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트 차림에 말끔한 커트 머리. 3선 도전 서울시장 변종구의 ‘규격’에 맞게 최민식은 체중을 감량하고, 현란한 화술과 마스크를 장착했다. 권력의 꼭대기에 오르기 위해 발톱을 숨긴 채 가족마저 이용하는 파렴치한. 권력에 도취한 채 질주하는 그의 이름은 ‘정치인’이다. 거대한 도시 서울의 심장을 흐리게 만드는 악인 변종구. 시시각각 변하는 그의 얼굴은 최민식의 연기 구력을 바탕으로, 영화가 아닌 현실의 기시감을 더해준다.
-이순신 장군(<명량>), 조선의 명포수 천만덕(<대호>)처럼 최근 맡은 배역이 우직하게 신념을 지키는 인물이었다면, <특별시민>의 변종구는 신념 따위는 저버릴 카멜레온 같은 인물이다.
=말에 집중했다. 정치를 하는 사람만큼 말에 의존하고, 말로 시작해서 말로 끝나는 사람이 있을까 싶다. 자기 표피를 변화시켜 방어하고 공격하는 <동물의 왕국>의 동물이 연상되는, 임기응변에 강한 사람. 현란한 언어의 연금술사랄까. 이 사람을 만나면 이 말, 저 사람을 만나면 다른 말을 구사한다. 어느 직업군보다 말의 일관성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정치인은 현실에서는 판타지에 가깝다. 참 씁쓸한 일이다.
-소재와 장르의 특성상 현실과의 접점이 크게 느껴지는 작품이다. 어떤 점에 끌렸나.
=현실에 대한 비판이 이 영화를 하는 계기 중 하나였지만 그렇다고 현실에 대한 지적을 하고자 한 건 아니다. 정치인을 다룬 드라마, 영화들을 보면서 좀 본격적인 정치영화를 한번 해보고 싶었다. 이런 장르를 동경해왔다고 할까, 그런 차에 이 시나리오를 만났다. 정치인 하면 떼려야 뗄 수 없는 게 선거다. 그걸 본격적으로 다루는 영화라는 점에 특히 끌렸다.
-배우의 구력이 한층 더 느껴지는 작업이다. 변종구가 출마 선언을 할 때는 변종구와 연기를 하는 변종구가 겹치면서 여러 층위의 얼굴이 형성된다.
= 다양한 상황에 노출되고 화학반응을 보여야 할 때는 달리 할 게 없다. 그 상황에 가장 밀접하게 반응하면 된다. TV 토론 장면 때도 무대에 나가기 전에는 양진주(라미란)한테 가서 ‘우리 살살 합시다’ 하고서 온에어 불 들어오면 180도 달라진다. 공부할 때 중요 부분에 밑줄 긋듯 그런 장면들을 염두에 두고 있다가, 그다음 스타트하면 그야말로 로큰롤 연주하듯이 가는 거다.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변모하는 변종구가 다양한 인물들과 대응하는 동안, 그의 캐릭터가 완성된다. 곽도원, 문소리, 라미란 등 상대배우들과의 합에서 오는 묘미가 크다.
=배우와 배우 사이의 묘한 줄타기. 그 공기의 흐름이 이 작품의 재미다. 대사 한마디로 뜻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어서 한시도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사극은 정해진 틀에 나를 가두는 것이라면 이건 상황에 대처해야 한다. 배우가 있을 법한 것들을 끌어와 우리가 한번 소리를 내본다. 상대역에게 말을 해보는 거다. 대본이 있지만 즉석에서 많이 보강을 했다. 몇번 되받아치면서 어색한 걸 고치고, 좋은 것이 생각나면 또 그걸 받아서 하고. 이런 과정을 거쳤다. 그렇게 난상토론하듯 막 던지다보니 편집에서 잘린 부분도 많다. 이런 작업이 참 재밌더라.
-현장에서 후배배우들과의 합을 통해 오는 즐거움과 긴장감도 컸을 것 같다.
=점점 나이를 먹어가고 그에 맞는 위치를 느껴서 사명감만이 커지는 건 아니다. 나는 그냥 내 일을 열심히 할 뿐이다. 연식이 됐다고 다 잘하는 것도 아니고, 경험이 없다고 모든 게 서툰 것은 아니다. 배우들은 서로를 보며 배운다. 무조건 ‘팔로 미’는 안 된다. 이번 작업을 하면서 그런 ‘앙상블’이 주는 즐거움이 컸다. 후배배우들을 보면 사고의 자유와 대담성에서 우리 때와 비교가 안 된다. 그러니 더 표현이 다양해질 수 있다.
-<특별시민>이 필모그래피에서 가지는 의미는 무엇인가.
=변종구가 권력에 욕심을 내듯 나 역시 작품에, 캐릭터에 대한 욕심이 강해진다. 전에는 이 작품은 괜찮을까, 이 캐릭터는 내가 할 수 있을까 했다면 이젠 뭐든 하고 싶다. 접하지 않았던 장르나 인물에 대한 호기심도 커진다. 최근 정지우 감독과 <침묵>(거물급 남성 임태산의 약혼녀가 살해당하고, 그 사건 용의자로 임태산의 딸이 지목되면서 벌어지는 범죄 스릴러)을 촬영했다. <해피엔드>(1999) 이후 십수년 만의 만남이었는데, 참 즐겁게 찍었다. 앞으로는 뭐든 가리지 않고 하고 싶다. 가령 <찰리와 초콜릿 공장>(2005) 같은 판타지 장르에 등장하는 상징적인 인물도 꼭 한번 해보고 싶은 역할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