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봉수 감독, 윤지혜, 신민재, 김충길, 백승환 배우(왼쪽부터).
코미디를 사랑한다면, 주성치 영화의 마니아라면, 6월 8일 개봉하는 고봉수 감독의 <델타 보이즈>(2016)를 주목하시라. <델타 보이즈>는 코미디를, 주성치 영화를 무진장 사랑하는 감독과 배우들이 만나 만든 코미디영화다. 물론 감독도 배우들도 하나같이 낯선 이름, 처음 보는 얼굴들일 게 분명하다. <델타 보이즈>는 지난해 전주국제영화제 한국경쟁부문에서 <연애담>(감독 이현주)과 함께 공동대상을 받으며 주목받기 시작했다. 남성 4중창 대회를 준비하겠다고 모인 네 남자의 곡절을 담았다. 고봉수 감독의 첫 장편이고 김충길, 백승환, 신민재 배우도 대중적으로 알려질 기회가 거의 없었으며 윤지혜 배우는 첫 영화 출연작이다. 제작비 250만원으로 9회차 만에 완성한 작품이다. 하지만 하나하나의 캐릭터가 전부 살아 있고 그들간의 합이 이 영화에 페이소스 짙은 근력을 만들어냈다. 이 멤버들이 그대로 다시 뭉쳐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에 두 번째 장편 코미디물 <튼튼이의 모험>(2017)을 완성, 대명컬처웨이브상까지 수상했다. 존폐 위기에 놓인 지방의 고교 레슬링부 아이들이 뭔가를 해보겠다고 아등바등하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전작과 결을 같이한다. 궁금하지 않은가. 도대체 이들은 어디서 온, 누구인가. 고봉수 감독표 코미디는 어떤 것일까. 맨땅에 헤딩하듯 연기하고 영화를 만들며 여기까지 온 이들이다. <델타 보이즈>의 낯선 얼굴들을 직접 만나보기로 했다.
<델타 보이즈>는 어떤 영화?
‘남성들이여, 위대한 꿈을 향해 노래하라.’ 남성 4중창 대회 포스터의 저 문구가 발단이었을까. 매형의 공장에서 근근이 일하며 살아가던 일록(백승환)은 미국에서 날아온 말 많은 친구 예건(이웅빈)이 내민 포스터가 신경 쓰인다. 멤버를 모아보기로 한다. 시장통에서 생선 가게 직원으로 일하는 대용(신민재)이 양복을 빼입고 면접장에 왔다. 대용이 뭐라고 호소하지 않아도 그의 태도만 봐도 노래를 하고 싶다는 갈급함이 보인다. 대용은 아는 동생인 준세(김충길)를 섭외하려 한다. 준세는 아내 지혜(윤지혜)와 트럭에서 도넛을 팔며 살기 바쁜데 노래라니. 4중창 멤버들이 과연 노래할 수 있을까.
고봉수 감독_첫 장편 <델타 보이즈>로 지난해 전주국제영화제 한국경쟁부문 대상을, 두 번째 장편 <튼튼이의 모험>으로 올해 같은 영화제에서 대명컬처웨이브상을 수상했다. 영화를 각각 9회차, 11회차에 완성해냈다는 것도 놀랍다. 감독은 “다년간 돈 없이 영화를 찍는 법을 터득한 결과”라고 덤덤히 말한다. “‘네가 되겠냐, 이거 되겠냐’는 말을 듣지만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향해 버티며 가보는 사람들을 위한 영화”라는 말과 함께.
백승환_연기를 배운 적이 한번도 없다. 19살 때부터 독학으로, 맨몸으로 연기해온 게 10여년이 지났다. <설계>(2014), <뷰티 인사이드>(2015)등의 단역을 거쳐 고봉수 감독과 만났다. 애초 <델타 보이즈>는 예건이 서사의 중심에 있었지만, 조용히 사람들을 챙기는 백승환의 모습을 본 감독이 ‘델타 보이즈’ 멤버들을 챙기는 일록을 서사의 중심점으로 가져왔을 정도다.
김충길_사진 촬영 내내 김충길의 표정이 쉼없이 변한다. 같은 표정이 단 하나도 없다. 첫 미팅 때, 감독은 김충길의 즉흥 연기에 깜짝 놀랐다고 했는데 그럴 만하다. 중3 겨울방학 때 ‘배우가 되고 싶다’는 자기 확신을 갖고 고1 때부터 연극반 생활을 시작해 지금껏 외길이다. <청춘정담>(2013), <헬머니>(2014) 등에서 단역으로 출연했고 고봉수 감독과 <G4>부터 연을 맺었다.
신민재_배우가 되고 싶다는 오랜 꿈이 있었다. 2011년부터 연극 무대에 섰고 영화는 고봉수 감독과 처음 찍었다. 주성치와 미스터 빈을 정말 좋아한다. 평범한 사람들의 슬픔을 탁월하게 표현하는 배우들이라 생각한다. “고독과 외로움이 기본으로 깔렸을 때 웃음이 더 진하게 배어나는 것 같다”고 한다. 고봉수 감독의 차기작에서 현상금 사냥꾼으로 출연해 멜로 연기를 펼칠 예정이다.
윤지혜_전혀 다른 일을 하다가 25살 때 연기를 시작해 6년차 배우가 됐다. 자신이 연기를 하게 될 줄 몰랐다지만 윤지혜의 에너지(윤지혜의 캐리어)를 느껴본다면 제대로 길에 들어섰음을 알 것이다. <델타 보이즈>로 영화에 데뷔했고 <튼튼이의 모험>에서는 백승환과 남매로 나온다. 분위기 메이커, 에너자이저다.
“주성치 영화를 사랑한다고요? 그럼 한번 주성치 영화풍으로 촬영해볼까요?” 인터뷰의 방향을 정하고 <델타 보이즈>팀을 기다렸다. 스튜디오로 온 고봉수 감독과 배우들, 각자 빵빵한 배낭을 하나씩 메고 섰다. 주섬주섬 꺼내드는 것들을 보니 범상치 않다. 줄무늬 트레이닝복에 꽃무늬 남방, <델타 보이즈> 속 주인공들이 입었을 법한 와이셔츠와 화려하기 그지없는 보타이까지. 그때 배우 윤지혜가 땀을 뻘뻘 흘리며 캐리어 하나를 끌고 스튜디오로 들어선다. “집을 옮겨왔습니다!” 자그마한 캐리어가 열리자 화관, 가발, 바바리코트, 구두가 튀어나온다. 26벌의 의상이 들었단다. 판도라의 상자 앞으로 감독과 배우들이 슬슬 몰리더니 급기야 가발을 쓰고 바바리코트까지 걸쳐본다. 질 수 없다는 듯 윤지혜가 <소림축구>의 조미를 따라하겠다며 양말을 구겨 재킷의 어깨심을 만든다. 이쯤 되니 마치 주성치 영화 패러디 현장에 온 것 같다. “저희 촬영장에 와보세요, 이것보다 더 웃깁니다! (웃음)” 고봉수 감독이 자신 있다는 표정이다.
-오늘 촬영만 해도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현장은 도대체 어떠했던 건가.
=신민재_ 감독님이 배우들에게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보라며 맡겨주신다. 그러고는 혼자 구석에 가서 우리 연기를 보며 막 웃으시더라.
=백승환_ <델타 보이즈> 촬영 내내 계속 뭔가를 했는데 사실 뭘 했는지 모르겠다. 9회차 내내 정신없이 찍었다. 그래도 한 가지는 분명히 기억난다. 진짜, 정말, 즐거웠다!
-장편영화를 250만원으로 찍었다. 카메라 한대에 밤 촬영 땐 주변의 형광등 두개를 조명 삼아 찍었다고. 그 영화가 이제 개봉을 한다.
신민재_ 250만원으로 만든 영화가 극장에 걸린다는 것이 기적이다. 우리가 영화를 찍었다는 것도, 우리끼리 공유하던 영화가 세상에 나온다는 것도 믿기지 않는다. 극장에 비치된 <델타 보이즈> 홍보물을 보면 신기할 뿐이다.
백승환_ 누군가는 <델타 보이즈> 속 인물들을 보며 손가락질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게 딱 우리의 모습이었다. 돈도 없는데 노래 불러보겠다고 모인 <델타 보이즈> 속 멤버들. 우리 역시 돈도 없는데 우리가 좋아서 영화 만들고 그러니 주변에서도 우습게 보더라. “그렇게 영화 찍어서 되겠냐”는 소리 정말 많이 들었다. 근데 어쨌든 그렇게 해서 된 거 아닌가. 그때도 지금도 확신이 있었다. ‘감독님과 재밌는 작업을 하다보면 언젠가는 사람들이 알아봐주고 재밌어하지 않을까’라는.
=윤지혜_ 승환 배우가 나를 붙잡고 매일같이 말했다. “이런 감독님 만난 거 엄청난 행운이다. 우리가 하는 작업을 믿어보자. 열심히만 하면 된다.” (웃음) 당시 내가 연극도 하고 있었는데 그쪽 팀원들이 걱정을 많이 했다. ‘정신 차리고 빨리 나와라, 공연이나 열심히 하지 왜 그런 데 가서 그러고 있느냐’고. 근데 정말로 신나게 연기했다.
=김충길_ 그동안 겪어본 현장은 대체로 진지하고 심각했는데 고봉수 감독님 현장은 웃음이 끊이지 않는다. ‘결과물이 좋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웃음) 감독님이 이것만은 꼭 해줬으면 하는 것만 빼면 현장에서 배우들에게 놀아보라고, 하고 싶은 대로 해보라고 하신다.
=고봉수 감독_ 트리트먼트는 있지만 사실 그것도 현장에 가면 제대로 지켜지지 않더라. 연기, 연출 모두 즉흥으로 간다. 오래 봐온 배우들이다보니 각 배우가 갖고 있는 개성을 캐릭터에서 살려내는 게 가능했던 것도 같다. 또 <델타 보이즈>를 보신 분들이 ‘먹방 영화’라고도 하더라. 그때 촬영하면서 너무 배가 고파서 촬영과 먹는 걸 한번에 해결하려고 더 그랬던 것 같다. 극중에서 대용이 멤버들과 만날 때 식혜, 인절미, 아이스크림 등 주전부리를 사와서 먹는 등 유독 먹는 장면이 많은 것도 촬영과 먹기를 한번에 해결하려는 게 컸다.
-<델타 보이즈>의 인물들은 저마다 고유의 헤어스타일과 의상 컨셉이 확실해 보인다. 캐릭터에 대한 중요한 설명일 수 있겠다.
신민재_ 대용은 나이를 먹었는데도 아직 경제적으로 자리잡지 못했고 꿈만 좇아가는 사람이다. 꿈을 좇는다는 이유로 주변 사람들에게 민폐를 많이 끼치게 되는데 대용은 그게 또 마음에 걸리고 미안하다. 그럼에도 하고 싶은 걸 꼭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열혈 청년이다. 헤어스타일은, 감독님이 맥가이버 머리처럼 보였으면 하시더라. 김병지 선수의 꽁지머리 사진을 보여드렸더니 굉장히 좋아하셔서. (웃음) 감독님은 헤어스타일로 웃기는 걸 좋아하신다. 코미디의 기본이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다.
백승환_ 일록은 노래를 부르고 싶다는 마음속 꿈은 있으나 선뜻 내색하거나 나서지 못해왔다. 어쩌면 나랑 굉장히 가까운 캐릭터다. 내성적이기도 하고 뭔가를 할 때 뒤에서 사람들을 챙겨주길 좋아하고. 그런 조용한 인물에게 캐릭터를 불어넣기 위해 드래드 헤어를 해봤다. 의상도 어딘가 시대에 뒤처진 듯하게 보이길 바라서 고속버스터미널 근처 가게에 가서 9천원 주고 남방도 샀다. <태양은 없다>(1998)의 도철(정우성)을 따라해보고 싶었지만, 절대 그런 느낌이 나지 않을 거라는 걸 아니까 더 멋없어 보이게 했다.
김충길_ 준세는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야 한다는 걱정과 멤버들과 함께 노래하고 싶은 마음이 뒤섞여 있다. 다른 멤버들에 비하면 현실적인 인물이지.
윤지혜_ 지혜야말로 정말 현실적이다. 그래서 충길과 사는가 보다. 충길이 대용과 만날 때 지혜가 자식 걱정하는 엄마처럼 “안 돼!”라고 소리소리 지르지만, 결국 자식 이기는 엄마 없듯이 준세가 하고 싶어 하는 걸 하게 한다.
-이 ‘운명적인 만남’은 어떻게 시작된 건가.
백승환_ 2014년 10월, 아는 작가님의 소개로 감독님을 만났다. 성함이 고봉수라고 해서 되게 웃기게 생겼겠거니 편견을 갖고 나갔는데 되게 잘생겨서 놀랐다. 감독님의 전작들을 찾아보니 코미디가 많더라. 나 나름대로 코믹한 스타일의 연기를 준비해갔는데, 그냥 얘기하다보니 통했다. 감독님이 ‘찍고 싶은 거 다 찍을 수 있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정말 다 찍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단편을 같이 시작했는데 만드는 속도가 엄청 빨랐고 결과물도 만족스러웠다. 그 후에 ‘연기 정말 잘하는 배우가 있다’면서 감독님께 소개한 게 민재 형과 충길이다. 넷이 단편 <G4>를 찍었고 인디포럼2015에 소개됐다.
고봉수 감독_ 백승환 배우는 되게 잘생겼는데 눈에 똘끼가 있다. 첫인상이 마음에 쏙 들었다. 잘생겼지만 웃겨 보이는 코미디 배우가 필요했다. 주성치 닮지 않았나.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비주얼을 가진 배우다. 신민재 배우? 정말 비주얼이! 너무 맘에 들었다. ‘이 배우다! 무조건 출연시켜야겠다’ 그랬다. 주성치 영화를 볼 때면 배우들의 비주얼이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는데 신민재 배우라면 그들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김충길 배우? 당연히 이길 수 있다! (일동 웃음)
신민재_ 첫 만남에서 감독님이 내 즉흥 연기를 보고 막 웃으시더라. ‘아니, 이분이 지금 왜 이러지? 사기꾼인가? 내가 그 정도는 아니지 않나?’ 싶더라. (웃음)
윤지혜_ 감독님을 교회 연합 캠프 때 처음 뵀다. 내가 간증하는 모습을 보고 연락을 주셨더라. 첫 미팅 때 감독님의 말씀이 아직도 생생하다. “연극적인 대사 말고 그냥 말해줄래요?” 당시 ‘연극적인 것’과 ‘연극적이지 않은 것’사이에 구분을 두지 않고 연기하려던 때라 그 말이 상당한 충격적이었다. 감독님의 날카로움에 놀랐고 공부가 많이 됐다.
-<델타 보이즈>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무엇인가.
신민재_ 준세가 옥상에서 대용에게 “이거 될 것 같아?… 돈 안 벌고 뭐하는 거야. 언제까지 이러고 살 거야. 제발 정신 좀 차리자, 우리. 한동안 괜찮았잖아, 왜 또 노래한다고 해”라고 할 때 굉장히 마음 아팠다. 일록이 실내 야구장에서 일부러 날아오는 공을 온몸으로 맞다가 마지막에 가서야 배트를 들어 공을 쳐낼 때도.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가보고 싶은데 여전히 쉽지 않은 그들의 모습을 그린 장면들이었다.
김충길_ 대용이 “김병지 선수의 열정”을 이야기하면서 “너 같은 놈이 무슨 가수를 하냐는 소리 들을까봐 꿈을 숨기고 살았고, 김병지 선수의 열정을 보며 다시 노래하게 됐다”고 할 때. ‘델타 보이즈’에서 “내가 필요한 사람이 된다는 느낌을 처음 받았다”고 덤덤히 말할 때. 꼭 내 얘기 같아서 울컥했다. 그리고 영화의 엔딩, 이들이 함께 노래 연습을 마쳤을 때 암전되고 박수가 터져나올 때 눈물나더라.
백승환_ 일록이 대용과 처음 만나 같이 자장면을 먹을 때가 생각난다. 일록은 대용이 이 대회가 아니면 안 되는 사람이라는 걸 알았을 것 같다. 그러면서 일록도 더 나아가보자는 마음이 생긴 거다.
고봉수 감독_ 대용이가 박카스를 사들고 준세와 지혜의 도넛 트럭으로 찾아갔을 때다. 지혜가 대용에게 장사 잘하고 있는 준세에게 괜한 바람 넣지 말라고 화를 내는데 대용의 머리카락, 수염, 옷 등을 건드린다. ‘너 생선 되겠다!’고 하면서. 그 장면은 볼 때마다 웃기다.
윤지혜_ 나는 그 장면이 그렇게 창피한데. 내가 ‘대갈빡’이라는 저급한 말을 썼다니! (웃음) 그때 감독님이 내게 조용히 디렉션을 주셨다. 대용이 하는 말을 듣지 말고 계속 대용의 콧수염을 건드리라고.
신민재_ 어쩐지 지혜가 정말 지독히도 내 말을 안 듣더라. 정말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을 정도였다.
윤지혜_ 대용에게 잠깐만 가보겠다는 준세와 절대 가지 말라고 소리치던 지혜의 액션 신도 기억난다. 신기할 정도로 합이 잘 맞았다. (웃음)
-<델타 보이즈>도 그렇고 기본적으로 코미디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그 힘으로 계속 협업을 할 것 같은데.
신민재_ 슬픔 위에서 코미디가 형성되는 것 같다. <델타 보이즈> 속 인물들이 힘들고 지질하지만 꿈을 좇아가는 모습에서 사랑하는 일이 있지만 그 사랑만큼 자신의 실력이 되지 못하는 데 슬픔이 묻어난다.
백승환_ 감독님과 같이 작업하면서 코미디가 뭘까에 대해 고민 많이 하게 됐다. 도전의 영역이지만 아직까지는 대사의 타이밍으로 웃음을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김충길_ 코미디는 진지함 속에 있는 것 같다. 예컨대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너무 긴장한 나머지 냉면을 불어가며 먹는 이가 있다고 하자. 상황은 웃기지만 그 사람은 얼마나 진지한가. 거기에 코미디가 있다.
고봉수 감독_ 군대에서 유격 훈련을 받을 때 정말 힘들었는데 웃음이 터지더라. 너무 힘들면 웃음이 난다. 절망의 끝에서 신이 주는 선물, 그게 코미디 아닐까. (웃음)
일동_ 역시! 감독님은 이렇게 마지막에 명언을 남기시더라. 하하하!
고봉수 감독과 배우들이 꼽은 내 인생 최고의 주성치 영화 명장면
고봉수 감독_“주성치 영화의 팬이라면 이 장면은 꼭 꼽지 않을까. <서유기: 선리기연>(1994)에서 지존보(주성치)가 금강권을 써서 속세를 떠나기 전에 하는 말이 있다. 영화를 하도 여러 번 봐서 그때도 지금도 대사를 달달 외운다. ‘인간사의 가장 큰 고통은 후회다. 하늘이 기회를 줘서 내가 다시 그녀를 만나게 된다면 사랑한다고 말할 것이다. 사랑에 기한이 있다면 만년으로 정할 것이다.’ <중경삼림>(1994)에 나오는 대사를 패러디한 건데, 이거 보며 많이도 울었다. 당시 주성치 영화는 삼류, B급영화로 취급되며 그의 영화를 보고 울었다고 하면 이해를 못하는 분들이 꽤 많았다. 내게 주성치 영화는 가장 웃기면서도 가장 슬픈, 페이소스가 있는 영화다.”
김충길_“<럭키가이>(1998)의 한 장면을 말해보겠다. 여자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일명 ‘에그 타르트 왕자’ 아수(주성치)에게 그의 직장 동료 아복(갈민휘)이 여자에게 차이고 돌아와 심정을 말한다. 아복이 포크로 가슴팍을 찌르는 시늉을 하며 실연의 아픔이 ‘칼로 후벼파는 것 같았다’고 한다. 갈민휘의 오버 연기가 웃기면서도 왜 그리 슬픈지. <델타 보이즈>의 준세가 대용에게 ‘돈 안 벌고 뭐하는 거야. 언제까지 이러고 살 거냐’고 할때도 누군가에게는 웃음을, 누군가에게는 슬픔을 불러일으키지 않았을까.”
백승환_“<희극지왕>(1999)의 사우(주성치)는 대사가 없어도 좋고, 얼굴이 안 나와도 좋으니 자신을 써달라며 캐스팅 디렉터에게 수차례 전화하는 배우다. 그때마다 ‘네가 할 역할은 없다’는 대답만 듣지만. 그의 좁은 방 벽에는 여러 유명 배우들의 사진이 붙어 있고 거울도 걸려 있다. 사우가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바라볼 때가 있다. 그 역시 사진 속 배우들과 나란히 서 있는 것 같았다. ‘나도 배우야’라고 말하듯. <델타 보이즈>의 일록도 종종 거울 속 자신을 본다. 스스로에게 노래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다.”
신민재_“<파괴지왕>(1994)에서 아금(주성치)이 겁쟁이가 되지 않겠다며 공수도 대사형에게 도전장을 낸다. 근데 정작 결전의 날을 앞두고도 아금과 그의 사부(오맹달)는 호기롭게 샤브샤브를 먹고, 좋은 호텔에서 수영하며 논다. 열심히 해도 모자랄 사람들인데 유유자적이다. 그게 오히려 제일 부유하고 행복해 보였다. 노력도 노력이지만, 자신감 있는 그 모습이 좋다.”
윤지혜_“어렸을 때 <소림축구>(2001)를 정말 재밌게 봤다. 그냥 웃겼다. 그런데 주변에 그 영화 재밌다고 하면 ‘그게 왜?’라는 반응이어서 좋아한다고 말도 못했던 기억이 있다. 조미인지도 몰라볼 정도의 변신에다 씽씽(주성치)이 다리를 찢던 모습까지. 예상을 벗어난 어이없는 상황들의 연속이 억지스럽지 않은 웃음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