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병원을 운영하며 딸과 함께 살아가는 병수(설경구)에겐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 있다. 그는 한때 연쇄살인범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죽어 마땅하다고 믿으며, 법의 이름으로 심판하지 못하는 악인들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처단하던 병수는 17년 전의 자동차 사고를 계기로 살인을 멈췄다. 사고 후유증으로 알츠하이머병 판정을 받은 그에겐 “가까운 기억부터 신호등 움직이듯 깜빡깜빡하다가 어느덧 모든 기억이 사라질” 일만 남았다. 그러던 어느 날 병수는 마을에서 태주(김남길)의 차를 들이받는 접촉사고를 낸다. 본능적으로 그가 연쇄살인범임을 직감한 병수는 딸 은희(설현)를 지키기 위해 마지막 살인을 계획한다.
<살인자의 기억법>은 김영하 작가의 동명 장편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원작이 기억을 잃어가는 살인자의 의식 흐름에 주목했다면, 영화는 두 연쇄살인범 병수와 태주의 대결에 초점을 맞춘다. 단기기억상실증에 걸린 <메멘토>(2000)의 레너드(가이 피어스)처럼, 알츠하이머병 때문에 직전의 상황을 기억하지 못하는 병수의 모습은 보는 이를 자주 긴장하게 한다. 패기 넘치고 야심만만한 젊은 살인마에 맞서 병수가 직면해야 하는 건 딸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누구를 상대해야 할지도 잊어버릴지 모른다는 불안함뿐만이 아니라 ‘살인자’라는 ‘직업’에 대한 위기의식이다. 현실과 무의식의 세계를 오가며 기억과 더불어 사라져가는 정체성을 잃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어느 살인자의 초상을, 배우 설경구는 놀라운 설득력으로 구현해낸다. 서늘하고도 교활한 살인마 태주로 분한 김남길의 연기도 기대를 만족시킨다.
이 영화는 원신연 감독이 <용의자>(2013) 이후 4년 만에 내놓은 신작이다. <용의자>가 무술감독 출신인 원신연 감독의 장기를 극대화한 작품이었다면, <살인자의 기억법>은 스토리텔러로서 그의 가능성을 확인하게 하는 영화가 될 것이다. 살인을 만천하에 고백하는 병수의 말을 아무도 믿지 않고 폭소를 터뜨리는 장면이나 병수가 진짜 살인범인 태주를 신고했는데도 모두가 농담으로 받아들인다는 설정 등 부조리한 상황에서 비롯되는 블랙코미디적 유머는 감독의 전작 <구타유발자들>을 떠올리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