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장에서 홀로 살아돌아온 톰(마이클 파스빈더)은 무인도 야누스의 등대지기에 자원한다. 세상과 격리된 채 고독을 감내하고자 해서이다. 근처 섬에서 만난 맑은 영혼의 이자벨(알리시아 비칸데르)이 성큼 다가와 톰의 내면에 자리잡은 어둠을 차츰 몰아낸다. 야누스에서 시작된 둘만의 신혼생활은 행복했지만, 두 차례 유산을 경험한 이자벨은 점차 고립된 섬 생활을 버거워한다. 어느 날 죽은 남자와 갓난아이가 탄 보트가 떠내려온다, 상부에 보고해야 하는 톰은 자신들의 아이로 키우자는 아내의 간청을 운명으로 받아들인다. 아이의 친모 한나(레이첼 바이스)의 존재를 알게 된 톰은 아내의 행복과 타인의 고통 사이에서 죄책감에 빠져든다.
<파도가 지나간 자리>를 한국어 제목으로 삼았지만, 영화의 분위기는 원작인 M. L. 스테드먼의 장편소설 <바다 사이 등대>에 더 어울린다. 한없이 거칠고 적막한 바다의 풍광은 전쟁 후 상실감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허감을 시각화했다. 예기치 않은 비극을 어리석을 만치 홀로 감내하는 남자의 헌신은 등대의 묵묵한 운명과 닮았다. 연출과 각본은 <블루 발렌타인> <플레이스 비욘드 더 파인즈>를 통해 사랑과 순수의 종언을 처연한 사실주의로 그려낸 데릭 시언프랜스가 맡았다. 영화의 전반부가 고립과 환희의 정서를 바다와 빛의 메타포로 재현해내고 있다면, 후반부는 비밀과 죄의식 사이에서 방황하는 자들의 마음의 부서짐을 다룬다. 센티멘털리즘과 신파성을 일부 감내한다면, 감정의 기만 없이 진심을 파고드는 드물게 만나는 정통 멜로드라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