머를 접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면 막연히 너드 같은 캐릭터를 상상하겠지만 일상에서 실제 프로그래머들의 행동, 말투, 사고를 자연스럽게 접한 우리는 이제 그들에게서 또 다른 디테일을 발견할 수 있다. 특정 상황만 부각시켜 ‘만약에’를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기술이 불러올 전반적인 생활의 변화를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는 것이다. 예컨대 자동번역기가 상용화된 세상이라면 단순히 자유롭게 소통하는 상황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번역 문체에 영향을 받고 일상어처럼 사용할지도 모른다. 인간이 기술을 발전시키는 사이 기술도 인간을 변화시킨다.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

같으면서도 전혀 새로운 질문들

다시 돌아와, 한번 상상되었던 미래는 이제 구체적인 형태를 띠고 전혀 다른 방식으로 우리 앞에 선다. 인간과 복제인간 사이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던졌던 <블레이드 러너>는 드니 빌뇌브의 비주얼적 상상력을 거쳐 복제인간과 인공지능 사이의 정체성으로 질문의 영역을 이동시켰다. 1982년 <블레이드 러너>의 무대가 되었던 2019년이 코앞에 다가온 지금, 인간의 조건을 묻고 인간다움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자 했던 상상력은 좀더 세부적이고 구체적인 문제로 분화되어 파고든다. 예를 들면 감각과 인지가 감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복제인간 K(라이언 고슬링)와 인공지능 조이(아나 데 아르마스)가 옥상에서 함께 비를 맞는 장면에서 두 존재의 교감을 목격한 사람이라면, 저들의 감정을 거짓이나 환영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복제인간 K와 메모리메이커의 대화를 통해 기억이 어떻게 창조되고 체험되며 재구성되는지 되짚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미래에 대한 상상이 아니라 지금 우리의 고민이기 때문에 더욱 사실적으로 다가온다.

여기 꼭 추천하고 싶은 영화가 한편 더 있다. 조던 해리슨의 연극(<마조리 프라임>(Marjorie Prime))을 영화화한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2017)이다. 이 영화는 인공지능의 형태를 빌려 발화된 기억이 머무는 자리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영화에서 인공지능의 작동방식이나 기술 등은 전혀 관심사가 아니다. 발화된 기억이 대화로 오가는 사이 자연스럽게 변화하는 것처럼 중요한 건 개발되는 기술에 맞춰 끊임없이 변화하고 이해를 넓혀가는 우리의 반응, 그 자체다. 그리하여 미래가 가까이 올수록 오래된 질문들은 다시 되돌아올 수밖에 없다. 다시 제기될 질문은 예전과 같으면서도 전혀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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