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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강형준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순간에 대한 열정
문강형준(영화평론가) 일러스트레이션 정원교 2017-04-27

얼마 전 봤던 마렌 아데 감독의 <토니 에드만>(2016)이 잊히지 않는다. 딸과 아버지가 있다. 딸은 글로벌 기업에서 컨설턴트로 일하며 부쿠레슈티에 살고, 퇴임한 교사인 아버지는 독일에서 늙은 어머니와 늙은 개를 돌본다. 어느 날 집을 찾아온 딸이 가짜로 통화하며 바쁜 척하는 모습을 본 아버지는 부쿠레슈티로 날아가 딸의 일상에 불쑥불쑥 나타난다. 이상한 틀니를 끼고, 긴 가발을 쓴 허풍쟁이인 ‘토니 에드만’이라는 이름으로. 아버지는 그렇게 딸에게 인생의 의미나 행복에 관해 뭔가를 말하려 하지만 말하지 못한다. 딸은 아버지가 당황스럽고 귀찮지만, 동시에 거짓 옷으로 겹겹이 둘러싸인 자기 인생을 되돌아보며 문득문득 슬퍼진다.

늙은 개가 죽었을 때 아버지는 딸에게 떠나고, 늙은 할머니가 죽자 딸이 아버지를 찾아온다. 장례식장에서 아버지는 말한다. “문제는, 항상 일들을 끝마치는 것뿐이었어. 그러다 인생은 그냥 지나가지.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가끔씩 앉아서 기억을 떠올리는 거야. 하지만 그런 건 나중에 깨닫는 수밖에 없어. 바로 그 순간에는 불가능해.” 이 말을 듣고 딸은 처음으로 아버지의 주머니에서 틀니를 꺼내 입에 끼우고 우스꽝스런 표정을 짓는다. 아버지가 카메라를 가지러 간 사이 딸은 틀니를 빼고 정원에 혼자 남아 먼 곳을 쳐다본다. 그 표정은 여전히 밝지 않다. 영화의 이 마지막 장면은 인생의 의미에 대한 딸의 ‘깨달음’이 아직 불가능함을, ‘깨달음’은 언제나 나중에 올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딸은 언젠가 이 모든 시간이 지난 후에 틀니를 끼고 가발을 쓴 아버지가 자신을 당황스럽게 만들었던 그 순간을 기억할 것이다. 아버지는 아직 오지 않은, 언제나 미래에 올 수밖에 없는, 그 행복의 ‘순간’들을 만들어준 것이다. 발터 베냐민은 <역사철학테제>에서 “과거는 구원을 기다리고 있는 어떤 은밀한 목록을 함께 간직하고 있다”라고 말한다. 과거는 이미 지나간 것이 결코 아니며, 어떤 순간에 현재 속으로 난입해 행복의 이미지를 만들고, 그것이 다시 미래를 규정하는 힘이 된다. 과거의 힘, 순간의 힘은 사라지지 않는다. <토니 에드만>의 아버지와 달리 <싱글라이더>(2016)에서 노동에 치어 살아야만 했던 남편/아버지는 현재의 아내와 아들이 미래에 기억해줄 행복의 순간들을 남기지 못했다. 그가 유령이 되어야만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가족에게 행복의 순간을 주지 못한 한국의 아버지는 죽은 후에 자기 없이 행복한 가족을 보며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다. 모든 세대에 걸쳐 노동을 착취하고 강요하고 신성화하는 한국 사회가 망가뜨리는 것은 일상이 아니다. 그것은 순간을 없앰으로써 동시에 과거와 현재와 미래, 곧 시간 전체를 망가뜨린다. 모든 것을 숫자로 환원하는 사회에서 아무것도 아닌 순간을 간직하는 일은 불가능하게 여겨질 만큼 힘들지만 그것 없이는 시간도, 구원도, 역사도 없다. 순간에 대한 열정, 그것은 사랑과 영화와 정치와 문학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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