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껏 박해일은 곤룡포를 입은 적이 단 한번도 없다. 그럼에도 황동혁 감독은 “인조 역으로 박해일을 떠올리며 <남한산성>을 썼”고 “박해일 캐스팅에 가장 오래 매달려 삼고초려 끝에 그의 마음을 얻었다”고 털어놓았다. 잘 알려진 대로 인조는 서자 출신이고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까닭에 눈물 많고 우유부단하며 트라우마 때문에 항상 의심과 불안감에 시달렸던 임금이다. 박해일은 역사적으로는 소심하고 나약한 왕으로 기억되고 있는 인조를 어떤 인간으로 받아들였을까.
-황동혁 감독이 가장 오랫동안 매달렸고, 삼고초려 끝에 캐스팅했다던데.
=<컨트롤>(감독 한장혁)을 찍고 있을 때 출연 제안이 왔는데 물리적으로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아 두 차례 거절했다. 그럼에도 황동혁 감독이 “해일씨가 해줬으면 좋겠다”고 연락을 해와 다시 만났다. 이병헌, 김윤석 등 선배들이 먼저 출연을 결정한 상태에서 인조라는 인물을 할 수 있을까 하고 스스로 의심을 하다가 해볼 만한 것 같아 하기로 했다.
-왕 역을 맡은 건 이번이 처음 아닌가.
=권력자 역할을 한번도 안 해봤다. 남자배우가 데뷔하면 거쳐야 할 관문이라는 형사도 맡은 적 없었으니까.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인조의 어떤 점이 흥미로웠나.
=개인적으로 역사적 영웅 서사보다는 위태로웠던 시기에 더 관심이 많다. 인조는 정감을 불러일으키는 지점이 있어 어떤 인물인지 궁금했다. 배우로서 그의 실체를 보여주기 위해 여러 방법을 써봤는데 그중 하나가 인조의 발자취를 따라가보는 것이었다. 남한산성은 물론이고 롯데월드 옆에 위치한 삼전도(三田渡)비, 경기도 파주시에 있는 장릉(인조와 그의 비 인열왕후 한씨의 능)을 차례로 찾았다. 할머니의 묘에 간 것 같은 감정이 들었다.
-김훈 작가의 원작 소설은 어떻게 읽었나.
=시대배경과 공기를 파악하기 위해 읽었는데 ‘당시 어떻게 살았나’라고 거리를 둘 게 아니라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는 질문을 던지는 이야기로 다가왔다.
-인조가 서자 출신이고, 인조반정으로 즉위한 왕인 까닭에 트라우마가 굉장히 많았는데.
=트라우마 때문에 균형감 있는 정신상태를 유지하지 못하는 건 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청나라가 남한산성을 포위해 조선의 조정과 백성이 꼼짝없이 갇혀 지낸 47일에만 집중하는 이야기다. 인조는 매 순간 신하가 하는 말을 듣고 판단해 결정을 내려야 하는데 백성을 제대로 설득을 못 시키는 거다. 성 밖을 빨리 나가든 아니면 계속 버티든 신하들이 알아서 합의해 의견을 줘야 하는데 그게 안 되니 인조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고 시간만 흘러가는 거다. 영화를 보면서 그런 그들을 탓하는 관객이 분명 있을 텐데 그 관객이 바로 백성이다. 성 밖을 빨리 나가 청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게 나은지 아니면 지원군이 나타날 때까지 성 안에서 버티는 게 맞는지는 관객이 백성의 눈으로 영화를 보면서 판단하면 된다.
-신하들의 갑론을박을 지켜보는 인조의 입장은 매우 답답했을 것 같다.
=그래서 너무 답답해, 화가 나 이런 식으로 보여주는 건 지양하려고 했다. 인조의 대사 중에는 ‘경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나보고 어쩌라는 말인가’라는 말이 많다. 그걸 소극적으로 볼 수도 있지만 인조 입장에서는 그렇게 물어야 한다. 왕과 신하는 듣고 묻는 관계고, 그게 그 시대의 정치다. 대사가 가지고 있는 힘과 매력이 큰 이야기인 까닭에 대사만 잘 살려도 캐릭터들이 세련되게 보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우리 영화는 말이 가진 매력이 큰 이야기이자 말도 많이 등장한다. 청나라가 조선으로 쳐들어올 때 말이 매우 많이 등장한다. (웃음)
-최명길(이병헌), 김상헌(김윤석) 같은 당대의 혀들을 상대하는 게 굉장히 힘들었겠다. (웃음)
=혀라고 표현하니 좋다. 꼼짝없이 갇힌 비상시국이라 더 힘들었을 거고. 조상경 의상감독이 제작한 곤룡포를 입으니 손을 덮을만큼 길어서 정말 어떤 행동도 자유롭게 못하겠더라. 결국 인조가 할 수 있는 건 말과 감정뿐이었다.
-대사가 서사를 이끌어간다는 점에서 연극 같은 느낌도 들었겠다.
=연극배우 선생님들이 이병헌, 김윤석 선배 옆으로 쭉 서 있었다. 그들을 계속 바라보니 부담감이 없지 않았다. <살인의 추억> 때 송강호, 김상경, 김뢰하 선배들이 나를 방에 가둬놓고 ‘네가 죽였네, 안 죽였네’ 하는 상황과 비슷했다고나 할까. (웃음)
-차기작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