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보르헤스의 소설 <원형의 폐허들>의 마지막 문장을 떠올려본다. “안도감과 함께, 치욕감과 함께, 두려움과 함께 그는 자신 또한 자신의 아들처럼 다른 사람에 의해 꿈꾸어진 하나의 환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른바 가상현실을 무대로 삼은, 지난 세기말의 숱한 영화들이 사로잡혔던 강박관념이 있다면 바로 위와 같은 보르헤스적인 환상이었으리라. 그러나 이미 <공각기동대>의 감독 오시이 마모루는 1985년에 발표된 애니메이션 <천사의 알>에서 이러한 보르헤스적 환상을 심원한 사색이 깃들인 영상 위로 빼어나게 옮겨놓았다. <천사의 알>에서 소녀와 동행하던 남자는 “너도… 나도… 몇십 년 전에 사라진 사람들의 기억일 따름”이라고 중얼거린다. 그로부터 10년 뒤 오시이는 <천사의 알>에 대한 사이버네틱 업그레이드 버전 <공각기동대>를 통해 지난 세기말의 가상현실영화들에 또 하나의 강박관념을 추가하였다.
시로 마사무네의 만화를 원작으로 한 <공각기동대>는 분명 우리에게 늦게 도착한 영화지만- 물론 이미 많은 사람들이 영화제나 시중에서 불법으로 거래되는 비디오 및 VCD를 통해서 이 영화를 감상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전혀 낡아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만일 지난해 초에 개봉된 <아바론>을 본 이들이라면 이 꼼꼼한 주석을 바탕으로 다시 한번 <공각기동대>의 세계로 되돌아가 보는 것도 흥미진진한 일일 것이다.
오시이가 <아바론>에서 다루었던 것은 현실의 유무나 가상과 현실 사이의 위계가 아니라 사실 실존의 문제였다는 점을 재차 상기할 필요가 있겠다. “어쩌면 자신은 훨씬 이전에 죽었고, 지금의 자신은 전뇌와 의체로 구성된 모의인격인 게 아닐까. 아니 무릇 처음부터 나란 건 존재하지 않았던 게 아닐까.” 이렇게 말하는 <공각기동대>의 주인공 쿠사나기는 마치 <천사의 알>의 남자를 그대로 옮겨온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공각기동대>가 데카르트적 철학의 제일원리,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에 대한 도전적인 물음을 제기함으로써 이러한 원리의 수정을 고려하게끔 만드는 영화라고 말하는 건 언뜻 매력적으로 보일지는 모르나 별로 그럴듯해 보이진 않는다. 오히려 오시이의 관심은 데카르트적인 전제를 (말 그대로) 고스란히 받아들이되, 데카르트가 제기하지 않은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을 덧붙이는 데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건 다음과 같은 것이다. 나는 존재한다. 그런데 그 존재하는 ‘나’는 누구인가?
영혼(고스트)마저도 ‘광대한 네트’를 떠도는 비트로 전화되어버린 서기 2029년의 세계를 무대로 이러한 물음에 매달리는 쿠사나기 모토코는 점점 혼란에 빠져든다. 오시이의 몇몇 영화들이 꿈 속의 등장인물들, 혹은 꿈꾸어진 자들의 의식을 중심에 둔 것이었다면 <공각기동대>는 본격적으로 꿈꾸는 자의 의식을 중심에 둔 영화이다. 영화가 진화론을 끌어들이며 쿠사나기와 인형사간의 융합을 감행하는 순간이야말로 <공각기동대>에서 가장 받아들이기 힘든, 게다가 거의 종교적인- 천상에서 내려오는 천사의 모습!- 순간일 것이다. 이는 현실과 가상간의 위계를 완전히 지워버렸던 <아바론>의 결말부와 맞먹는 것이다.
확실히 <공각기동대>에서 가장 두드러진 모티브 가운데 하나는 물에 드리워진 그림자일 것이다. 광학미체를 입어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 쿠사나기가 해커를 공격할 때 물 위에 비치는 검은 그림자, 잠수중이던 쿠사나기가 물 위에 떠오를 때 수면에 비치는 영상, 그리고 물 위에 맺힌 도시건물들의 상 등등. 약간의 파문에도 쉽게 부서지고야 마는 이러한 그림자들은 결국 인간 자신은 물론이고 인간을 둘러싼 세계에 대해서도 확고한 감각을 상실한 현대를 음울하게 반영한다.
이 늦게 도착한 영화가 지금에 와서 더욱 흥미롭게 보여지는 것은 도시에 관한 묘사 때문이다. 연극적인 무대 위에서 극히 단순하게 그려진 캐릭터들이 오가던 <마로코> 같은 애니메이션과는 정반대되는 지점에서, 오시이는 실사 사진을 바탕으로 한 극사실적인 배경디자인을 선보인다. 가와이 겐지의 주제곡이 흘러나오는 가운데, 운하를 사이에 두고 늘어서 있는 도시건물들을 보여주는, 길고 몽환적인 시퀀스는 가장 유명한 예이다. 여기서 쿠사나기는 한 카페에 앉아 있는, 자신과 똑같은 모습의 여자를 보고 놀란다. 건물 유리창에서 번쩍거리는 영상들, 끊임없이 내리는 비, 여기저기 다닥다닥 붙은 간판들 등은, 2029년의 도시에 완전한 혼란의 감각을 부여함과 동시에 도시 자체를 하나의 신기루처럼 만들어버린다. 그런데 근미래의 이 도시를 점점 닮아가는, 현재 우리의 도시의 무국적적인 풍경이야말로 영화보다 더욱 쓸쓸한 풍경이다.
<공각기동대>에서 쓰는 용어들 - 아는 만큼 보인다
이번 극장상영을 통해 <공각기동대>를 처음 접하게 될 이들에게는 영화가 제법 난해하게 비칠 가능성도 있다. 영화 후반부로 갈수록 점점 주인공 쿠사나기와 인형사의 입을 통해 쏟아져나오는 말들이 버겁게 느껴질지도 모를 일이다. 가령 인형사의 다음과 같은 대사. “당신들(인간들)의 DNA도 역시 자기 보존을 위한 프로그램에 지나지 않아. 생명이란 정보의 흐름 속에서 태어난 결절점과 같은 거야. 종으로서의 생명은 유전자라는 기억 시스템을 지니며, 사람은 단지 기억에 의해 개인일 수 있지. 혹 기억이 환상의 동의어라고 해도 사람은 기억에 의해 사는 법이야. 컴퓨터의 보급이 기억의 외부화를 가능하게 했을 때 당신들은 그 의미를 더 진지하게 생각해야 했어.” 영화를 보기 전에 그 속에 등장하는 몇몇 용어들과 상황들을 미리 살펴보는 것도 감상에 조금쯤 도움이 된다.
먼저 프로젝트 2501. 이는 외무성에서 추진하던 비밀 프로젝트의 이름이다. 본디 외무성은 기업탐사, 정보 수집, 공작 등을 목표로 네트워크상에서 활동가능한 인공지능 프로그램을 개발하려던 것이었으나, 어느 순간 이 프로그램이 자의식을 얻게 되면서 상황이 난처해진다. 쿠사나기와 9과의 동료들이 쫓는 ‘인형사’는 다름 아닌 이 자의식을 얻은 프로그램을 위장하기 위해 조작되어진 명칭이다.
고스트 해킹. 컴퓨터 기술과 네트워크의 발달로 인간의 영혼마저도 데이터화되어 조작, 처리가 가능해진 2029년의 세계에서 네트워크를 이용, 타인의 의식에 침투하는 것 또한 가능한데 이는 범죄로 규정된다. 이러한 행위는 고스트 해킹이라고 불린다. 사람들의 기억 또한 언제든지 조작가능하며 자신의 기억이 조작된 것임을 깨달은 이들은 절망감에 빠지기도 한다.
다이브. 다른 조직의 시스템이나 전뇌(電腦)화된 타인의 의식에 접속하는 것을 두고 하는 말. 영화 말미에 쿠사나기는 인형사에게 ‘다이브’하고 마침내 그녀와 인형사의 의식은 하나로 융합된다.
광학미체. 자신의 몸을 다른 이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투명하게’ 만들어주는 장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