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경구가 엄청 섹시하다. 말도 안 된다.” 때는 영화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이하 <불한당>)이 개봉하던 5월 17일. 기자의 SNS 타임라인에 올라온 어떤 이의 글이 시선을 끌었다. 사연인즉슨, 이 사람은 원래 마지막으로 본 설경구의 출연작이 <박하사탕>일 만큼 그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었는데 <불한당>을 보고 온 후 그가 연기한 재호의 캐릭터에 반해버렸고 하루 종일 <불한당> 생각만 하게 됐다는 것이다. 한동안 “<불한당>은 재호가 뭐에 씌어서 현수(임시완)를 사랑하다 파멸하는 한국판 <색, 계>”라든지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못한 병갑이 불쌍해서 김희원의 얼굴만 봐도 눈물이 난다”거나 “칸국제영화제에서 국위 선양하는 코리안 뷰티 임시완” 같은 말만 하루 종일 쏟아내던 그는 팔로워들에게 괜스레 미안해진다며 <불한당>만을 위한 새로운 계정을 팠고, 지금 이 순간까지도 본래 계정으로 돌아오지 않고 있다.
누구 하나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이렇게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한 <불한당> 팬, 일명 ‘불한당원’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자 투자·배급을 맡은 CJ엔터테인먼트는 개봉 한달 반이 지난 6월 30일 이례적으로 설경구, 임시완, 김희원, 전혜진 등 주연배우 4명이 모두 참석하는 ‘<불한당> Thank You 상영회’를 개최했다. 당첨자를 뽑은 이벤트 글에는 무려 3천개가 넘는 댓글이 달렸다. <불한당>의 촬영지였던 ‘미림분식’은 팬들의 관광 명소가 됐다. 미림분식쪽은 “젊은 여성들이 영화를 보고 많이 찾아온다. 설경구, 김희원이 앉았던 8번 자리는 경쟁이 치열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불한당>은 관객 90만명을 조금 넘긴, 손익분기점을 돌파하지 못해 상업적으로 성공했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작품이다. 그래서 더 궁금해졌다. 집 나간 온라인 친구를 비롯한 <불한당> 팬덤의 열기는 왜 이렇게까지 뜨거워지게 됐을까. 궁금증을 풀기 위해 지난 6월 30일 메가박스 코엑스 MX관, 롯데시네마 월드타워 슈퍼플렉스관에서 각각 열린 <불한당> 대관 행사 현장부터 찾았다.
영화의전당 대관 행사에 참석한 배우 장인섭을 위해 준비된 선물들. 불한당원들의 사랑은 배역의 크기를 가리지 않는다.
서울, 부산을 넘어 일본까지?
“우리가 관이 없지 돈이 없냐.” “이 기세를 몰아 고척 스카이돔까지 가보려고 한다.” “설경구 배우님 환갑 기념 상영회까지 함께하는 게 목표다.” 6월 30일 대관 행사에 참석한 관객은 야심차게 포부를 밝혔다. 지난 5월 30일 CGV영등포 스타리움관 단체 관람을 시작으로, 불한당원들은 관을 통째로 빌리는 대관을 서울·부산·수원·대구 등 전국 단위로 시도하고 있다. 이들 표현으로 “감는 데” (영화 <불한당>에서 재호가 현수를 자기쪽으로 끌어오겠다는 의미로 쓴 표현이기도 하다) 성공한 상영관은 지금까지 롯데시네마 월드타워 슈퍼플렉스관, 메가박스 코엑스 MX관, CGV센텀시티 스타리움관, 부산 영화의전당 하늘연극장 등이다. 대관을 추진하는 ‘총대’가 예상관객 규모와 필름 확보 여부를 극장과 논의하고 참석 가능 수요를 파악한 후 자신의 계좌로 입금받은 돈을 극장에 전달하면 큰 관도 빌릴 수 있다. 대관 당일에는 10명이 넘는 현장 스탭들이 직접 만든 포스터나 포토카드, 엽서 등을 관객에게 무료로 배부한다. 모두 그저 <불한당>이 좋아서, 자진해서 하는 일이라고 한다.
많은 애니메이션 팬들의 ‘응원상영’ 문화에서 짐작할 수 있듯, 불한당원들이 10번이 넘는 대관을 통해 독특한 관람 문화를 만들어낸 것은 자연스런 수순이다. 상영관 대여시간을 30분 연장해 팬들끼리 자체적으로 행사를 열기도 하고, 배우들이 상영관을 찾아 ‘관객과의 대화’ (GV)를 열면 진행도 팬들이 맡는다. 가령 6월 30일 메가박스 코엑스 MX관 대관 상영 전에는 배우 설경구가 1시간 정도 관객과 만남을 가졌다. 영화 상영 중 지켜야 할 암묵적인 관람 에티켓도 있다. 처음 감독과 배우의 이름이 뜰 때는 뜨거운 박수를 보내지만,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에는 그 누구도 웃음소리 하나 내지 않는다. 영화의전당 대관 광주지역 총대를 맡은 트위터리안 달배는 “러닝타임 내내 경건하게 본다. 대부분 N차 관람을 한 분들이기 때문에 자신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부분을 집중해서 보거나, 어떤 당원이 7분40초에 무엇이 나온다고 알려주면 그것을 찾는 식”이라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하지만 영화가 끝난 후 타이틀과 ‘감독 변성현’이 뜨기 시작하면 모두가 일어나 박수를 친다. <불한당>이 칸국제영화제에서 7분간 박수를 받은 일에서 영감을 얻어 CGV영등포 스타리움관 단체관람 때부터 시작된 기립박수 문화는 나름의 놀이로도 진화했다. 현수와 재호가 최 선장 무리와 싸울 때 O.S.T가 흘러나오면 관객의 박수는 신나게 리듬을 타기 시작하고, 이따금 크게 소리도 지른다.
불한당원 중에는 영화를 보기 위해 다른 지역으로 ‘원정’까지 가는 경우도 적지 않다. 지난 7월 2일 부산 영화의전당 하늘연극장 대관에서는 서울에서 부산으로 내려가는 사람들을 위해 두대의 버스가 준비됐다. 민철 역의 장인섭 배우와의 짧은 만남의 시간이 마련돼 있긴 했지만 주연배우들이 참석하는 자리는 아니었다. 트위터리안 달배는 “서울에서 온 분들은 버스 안에서도 <불한당> VOD만 돌려 봤다. 그날 하루만 <불한당>을 6번 봤다더라. 힘들지 않느냐고 물어보니 그저 좋고 너무 행복했다고, 아버지에게 효도한 기분이라고 했다”고 현장 분위기를 전했다. 내년 초 일본 개봉에 맞춰 ‘<불한당> 패키지 투어’를 만들자는 목소리도 나온다고 한다. 지난 6월 30일 메가박스 코엑스 MX관 대관 행사에 참석한 익명을 요구한 당원1은 “영화에서 재호가 10월 28일에 죽었으니 가을이나 겨울에 보면 더 좋을 것이다. 극장에서 나올때 차가운 공기가 내 코끝을 스치는 경험을 하고 싶다. 이런 경험을 <불한당>을 처음 접하는 관객이 있을 일본에서 하면 짜릿할 것 같다”고 했다.
지난 6월 15일 롯데시네마 월드타워에서 있었던 대관 행사에 참석하는 배우 김희원을 위해 팬들이 메시지를 남기고 있다.
불한당원들이 결집한 이유
<불한당>의 상영관이 급속도로 줄어든 것은 <불한당>의 팬덤이 집결되고 대관 문화가 활성화된 가장 큰 이유였다. <불한당>은 변성현 감독의 SNS 논란으로 인해 개봉 이틀 만에 인터넷에서 이른바 ‘평점 테러’까지 당했고, 감독은 사과문을 올린 후 잠적했으며, 칸국제영화제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이 사건과 흥행 성적의 인과관계는 증명하기가 어렵겠지만, 분명 상관관계는 있었다. 개봉 6일 만에 하루 관객수는 5만명대로 추락했고, 상영관은 개봉일 800개관에서 일주일 후 497개로, 2주 후에는 188개로 대폭 줄었기 때문이다. 이른바 ‘퐁당퐁당’ 상영이었던 까닭에 188개관을 잡아도 상영 횟수는 301번에 그쳤다. <캐리비안의 해적: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원더우먼> <미이라> 등 블록버스터영화들이 연이어 개봉한 것도 흥행에 큰 타격이 됐다. 실제로 <불한당>의 팬덤이 단체관람이나 대관을 위해 결집하기 시작한 것 역시 개봉 2주 후였던 지난 5월 31일이었다. 당원1은 “상대적 박탈감 때문에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것이 더 절실해졌다”고 말했다. 또한 큰 스크린, 좋은 음향 시설을 갖춘 주요 상영관은 프리미엄 시간대에 <불한당>처럼 이미 하락세에 접어든 영화를 틀지 않기 때문에 대관은 보다 절실하다. 당원1은 “이렇게 안 하면 오전 7시20분에 아주 작은 상영관에서 영화를 봐야 하거나 아예 보지도 못한다”고 부연했다.
한편 <불한당>이 칸국제영화제 미드나이트 섹션에 진출했지만 연출을 맡은 감독이 참석을 포기할 만큼 인터넷 여론이 좋지 않았던 것은 불한당원들에게 쓰라린 아픔이자 ‘덕질’이 불타오르는 계기가 됐다. 트위터리안 달배는 “변성현 감독님이 칸국제영화제에 못 가셨다. 우리가 영화의전당에 레드카펫을 깔아서 감독님이 레드카펫을 밟게 해드리자고, 그렇게라도 영화제 분위기를 내드리자는 의미에서 추진했던 대관이다. 또한 부산국제영화제 개·폐막식이 열리는 상징적인 곳에서 대관 상영을 하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다. 원래 목표로 했던 야외상영은 영화의전당으로부터 불가능하다는 답을 받아 대신 하늘연극장에서 진행했다”고 대관의 취지를 전했다. 이렇게 이어져온 상영은 앞으로도 지속될 전망이다. 오는 9월 올림픽공원 우리금융아트홀 대관이 최근 확정됐다.
<불한당>의 팬덤은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신세계> <아가씨> 등과 달리 2차 창작을 열심히 하지 않는다. 당원1은 “1차에 해당하는 영화가 비극으로 끝나지 않나. <아가씨>처럼 둘의 행복한 이야기를 상상하는 게 불가능하다. 현수의 삶이 앞으로 어떻게 흘러갈지 상상할 수가 없다. 게다가 자기들끼리 사랑을 하고 끝내고 다 해서 우리가 끼어들 틈이 없다. (웃음)”고 말했다. 그래서 이들은 “무슨 짓을 해도 2차 창작이 1차를 뛰어넘을 수 없다”는 것을 내내 강조했다. 대신 ‘덕질’의 스타일은 연이은 대관으로 좋은 상영 시설에서 영화를 감상하고, 달라진 환경에서 영화를 보는 것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몸으로 느끼고 더욱 세세하게 작품을 해석하는 데 이른다. 영화의전당 대관 스탭으로 참여한 강화진씨는 “하늘연극장 스크린이 상대적으로 밝아서 다른 곳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부분들이 보였다”며 이번 대관에서 좋았던 점을 꼽았다. ‘<불한당> Thank you 상영회’를 찾은 김지은씨는 “확실히 좋은 곳에서 보니 현수가 숨을 고르는 미세한 소리까지 들리더라. 미처 몰랐는데”라며 만족감을 드러냈다.
<불한당> Thank You 상영회’에서 만난 한 관객이 보여준 다양한 굿즈들. 이중에는 대관 행사에 참여하기만 하면 누구나 받을 수 있는 물건도 있다.
불한당원들이 말하는 영화의 매력
이쯤에서 가장 근본적인 이유로 돌아가보자. 영화를 둘러싼 환경이 팬덤의 열기를 더욱 뜨겁게 했다면, 애초에 이들이 많고 많은 영화 중 유독 <불한당>에 ‘꽂힌’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많이 언급되는 키워드는 바로 두 주인공의 ‘감정’이다. <불한당>은 살인을 할 때 사람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죽이는 냉혈한 재호가 언더커버로 잠입한 형사 현수를 진심으로 믿어버리다가 파멸하는 이야기다. 극중에서는 이 감정이 사랑이라고 언급되지 않지만, 변성현 감독과 설경구는 몇번이고 이 감정을 사랑이라고 설명했고 당원들은 이러한 ‘공식 입장’에 환호한다. 영화의전당 부산 총대는 “<불한당>을 보며 ‘세기의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됐다”고 하고, 현장 스탭으로 일했던 대학생 신우정씨는 “슬픔이나 기쁨이나 그냥 내가 자연스럽게 느끼게 할 뿐 연출이나 음향으로 감정을 강요하지 않는다”며 영화의 매력을 설명했다. “영화를 2번, 3번, 그 이상 관람하며 미장센, 프레임, 구도, 톤, 조명을 분석하고 다른 이들의 해석도 보니 완전 미치겠더라.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까지 완벽에 가까운 작품이 다 있나”(익명을 요구한 영화의전당 현장 스탭1)와 같이 영화의 완성도 자체에 열광하는 반응도 있다.
한편 <불한당>의 대관 행사를 찾는 관객은 99%가 여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여성 관객이 좋아하는 포인트도 있다. 신우정씨는 “여성 캐릭터가 성녀 혹은 창녀로만 소비되는 경우가 많아 누아르 장르를 별로 선호하지 않는다. SNS상에서 한국영화의 이런 면을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불한당>을 좋아할 것이라는 글을 보고 극장을 찾게 됐고, 빠지게 됐다”고 말했다. 당원1은 “당원들도 <불한당>이 젠더 감수성이 완벽한 영화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스포츠카 장면처럼 여성이 도구화되는 부분도 있다. 하지만 노력한 게 눈에 보인다. 룸 안에서 여자들과 노는 장면이 없지 않나. 모성애나 사랑에 의해 움직이지 않는 여성인 천 팀장 캐릭터도 좋다”고 말했다. 실제로 <불한당>은 제작 단계에서 여성 관객의 심리를 고려 사항으로 넣기도 했다. 안은미 폴룩스픽쳐스 대표는 “하혜령 기획·마케팅 이사, 이진희 프로듀서, 박지성 CJ E&M 한국영화 투자팀장 등 이 영화를 만들 때 참여한 사람들 가운데 여자가 많았다. 우리에게 허용됐던 선을 관객도 받아들인 것 같다”고 말했다. 또한 “영화 초반에 스포츠카 뒤에서 현수와 나타샤가 뒹구는 모습은 끝까지 내부적으로 논의를 많이 했다. 감독님도 빼야 하는 게 아닐까 고민을 많이 했다. 그런데 이 장면을 빼고 편집하면 전체적인 감정 리듬이 맞지 않더라”라고 덧붙였다.
불한당원들은 도장, 명패봉, 틴케이스, 키링 등 다양한 굿즈를 직접 디자인하고 제작한다.
불한당원들의 최종 목표는?
그렇다면 불한당원들의 최종 목표는 무엇일까. 가장 많이 나오는 목소리는 단연, 그들이 ‘아버지’라고 부르는 변성현 감독과의 만남이다. 그는 영화 개봉 이후 칸국제영화제를 포함해 단 한번도 공식석상에 나타난 적이 없다. 트위터리안 달배는 “감독님을 모시고 GV를 하고 싶다. 당신의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고 소망을 밝혔다. 이렇게 대관을 이어가다보면 “언젠가 관객수 100만명을 채울 수 있지 않을까”(영화의전당 현장 스탭 김은정씨) 하는 기대도 있다. 실제로 영화 상영이 거의 마무리되던 시점에 추진된 첫 단체관람 당시 관객 89만명이었던 스코어는 어느덧 93만명을 돌파했다. 개봉 1∼2주 안에 승부를 보지 못하면 자본의 논리에 의해 상영관이 줄어드는 한국영화계에서, 똑같이 자본의 힘으로 어떻게든 관에 걸리게 만들고 심지어 <스파이더맨: 홈커밍> 같은 블록버스터영화를 걸 법한 곳까지 차지하는 사람들이 등장했다. 불한당원들은 어쩌면 지금 이 순간 한국에서 극장 영화 관람에 누구보다도 큰 가치를 부여하고 이를 실현할 방법까지 가장 잘 알고 있는 집단일지 모르겠다.
왼쪽은 불한당원들이 유독 좋아한다는 일명 ‘천지창조’ 포스터. 오른쪽은 배우 임시완의 개인 포스터.
불한당원들 ‘대관의 역사’
5.17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 개봉 5.30 CGV영등포 스타리움관(단체관람) 6.3 CGV왕십리 7관 6.5 CGV압구정 1관 6.9 롯데시네마 월드타워 슈퍼플렉스관(문지윤 참석) 6.15 롯데시네마 월드타워 슈퍼플렉스관(김희원 참석) 6.16 메가박스 코엑스 부티크M관 6.17 롯데시네마 은평 슈퍼플렉스관(장인섭 참석) 6.21 CGV여의도 4관 6.22 메가박스 코엑스 MX관 6.23 CGV수원 8관 6.24 부산 CGV센텀시티 스타리움관 6.30 메가박스 코엑스 MX관(설경구 참석) 6.30 롯데시네마 월드타워 슈퍼플렉스관(설경구, 임시완, 김희원, 전혜진 참석) 7.2 부산 영화의전당 하늘연극장(장인섭 참석) 7.4 메가박스 코엑스 MX관 7.7 롯데시네마 월드타워 슈퍼플렉스관(전혜진 참석) 앞으로는 7월 8일 대구CGV 11관, 7월 21일 메가박스 목동 MX관, 9월 16일 올림픽공원 우리금융아트홀 어쩌면 부천지역, 세종문화회관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