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는 시제가 뒤섞여 있다. 영화에 등장하는 하나의 현재는 이러하다. 문학평론가인 봉완(권해효)이 사장으로 있는 출판사에 아름(김민희)이 첫 출근을 한다. 바로 그날, 남편에게 새로운 여자가 생겼다고 생각하던 봉완의 아내(조윤희)가 출판사로 찾아오고 그녀는 아름을 보자마자 이 여자가 그 여자일 거라 확신한다. 아름은 봉변을 당한다. 그사이 영화는 봉완과 연인 창숙(김새벽)의 과거 한때의 밀회를 끼운다. 또 영화는 현재의 시간에 영화 속 과거로만 존재했던 창숙을 불쑥 등장시킨다. 과거의 시간이 현재의 시간과 만나게 된다. 종국에는 이 모든 시간을 완전히 과거로 돌려버린다. 아름의 첫 출근날 이후로 한참 시간이 흐른 뒤의 또 다른 어떤 하루까지 등장한다. 그날 봉완과 아름은 재회하지만 예전에 만났던 이들이 맞나 싶을 정도로 어색하다. 이때 이들은 기억이 선명치 않거나 선명하지 않은 척한다.
<오! 수정>(2000), <북촌방향>(2011)에 이은 홍상수 감독의 세 번째 흑백영화다. <오! 수정>이 불확실한 기억을, <북촌방향>이 불확실한 시간을 흑백의 영상으로 보여줬다면 <그 후>는 시간의 무경계성을 보여주는 듯하다. 뒤섞인 시제안에서 인물(특히 아름)만큼은 꿋꿋이 버티고 서 있다. 시간을 뛰어넘어 서로가 결국 마주보고야 마는 이상한 순간이 만들어진다. 영화는 이처럼 홀연히도 시간을 꿰뚫어버린다. <그 후>에는 둘 혹은 세 사람이 마주앉아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유독 많다. 그때마다 카메라는 인물의 옆얼굴을 롱테이크로 찍곤 한다(그 덕에 감독의 작품에서 전에 보지 못했던 산만하면서도 기이하게 아름다운 인물의 헤어스타일을 볼 수 있다. 그 인물의 헤어스타일이 바뀌었다는 것 역시 주목하게 된다). <그 후>는 공간을 반복적으로 배회하면서 미세한 차이를 만들어내던 홍상수 감독의 로드무비와는 또 다르다. 이번엔 작정한 듯 공간성을 배제해버렸고 인물의 얼굴과 인물들이 나누는 대화에 오롯이 집중한다. 문학평론가인 봉완이 언어의 조악함을 운운하며 자기모순을 드러낼 때 아름은 정확히 그 기만을 꿴다. 영화에는 힘 있는 고요와 아름의 신념이 유유히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