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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영화] 조기숙의 <바베트의 만찬> 음식은 종교보다 강하다

감독 가브리엘 액셀 / 출연 스테판 오드랑, 보딜 크예르, 브리기테 페더슈필 / 제작연도 1987년

재미삼아 페이스북에 돌아다니는 ‘나를 설명하는 문장’이라는 검사를 해봤다. 그 첫 번째 특징으로 ‘멋진 요리사’가 나왔다. 결과를 본 페친들이 의외라며 놀려댄다. 정치학을 공부하고 정치권에서 온갖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는 내게 여전사는 몰라도 요리사는 아니라고 판단했던 것 같다.

피곤에 지쳐 영화 한편 보고 싶을 때 내가 주저 없이 택하는 건 요리영화다. 음식은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힐링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일본 시골의 소박한 음식을 보여준 <리틀 포레스트: 여름과 가을> <리틀 포레스트2: 겨울과 봄>은 물론 <남극의 쉐프> <아메리칸 셰프> <식객> <줄리 & 줄리아> <라따뚜이> <로맨틱 레시피> 등 요리를 소재로 한 영화는 한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다. 요리란 내가 힘들고 지쳤을 때 열정과 에너지, 삶의 의욕을 불어넣어주는 원천이다. 하지만 이제껏 어떤 영화도 <바베트의 만찬>(Babette’s Feast)을 봤을 때의 충격을 뛰어넘지는 못한다. 내가 요리에 관심이 많다는 걸 처음으로 깨닫게 해준 영화이기도 하지만, 음식이 종교보다 강하며, 곳간에서 인심 난다는 정치학적(?) 교훈을 던져준 영화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덴마크의 시골 해변가 마을에 개신교의 한 종파를 창시한 목사의 아름다운 두 딸이 결혼도 마다하고 할머니가 되기까지 봉사와 신앙에만 헌신하는 금욕적인 삶을 살아간다. 어느 폭풍우가 몰아치는 날 밤 이들에게 바베트라는 여성이 지인의 소개장을 들고 찾아와 함께 생활하게 된다. 바베트는 프랑스 혁명에서 남편과 아들을 잃고 간신히 목숨만 건져 도피한 고급 식당의 요리사. 자매가 먹는 음식은 즐거움을 배제한, 그야말로 목숨을 연명하는 수단에 불과했다. 젊은이들이 떠난 회색빛 마을의 이웃인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돈독한 신앙 생활에도 불구하고 서로 뒤에서 험담하고 할퀴어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바베트가 사둔 1만프랑짜리 복권이 당첨된다. 바베트는 12명의 마을 사람들에게 프랑스식 만찬을 대접하겠다고 한다. 자매는 큰돈이 생겼으니 바베트가 마을을 떠날 것이라 생각해 그녀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기로 한다. 바베트는 화려한 은식기와 도자기, 메추라기와 바다거북 등 온갖 식재료와 와인을 장만하는 데 그 돈을 아낌없이 쓴다. 드디어 만찬이 시작되자 이렇게 사치스러운 음식을 먹으면 지옥불에 던져질 것이라며 자매는 괴로워한다. 마을 주민들을 시험에 들게 한 자신들의 결정을 후회하며 사과한다. 마을 사람들은 식사 중 음식에 대한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음으로써 이 시험을 이겨내기로 결심한다.

아름다운 음식이 하나씩 나올 때마다 노인들은 조심스럽게 맛을 본다. 어느새 경직된 얼굴이 풀어지면서 입가엔 미소가 번지고 환희와 행복한 표정이 퍼져나간다. 정찬이 끝나고 바닷가에 모인 마을 사람들은 강강수월래를 하듯 손을 맞잡고 만세를 부르며 할렐루야를 외친다.

바베트가 돈을 다 썼으며 프랑스로도 돌아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 자매는 “당신의 남은 인생은 가난할 것”이라며 걱정하는데, 바베트는 “예술가는 가난하지 않다”고 답한다. 자매는 “당신의 예술은 하늘의 천사를 기쁘게 할 것” 이라고 찬사를 보낸다.

박사과정을 시작한 지 일년 만에 임신 사실을 알았고 아기가 태어나기 전에 자격시험을 치르기로 했다. 추수감사절 연휴가 끝나는 날부터 시험이 시작 되는데 마음이 조급했다. 남편은 총각 시절 동료를 불러 연휴에 식사 대접을 하고 싶어 했다. 나는 시험공부 대신 이틀간 만찬을 차리면서 힘들기보다는 즐거웠던 기억이 의아했는데, 이 영화를 보고서야 이유를 깨달았다.

음식은 먹는 사람보다 대접하는 사람에게 더 큰 행복감을 준다는 사실을….

조기숙 이화여자대학교 국제대학원 교수, 공공외교센터 소장. 참여정부 당시 홍보수석비서관. 저서 <포퓰리즘의 정치학>, 공저 <노무현의 민주주의> <한국형 공공외교평가모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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