틸다 스윈튼, 폴 다노, 변희봉, 안서현, 봉준호 감독, 릴리 콜린스, 스티븐 연, 데본 보스틱, 지안카를로 에스포지토, 제이크 질렌홀(왼쪽 세 번째부터).
“조금만 툭 건드려주시면 하고 싶은 말이 폭포처럼 나올 것 같다. 한국인들끼리 문 닫고 진하게 이야기 나누고 싶다.” 제70회 칸국제영화제가 열리는 프랑스 칼튼 호텔에서 경쟁부문 공식 초청작인 영화 <옥자>의 한국 취재진 간담회가 진행됐다. 이 자리에는 연출을 맡은 봉준호 감독과 배우 안서현, 변희봉, 스티븐 연이 참석했다. 넷플릭스 자체 제작 작품과 극장의 불협화음 등으로 칸국제영화제 최고의 이슈로 자리한 봉준호 감독은 그간의 ‘다사다난했던’ 시간들을 내려놓는 기분을 “속이 새카맣게 탔다”고 전했다. 기자회견 자체가 마치 <옥자> 제작의 풀 코멘터리를 듣는 기분이었다. 봉준호 감독과의 일문일답을 옮긴다.
-미자(안서현)는 어린 소녀인데도 불구하고 옥자를 구출하기 위해 초인적인 힘을 발휘한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TV 애니메이션 시리즈 <미래소년 코난>을 보면 코난은 물리적 한계를 뛰어넘는 액션을 보여준다. 코난의 여자아이 버전을 만들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미자는 산에서 자란 아이다. 옥자는 동물인데 사람 같은 면이 있고, 미자는 사람인데 동물다운 면이 있다. 미자는 어떤 상황에 뛰어들면 짐승처럼 돌진할 수 있고, 대기업도 이 아이를 멈출 수 없을 것 같은 이미지와 느낌을 주고 싶었다. 나의 이런 컨셉으로 인해 안서현양이 고생을 많이 했다. (웃음)
-배우 제이크 질렌홀, 틸다 스윈튼 등과 시나리오작가 존 론슨과 작업했다.
=존 론슨이 영국 작가인데 <프랭크>(2014)처럼 웃기면서도 슬픈 블랙 유머의 작품을 잘 만든다. 내가 쓴 한국어 시나리오 초고에 그가 제이크와 틸다의 캐릭터를 구축했다. 두 사람의 그 많은 대사가 존 론슨의 손끝에서 나왔다.
-<괴물>에 이어 <옥자>에서도 약자끼리의 연대를 그리고 있다.
=<괴물>에는 약자의 연대가 있었다. 약자끼리 더 약자인 소녀 고아성을 구하려 했다. <옥자>는 다르다. 그 중심에 옥자라는 생명체가 있다. 옥자를 보는 데 따라 3가지 그룹이 있다. 미자에게는 옥자가 가족이다. 동생이자 딸이기도 하다. 자신이 옥자 엄마라 생각하는 대목이 첫 시나리오에 있었다. 또 옥자를 제품(product)으로 보는 이들이 있다. 또 동물보호단체는 자신의 이상, 이데올로기로 옥자를 본다. 신성하게 생각한다. 옥자를 두고 이 세 그룹이 충돌하는 이야기다.
-강제로 옥자를 교접(메이팅)하는 장면이 충격적이었다.
=영화에서는 나온 적이 없지만 축산 관련 다큐멘터리를 보면 많이 나온다. 동물이라고 늘 하고 싶은 건 아니다. 그런데 막 교배를 시킨다. 제작팀에서 실제 수컷과 암컷을 인위적으로 교접시키는 모습을 봤는데, 암컷이 격렬하게 거부하더란다. 그 과정이 너무 끔찍해서 울었다고 하더라. 그런데 며칠 후 다른 돼지와는 교감을 하더란다. 동물에게도 감정이 있는데 철저히 인간의 요구에 의해 하게 만든 거다. 끔찍한 폭력이다.
-그런 장면들은 넷플릭스와의 작업 때 민감하게 작용했을 수도 있다.
=이 영화를 왜 넷플릭스와 했는지 넓게 보면 일단 한국 투자사들은 접촉하지 않았다. 500억원이 넘어가는 부담스러운 예산이잖나. <옥자>를 한국에서 투자받게 되면 내 동료들의 영화 수십편이 ‘스톱’된다. <설국열차>(2013) 때 후배 영화인에게 ‘이런 대작은 제발 외국에서 투자 받으라’는 말을 들었다. 물론 농담으로 했겠지만. 그런데 미국에서도 투자 과정이 쉽지 않았다. 폴 토머스 앤더슨 같은 감독들과 일하는 진취적인 회사들은 <옥자> 시나리오를 좋아했지만 예산 이야기를 들으면 버거워했다. 전통적인 대형 스튜디오들은 돈은 충분한데 시나리오를 불편해했다. ‘이 영화의 스토리에 <E.T.>처럼 아름다운 구석이 있는데 아예 그런 영화로 만들자’고 하거나. 이런 두 가지 양상 속에서 갈 곳을 잃고 방황하던 차에 넷플릭스가 100% 서포트 제안을 해왔다.
-넷플릭스의 간섭이 전혀 없었나.
=글자 하나 바꾸란 요구가 없었다. 피가 철철 나고 욕설이 난무해도 괜찮았다. 이런 예산의 영화가 100% 감독의 비전을 보장하는 일은 드물다. 아직 기존 극장산업과 디지털 스트리밍 배급 형태 사이에 여러 논란이 있지만 넷플릭스가 끝까지 비전을 바꾸지 않고 서포트해줘서 크리에이터로서는 긍정적인 기회였다. 이번에 노아 바움백 감독도 넷플릭스와 작업했고, 토드 헤인즈 감독도 또 다른 스트리밍 업체인 아마존과 작업했는데 긍정적인 케이스라고 본다. 만약 넷플릭스의 이런 방침이 아니었다면 <옥자>는 지금과 다르게 이상한 영화가 됐을 수도 있다. 미자가 도살장에서 축산업의 현실을 목도하는 대신, 달콤한 노래를 부른다거나.
-넷플릭스 자체 제작 극장 상영 논란에 대해, 경쟁부문 심사위원장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이 개막 첫날 “극장에서 상영하지 않는 (넷플릭스) 영화는 황금종려상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했다.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이 어떤 말을 해도 좋다. 그가 내 영화를 본다는 것 자체가 흥분된다. (웃음) 그의 영화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다. 이후 기자회견에서 밝힌 말을 번복, 무마하는 얘기를 했는데 심사위원장이라는 위치의 부담감 때문에 그런 게 아닐까. 굳이 안 그래도 되는데 왜 그랬을까 싶다. 심사위원장으로서 나나 (<옥자>와 함께 넷플릭스 작품으로 경쟁부문에 오른) 노아 바움백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기보다 극장 문화의 소중함을 강조하고 싶었던 거라 생각한다.
-제목을 ‘옥자’라고 한 이유는.
=<아수라> 김성수 감독님이 ‘봉 감독 다음 작품이 뭐야?’라고 하기에 말했더니, “어머님이 ‘옥자’인데” 하시더라. (웃음) 옛날에는 자자 돌림이 많았다. 일제강점기 시절의 잔재이기도 하고. 같은 이름을 가진 분들에게는 죄송하지만 가장 촌스러운 이름을 붙이고 싶었다. 손녀딸마저 미자인데, 극중에서 미자의 할아버지인 변희봉 선생님이 붙인 이름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런 이름을 가진 동물이 뉴욕 맨해튼에 본사를 둔 다국적 기업의 동물이라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나는 영화를 찍을 때마다 그렇게 안 어울리는 것의 조합을 좋아한다.
-<옥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영화를 찍기 전 프로듀서와 함께 미국 콜로라도에 있는 거대한 공장형 도살장에 간 적이 있다. 잠실 주경기장보다 더 큰 데서 평생 1m도 안 되는 쇠틀 속에서 살다가 하루에 수천, 수만 마리의 가축들이 죽어나가더라. 특히 동물이 분해되는 과정이 굉장히 충격적이었다. 그걸 본 뒤 서울로 돌아와 한달 반 정도는 고기를 못 먹었다. 일반 공장은 제품의 요소들이 ‘조립’되는 과정이라면 이건 완성된 생명체가 하나하나 ‘분해’되는 과정이었다. 오랜 기간에 걸쳐 인류가 고기를 먹었지만 자본주의 이전에는 필요한 만큼 먹었고, 동물들도 자연스러운 삶을 살았다. 지금은 애초부터 먹기 위해 배치되고 키워진다. 인간의 원초적인 생존을 위해서가 아니라 돈을 벌기 위해서 먹는 행위에 대한 비판을 담고자 했다.
옥자, 어떤 캐릭터일까
봉준호 감독은 옥자를 덩치는 큰데 내성적인 동물로 설정했다. 돼지와 하마 사진 수십장과 미국 플로리다 마이애미에 있는 순하기로 유명한 ‘매너티’라는 동물의 얼굴을 합쳤다. 이미지는 <괴물>을 작업한 크리처 디자이너 장희철의 손끝에서 탄생했다. 옥자의 감정이 표현되는 목소리는 배우 이정은이 맡았다. 나머지 30% 정도는 뉴질랜드에 있는 돼지 소리를 따서 만들었다. 봉준호 감독은 “(이정은이) 너무 깊게 몰입을 해서 미안하더라. ‘감독님 제가 어제 하루 종일 돼지 다큐멘터리를 봤어요.’ 이러면서. (웃음) 돼지 목소리가 숨을 들이마시면서 해야 해서 무척 힘들었는데 정말 잘해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