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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가위 <아비정전>과 임권택 <만다라>
박수민(영화감독) 2017-08-31

번뇌하는 이들을 위한 마지막 피서영화

<아비정전>

티베트에는 “걱정을 해서 걱정이 없어지면 걱정이 없겠네”라는 속담이 있다고 한다. 어느 고승(高僧)의 선문답인지는 모르지만 그렇다고 걱정을 안 하고 살 수가 있나. 날이 갈수록 번뇌만 가득 쌓이는 인생. 산다는 건 끝내 버티는 일인데, 버티다 보면 뭐라도 되거나 어딘가 가닿지 않으려나? 글쎄, 대체 언제? 아니면 할 수 없고, 라는 식으로 버텨보지만 특히 여름은 무더워서 버티기 짜증난다. 인생 자체를 어쩌다 받은 긴 휴가처럼 느끼는 사람은 피서를 못 떠난다. 하나도 이룬 일이 없으니 스스로 죄스러워 일상에서 도망가질 못한다. 내 경우 골방에 홀로 갇혀 한평생 치르는 벌을 여름 내내 또 받는다. 허튼 꿈을 꾼 죄, 한낱 기술을 몇푼 술값에 팔아치운 죄, 절대 사랑하면 안 될 인간들만 골라서 사랑한 죄. 모두 유죄! 꽝꽝꽝!!!

자, 진정하려면 결국 또 영화를 봐야 한다. 산에 올라가 스님이 되기엔 늦었고 욕망덩어리 세속의 인간이 한여름 번뇌를 다스리려면 다른 방법이 없다. 늦여름 국지성 호우로 스산한 밤, 마음에 난 커다란 구멍을 대충 메우고 사는 이가 보면 좋을 영화를 소개한다. 피서를 다녀왔든 그러지 못했든 각자 번뇌가 가득할 여러분께 권하는 이 여름 마지막 피서영화 두편.

영원히 사랑할 영화

왕가위의 <아비정전>(1990)은 비 내리는 여름밤에 꼭 봐야 할 영화다. 되도록 영화를 이렇게 보길 권한다. 하얀 러닝셔츠 아래 트렁크만 입고 선풍기 바람 아래 비스듬히 누워 습한 땀을 훔치면서, 지금 바깥의 빗소리와 영화 속의 빗소리가 일치하는 순간마다 자신의 지난 연애가 영화 장면에 겹쳐 떠오르도록 내버려두면서, 아비(장국영)라는 저 잘생긴 바람둥이의 ‘정전’(正傳)이 어떻게 미완성 상태로 완전히 완성되는지를 의식의 반쯤은 날려 꿈을 꾸듯이 보는 거다.

아비는 수리진(장만옥)을 그 유명한 ‘1분’ 만에 망쳐놓는다. “지나간 과거는 엄연한 사실”이라 선언하여, 순간을 영원으로 시간 속에 봉인해버린다. 그래놓고 그는 휙 가버리지만, 수리진에게 이건 사로잡힌 저주이고 영영 벗어날 수 없는 결계(結界)다. 사랑에 빠지는 건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누군가에 의해 내가 망하는 일이다. 잠시 행복하더라도, 끝내 망한다. 아비는 연애하지 않곤 못사는 주제에 이기적이고 무책임하고, 실망한 수리진이 떠날 때도 붙잡지 않고 곧장 새로운 여자 루루(유가령)를 꾀어 집 안에 끌어들인다. 사랑이 식은 사람 앞에서 아직 사랑하는 사람의 기분은 살아 있는 죽음과 같다. 이제 수리진은 유령처럼 아비의 집 앞을 배회하고, 근처에 다른 유령들(장학우, 유덕화)도 보인다. 그리고 루루 역시 유령이 될 것이다. 아비를 중심으로 유령들이 떠도는 <아비정전>은 연애의 먹이사슬에 관한 일종의 귀신영화다.

“평생을 날아다녀야 하는 ‘다리 없는 새’가 단 한번 땅에 내려오는 날이 바로 죽는 날”이라고 말하는 아비는 왜 저런 인간이 되었으며, 저 허장성세가 가엾어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비의 마음속은 공허하다. 그 안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건 커다란 결핍뿐이다. 자신을 버린 친모에 대한 트라우마와 콤플렉스에서 온 오랜 결핍. 계모는 아비에게 말한다. “그래 실컷 미워하렴, 최소한 나를 잊진 않을 테니.” 서로가 지긋지긋해하면서도 막상 떠나려니 두렵고, 잊히긴 싫어하는 아비와 계모와의 관계는 절절한 애증이다. 계모는 마침내 아비에게 친모의 주소를 건네고 아비는 드디어 자신의 공백과 마주하러 필리핀으로 향한다.

친모의 집에 도착하지만 그녀는 아비를 만나주지 않는다. 가정부는 그녀가 그곳에 없다고 했지만 아비는 집을 나설 무렵, 뒤에서 바라보는 누군가의 시선을 느낀다. 그러나 그는 절대로 뒤돌아보지 않고, 두 주먹을 꽉 쥔 채 열대우림 속으로 씩씩하게 걸어간다. 아비는 다시는 이곳에 오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딱 한번 친어머니의 얼굴을 보고 싶어 왔는데, 당신이 싫다면 나도 내 얼굴을 볼 기회를 주지 않겠어.” 내가 <아비정전>을 처음 본 이후, 영원히 사랑하는 영화로 남은 이유는 오직 이 장면 때문이었다. 나는 이 순간의 아비처럼 언젠가 내 친모에게도 똑같이 대하고 싶었다. 그런 마음이 10대와 20대의 나를 살아가게끔 도와준 것 같다.

그러나 다리 없는 새는 어디에도 가닿지 못했고, 아비 역시 죽은 유령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처음부터 미완이었고 결코 완성될 수 없는 삶을 살다 죽을 존재였다. 로스 인디오스 타바하라스의 <Always In My Heart>가 흐르는 열대우림의 장면은 죽은 아비가 눈을 부릅뜨고 보는 자기 삶의 마지막 장면이다. 선원이 된 경관(유덕화)에게 수리진을 다시 만난다면 전해달라며 남기는 아비의 유언은, “내가 전부 다 잊었다”는 것이다. 타인에게 망각되지 않기를 바라는 자가 전하는 자기 망각의 선언. 기억에 의해서만 존재하는 순간적인 영원이다.

<만다라>

욕망의 자리에 번뇌가 남았다

청춘의 번뇌가 미완으로 완성되는 <아비정전>의 ‘다리 없는 새’를 나는 또 다른 영화 속의 새(鳥)와 이어보고 싶다. 소설가 김성동의 자전적인 원작을 영화로 만든 임권택 감독의 <만다라>(1981)에 나오는 ‘병 속의 새’가 그 새다. 나는 30대 들어 뒤늦게 본 <만다라>에서 <아비정전>과 다르면서도 같은, 좀더 성숙한 대답을 발견하고 놀랐다. <만다라>를 난데없이 피서영화로 추천할 근거도 물론 있다. 추운 겨울영화는 여름날 보기에 좋다.

대학을 그만두고 출가하여 수행 중인 젊은 승려 법운(안성기)은 우연히 파계승 지산(전무송)을 만난다. 고기 먹고 술 마시고 담배 피우고 유곽에서 노는 지산은 속세에서 뒹굴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부처의 길을 찾는 파격을 추구한다. 반면 누구보다 깨달음을 절실히 갈구하지만 아직 아무것도 깨우치지 못한 법운은 오랜 방황 중이다. 지산이 “싯다르타는 6년 수행 끝에 부처가 되었는데 자네는 6년 몸부림 끝에 얻은 게 뭐냐”고 묻지만 법운은 답할 것이 없다. 지난 동안거 기간에 법당의 큰스님(박암)이 법운에게 던진 질문, “병 안에 넣어서 키운 새가 이제 커져서 나오질 못하니 어떻게 하면 이 새를 꺼낼 수 있겠는지?”에 대한 답도 6년 동안 찾질 못했다. 법운은 지산을 따라 속세로까지 만행(萬行)을 다녀보지만 마음만 더 괴롭고, 돌아온 법운에게 큰스님은 손을 내밀며 ‘병 속의 새’를 내놓으라고 일갈한다.

지산은 그가 깨달음을 추구하는 본질적인 이유와 승적을 잃게 된 사연을 법운에게 알려준다. 그의 번뇌는 인간적인 욕망과 그 욕망을 해소한 뒤의 허무에서 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정작 영화의 화자인 법운은 자신의 오랜 고뇌가 어디로부터 기인한 것인지 영화 중반에 이를 때까지 관객에게, 곧 자신에게 명확한 정체를 밝히질 않는다. 어차피 죽을 인간 존재의 허망함 때문인가? 애인을 범하고 비겁하게 내팽개친 죄의식 아닌가? 그는 무엇으로부터 달아나려고 하는 것일까? 유곽에서 도망친 그는 소낙비 내리는 염전 마을에서 숨겨둔 진실과 마주한다. 회상. 소년이 집으로 달려와 “엄마가 기차 타고 서울에 간 게 정말이야?” 묻는다. 엄마는 훌쩍 떠나면서 이모 집에 가서 살라는 말만 남겼다. 소년은 가만히 쪼그리고 앉아 어딘가를 바라본다. 그 소년이 지금의 법운이다. 이쪽에도 커다란 결핍이, 트라우마와 콤플렉스가 옥죄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무당집 불상에 점안(點眼)을 해주고 난 뒤 법운이 행하는 지산의 다비(茶毘)는 명백한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다. 산 위에 실제 사물로 산수화를 재현하고는 확 불을 질러 깡그리 태워버린 듯한, 강렬하면서도 냉엄한 장면이다. 그러나 <만다라>는 이어지는 에필로그가 가슴의 어딘가를 끝내 찍어 누른다. 법운은 지산이 남긴 찡그린 얼굴의 불상을 지산의 보살이었던 옥순(방희)에게 전하고, 마침내 자기 번뇌의 근원을 마주하러 간다. 그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어 자신의 출가 전 이름을 말하고, 그를 버리고 떠났던 어머니(박정자)를 다시 만난다.

어머니는 수십년 만에 마주한 아들에게 묻는다. “지금도 나를 미워하니? 목련존자는 지옥에 떨어진 어미를 위해 일곱번씩이나 지옥에 들어갔다지 않던?” 그래서 법운이 뭐라고 답하였는지, 굳이 여기에 친절히 적어놓을 필요는 없겠다. <아비정전>에선 나도 그렇게 행동하고 싶었지만, <만다라>에선 내가 과연 그렇게 말할 수 있을지 아직도 솔직히 잘 모르겠다고만 해두자. 누군가는 ‘겨우 그런 번뇌를 가지고?’ 하며 웃을지 모르지만, 중생의 번뇌란 원래 그런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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