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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지웅의 경사기도권] <웨스트 윙> <캐빈 인 더 우즈> <겟 아웃>의 브래들리 휫퍼드
허지웅(작가) 일러스트레이션 김지은 2017-06-19

<웨스트 윙>의 주인공은 누구였을까. 가끔 그렇게 때늦은 궁금증이 생길 때가 있다. 토비 지글러? C. J. 크렉? 아니 바틀렛 대통령 자신이었을까? 이제는 극중에서도 현실에서도 더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리오 맥게리를 빼놓을 수는 없겠지. 우리의 영원한 비서실장 리오의 명복을.

사실 <웨스트 윙>의 주인공은 어느 누구 하나 빼놓을 것 없이 두번의 임기 동안 백악관을 거쳐간 바틀렛 정부의 모든 참모들일 것이다. 이게 정답이다. 도중에 하차한 사람, 사망한 사람, 나중에 돌아온 사람 할 것 없이 모두 말이다. 비이성의 험로로 돌진했던 현실의 부시 정부를 견딜 수 있었던 건 브라운관 속 바틀렛 행정부의 상식인들 덕분이었다.

나는 아직도 9·11 테러 직후 이 드라마가 보여준 훌륭한 태도를 잊지 못한다. 이들은 테러가 벌어지자 본래 예정되었던 시즌 프리미어를 취소하고 긴급 에피소드를 편성했다. ‘이삭과 이스마엘’이라는 제목의 이 에피소드에서 그들은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왜 민주주의를 혐오하는지 근원부터 들여다보려는 노력을 한다. 우리의 공동체와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당장의 분노에 함몰되어 대응할 게 아니라 차분하고 이성적으로, 그러나 단호하게 행동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든 이슬람 민족이 근본주의자는 아니라는 사실을 힘주어 강조한다. 그 정도 규모의 참사가 벌어졌을 때 상식이나 객관성은 잠시 유보되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작가 에런 소킨은, <웨스트 윙>은 그렇게 했다. 현실의 부시 정부가 우왕좌왕대다가 애꿎은 대량살상무기 타령을 하며 전쟁을 일으키는 동안, 브라운관 속의 바틀렛 행정부는 줄곧 이성의 보루였다.

그리고 그 중심에 비서실 차장 조시 라이먼이 있었다. 그렇다. 나는 <웨스트 윙>에서 단 한 사람의 주인공을 꼽아야 한다면 단연 조시 라이먼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시즌 내내 우리를 쥐고 흔들었던 조시 라이먼은 심지어 롭 로가 연기한 샘 시본을 제쳐가며 <웨스트 윙>의 실질적인 얼굴로 기능했다. 조시 라이먼은 곧 ‘똑똑하고 공격적이며 재수없고 유머러스한 수다쟁이 유대계 민주당원’ 캐릭터의 새로운 전형이 되었다. 드라마 <웨스트 윙>의 성공은 조시 라이먼을 연기한 실제 배우에게도 그와 똑같은 종류의 인장을 남겼다. 조시 라이먼을 연기한 브래들리 휫퍼드 이야기다. 브래들리 휫퍼드는 조시 라이먼과 영 분리되지 못했다. 그는 여전히 이 인장을 떨쳐내지 못했다. 다만 그것을 떨쳐내는 대신 더 나은 방법으로 극복해냈다. 이 글은 브래들리 휫퍼드에 관한 것이다. 아, 나는 정말 그의 광적인 팬이다.

브래들리 휫퍼드를 처음 본 건 그가 <로보캅3>에서 OCP 간부 역할을 했을 때였다. 꽤 비중 있는 악당으로 그려지는가 했으나 영화 후반부에 이르러 일본 회사에 인수된 OCP가 도시 빈민촌 철거에 실패하면서 급작스럽게 극에서 퇴장한다(심지어 죽는 장면도 안 나온다, 소리만 들린다). 80년대 후반에 데뷔해 연극 무대에서 주로 활약하며 영화나 TV에서는 주로 단역을 맡았던 그는 <웨스트 윙> 이후에서야 주류에서 자주 언급되는 배우가 되었다.

그가 다시 한번 대중 앞에 화려하게 나타난 건 <웨스트 윙>의 에런 소킨이 연출한 드라마 <스튜디오 60>이었다. 여기서 그는 유서 깊은 TV코미디 풍자쇼 <스튜디오 60>의 연출자를 연기한다. 과거의 영광을 뒤로하고 이제는 보수 시청자와 간부들의 눈치를 이기지 못해 한심하게 쇠락해버린 쇼를 그가 맡게 되면서 다시 한번 도약하는 내용을 그린다. 본래 극의 중심은 함께 쇼를 이끄는 매튜 페리에게 가 있었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브래들리 휫퍼드에 힘이 실린다.

그러나 성적이 썩 좋지 않았다. 여기서 그는 한계를 만났다. 극중의 그는 보수적인 간부들, 특히 풍자에 대해 매우 방어적인 태도를 보이는 교회 권력과 싸우면서 쇼를 어렵사리 이끌어나가는데, 그러다보니 어쩔 수 없이 예의 ‘똑똑하고 공격적이며 재수없고 유머러스한 수다쟁이 유대계 민주당원’의 캐릭터가 되풀이될 수밖에 없었다.

더 큰 비극은 따로 있었다. 시청률에 발이 잡히면서 드라마 후반부로 갈수록 로맨스 비중이 늘어났다. 에런 소킨은 <어퓨 굿 맨>과 <대통령의 연인> <웨스트 윙> <스튜디오 60> <소셜 네트워크> <뉴스룸> <머니볼>을 쓸 수 있다. 그러나 로맨스는 쓰지 못한다. <뉴스룸>의 로맨스를 떠올려보자. 그의 로맨스는 흡사 뱃속에 들어가서조차 결코 끊어지지 않고 입밖에까지 이어진 모차렐라를 보는 것만 같다. 늘 한결같이 늘어지기만 하는 밀당에 지치지 않을 관객은 없다. 개인적으로는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만큼 사랑하는 드라마지만(첫번째 에피소드 두편은 20번도 넘게 보았다. 사랑스럽고 근사하다) <스튜디오 60>은 다음 시즌을 기약하지 못하고 서둘러 종영되고 말았다.

이후 작은 영화와 드라마를 전전하던 브래들리 휫퍼드는 얼마 지나지 않아 영리한 선택을 하게 된다. 자신이 ‘똑똑하고 공격적이며 재수없고 유머러스한 수다쟁이 유대계 민주당원’의 이미지를 영 떨칠 수 없다면(그는 오바마 정부 임기 동안 민주당의 선거 운동을 도왔다), 이 이미지를 거꾸로 이용할 수 있는 캐릭터를 연기하는 게 현명한 선택이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에런 소킨의 드라마에 연달아 출연한 이후 브래들리 휫퍼드의 가장 중요한 커리어는 그렇게 기획되었다. 바로 <캐빈 인 더 우즈>가 그것이다.

이 영리하기 짝이 없는 공포영화는 기존 호러물들이 구축한 질서와 관행을 송두리째 뒤집어 이용하면서 상상하지 못했던 결말로 치달아간다. 이 영화는 한때 <나이트메어>가 그랬고 <뉴 나이트메어>가 그랬으며 <스크림>이 또한 그랬듯이(의도한 게 아닌데 공교롭게도 모두 웨스 크레이븐 영화다. 웨스 크레이븐에게 경배를) 장르 전반의 전통을 파괴하는 동시에 재구축하고 그것을 한 걸음 더 나아간 영역으로 진보하게 만들었다.

브래들리 휫퍼드는 여기서 ‘똑똑하고 공격적이며 재수없고 유머러스한 수다쟁이’ 악당을 연기한다. 그는 첨단 시설로 무장한 악당 소굴 안에 버티고 앉아 삶에 지친 공무원 같은 표정을 하고 끊임없이 농담과 비아냥을 늘어놓으며 주인공들을 죽이기 위해 전력을 다한다. 이는 기존에 그가 가지고 있던 이미지를 배반하는 동시에 상승작용을 일으켰다. 절묘한 순간이었다. 브래들리 휫퍼드가 연기하는 악당은 그가 입을 비쭉거리는 순간 이미 절반의 성공을 거둔 셈이었다. 그의 캐스팅은 <캐빈 인 더 우즈>의 성공을 이끈 매주 주요한 전략 가운데 하나로 기록되어야 마땅하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최근작 <겟 아웃>에서 브래들리 휫퍼드는 한발 더 나아간다. 이 영화는 브래들리 휫퍼드가 가지고 있는 잘 교육받은 중산층 민주당원 이미지를 확실하게 활용한다.

그가 주인공과 처음 만나는 장면부터 진가가 드러난다. 자신의 딸과 함께 찾아온 유색인종 남자친구를 매우 따뜻하게 맞이하는 그의 태도는 단연 사려깊다. 자신이 오바마를 지지한다는 말을 뜬금없이 뱉을 때도 여전히 그렇다. 그러나 진심이 아니라 전적으로 학습된 게 틀림없는 환대임이 입체적으로 전달된다. 이와 같은 미묘한 정서는 대사 가운데 어느 곳에서도 확실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오직 브래들리 휫퍼드의 표정과 몸짓, 그리고 그가 기존의 자기 이미지를 활용하는 방식을 통해서만 발휘되는 것이다. 관객은 이 묘한 불협화음에서 불안함과 궁금증을 느낀다. 그는 다시 한번 ‘호러 장르 역사에 중요한 이정표로 기록될 만한’ 영화에서 주요한 악당으로 등장해 활약하는 기록을 세우게 되었다. <캐빈 인 더 우즈>에 이어 두 번째인데 이런 커리어는 공짜로 얻어지는 게 아니다.

기존의 강렬한 이미지 때문에 그에 함몰되어 허우적대다 결국 도태되는 배우가 있다. 반면 그런 이미지의 장점과 단점을 고루 파악하고 이를 충분히 활용해낼 줄 아는 배우가 있다. 브래들리 휫퍼드의 연기 커리어는 그가 후자임을 증명하고 있다. 이런 종류의 지혜로움은 단지 연기의 영역에만 해당되는 건 아닐 것이다. 우리는 모두 그런 지혜가 필요하다.

그는 2019년에 공개될 할리우드 <고질라> 속편 <고질라: 킹 오브 몬스터스>에서 닥터 스탠튼 역으로 등장할 예정이다. 자세한 정보는 밝혀진 게 없지만 이미 발표된 고질라와 킹콩의 사례를 돌아볼 때 그가 모나코 소속이라는 건 추측할 수 있겠다. 그가 출연한다는 사실만으로 이 영화에 대한 기대감은 배가 되었다. 왜 안 그렇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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