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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장 그 감독, 이상하다
2002-04-06

김지운, 이상한 감독 박찬욱을 만나 <복수는 나의 것>을 논하다

한살 터울의 두 감독, 박찬욱과 김지운은 어딘지 닮았다. 체내에 흐르는 영화광의 피가 잡아당겨서 그런지 시사회나 회고전을 비롯해 영화계에서 벌어지는 각종 행사에서 둘이 함께 등장하는 장면을 자주 목격할 수 있다. 류승완 감독이 “우정의 가교”였다고 말하는 두 감독은 송강호가 주연한 영화 <반칙왕>과 <공동경비구역 JSA>로 21세기 첫해의 스타 감독으로 떠오른 공통분모를 갖고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영화세계가 겹치는 교집합은 그간 만든 영화보다 그간 본 영화쪽에 훨씬 폭넓게 자리잡고 있을 것이다. 두 감독이 만나 <복수는 나의 것>에 대해 이야기하면 근사할 것이라는 발상은 자연스런 일이었다. 진정 서로의 세계를 정확히 이해하고 평가해줄 수 있는 두 감독의 이야기는 엿듣는 즐거움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해보였다. 김지운은 <복수는 나의 것>에 대해 “나라면 두려워서 코미디로 피해가는 부분을 과감히 치고나간 영화”라며 박찬욱을 “늘 나보다 한두발 앞서 나가는 감독”이라 말한다. 송강호에게 코믹연기가 아닌 전혀 다른 이미지를 뽑아낸 것만 봐도 김지운의 이런 말은 쉽게 이해가 된다.

그러므로 두 감독의 대화는 서로에게 장풍을 날리는 내공 겨루기가 아니다. 같은 길을 걷는 동료로서 김지운은 <복수는 나의 것>에서 남들이 못 보는 면을 샅샅이 뜯어본다. 때로 정말 날카로운 비판의 날을 세우고 때로 아무도 눈치 못 채는 연출자의 진정한 성과를 추어올리면서 대화는 훌쩍 3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일단 글을 썼다 하면 기자, 평론가들이 펜을 꺾고 싶게 만드는 두 감독은 대담도 정말 멋지게 해치우려는 듯 보였다. 두 사람의 대화는 어떤 담화를 펼쳐야 근사하다고 소문날 것인가에 대한 은근한 탐색전으로 시작했다.

김지운: 요즘 뭐 하고 사는지.

박찬욱: 개봉 전 막바지 인터뷰하면서 한동안 접하지 못했던 책 읽고 영화 보고 산다. <복수는 나의 것>이 메가히트가 되면 인터뷰 요청이 다시 쇄도하겠지만. (웃음) 인터뷰까지는 참는데 사진 포즈 취하는 게 고역이다.

김지운: 모 잡지에 실린 박 감독 사진 보니까 전날 밤 술 많이 했는지 눈이, 거의 한번 빼서 술에다 담갔다 다시 끼운 안구 같더라.

박찬욱: 배우들과 매일같이 술 많이 했다. 인터뷰가 재미있으면 인터뷰어와도 좀 마시고. 요즘 본 영화 중에는 DVD로 본 <존 말코비치 되기>가 최고다. 실망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기막히더라. 서플먼트는 또 어떻고. 조수석에 앉은 기자가 질문하며 캠코더로 찍고 감독이 운전하면서 대답하는데, 상투적인 일련의 질문에 줄곧 메슥거리는 표정을 짓더니 아예 차를 세우고 마구 토하는 게 아닌가! 기자들한테 들려주고 싶어서 연출한 조크겠지만.

김지운: 나도 얼마 전 잉마르 베리만과 그의 오랜 동료였던 요셉슨이라는 사람의 대담을 봤는데 어찌나 재밌던지. 압권은 ‘평론가 폭행사건’에 관한 수다였는데, 베리만의 평론가에 대한 증오심이 <복수는 나의 것> 수준이더라. 내가 폭력을 가했지만 언어폭력도 신체에 가해진 폭력 이상의 상처가 된다면서. “우발적이었나?” 물으니 “아니, 철저히 준비했다”고 하고 “고인이 됐지만 그놈은 정말 죽일 놈이었다”고 못 박았다. (웃음) 당시 평론가협회에서는 회의를 하고 난리였던 모양이다. 베리만은 82살, 요셉슨은 77살인데 그 연배의 두 대가가 만나서 죽음이나 예술에 대한 이야기는 아주 잠깐 하고 여자이야기만 30분 이상 낄낄거리면서 했다. 누군가 “두분이 만나면 자주 이러냐?”고 물으니까 “사실 그것밖에 할 게 없다. 우리 둘의 명랑함은 계속될 거다”고 말했다. 그 염세적인 ‘암울쟁이’가 말이다. 그 인터뷰를 보다 박 감독에 대해서도 묻고 싶은 질문이 떠올랐다. 잉마르 베리만이 아들한테 “내가 네게 나쁜 아버지라는 걸 인정한다”고 하니까 아들이 “나쁜 아버지조차 못 된다”고 빽 소리를 지르던데 당신은 좋은 아빠인가?

박찬욱: 많은 감독이 결혼생활을 행복하게 유지하지 못한다. 집에 오래 못 있고, 있어도 머리가 딴 데 가 있는 직업상 결함 탓이다. 그래서 “이건 집중력의 문제다” 생각하고 집에 있을 때만큼은 집중하자고 마음먹었다. 아무래도 딸내미라(서우) 아빠를 따른다. 얼마 전엔 방학숙제한다고 해서 우리 둘이 조그만 동화를 하나 만들었다.

김지운: 박찬욱 감독 딸 서우는 내가 만나본 여자 중에 최고로 매력적이고 도도한 숙녀다. 그 카리스마는 실로 압도적이다. 영화야 물론 내가 한참 더 따라가야 하지만(박찬욱, 쿡 웃다), 무엇보다 부러웠던 건 영화 속에 아내와 딸을 향한 사랑이 보이는 지점이었다.

박찬욱: 서우는 자기 아빠가 감독이라는 사실, <공동경비구역 JSA > 감독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는 걸 무척 두려워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엄마나 좌중의 누가 그 얘기를 꺼내면 그러지 말라고 아빠 싫어한다고 몸을 날려서 막곤 한다.

김지운: <복수는 나의 것>에 나오는 보배는 전형적이지 않으면서도 독특한 리얼리티가 살아 있는 인물이다. 감독의 딸에 대한 감정이 들어간 부분일 거다.

박찬욱: 시나리오는 96년에 썼지만, 아빠가 된 뒤 만들기 잘 했다는 생각도 들더라. 특히 고만한 아이를 둔 내 또래의 아빠들이 많이 이야기하는 것이, 신하균이 누나의 자살을 알게 될 때 보배가 <보노보노>를 보는 장면이다. 그 장면에서 치마 들추는 장난하고 하균이 다리 포개면 보배가 올라타서 턱을 괴는 동작의 연출은 ‘애 아버지’가 만든 영화다운 순간이다. 내게 애가 없었다면 그저 건조하게 찍었겠지.

김지운: 6년 전 시나리오와 지금 영화가 달라진 점은 무엇인가?

박찬욱: 범죄를 부추기기만 하는 작은 역이었던 영미의 비중이 캐스팅 이후 야금야금 커졌다. 그건 전적으로 배두나 책임이다.

김지운: 책임이라니?

박찬욱: 귀여우니까. 돈도 많이 줬으니까 본전 생각도 나고. (웃음) 엔딩에 테러리스트가 등장하는 것도 뒤늦게 들어갔다. 그건 전적으로 봉준호 감독 책임이다. 고민하고 있는데 봉 감독이 나서서 “이렇게 해야 된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그 술자리에서 송강호도 ‘전향’했다. 혹자는 남의 영화라서 그렇게 용감했을 거라고 하더라.

김지운: 어쨌거나 <복수는 나의 것>을 전작 연장선상에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휴머니즘과 웃음과 감동의 <…JSA >에서 180도 바뀌었다는 식으로. 국내외를 막론하고 특이한 행보 아닐까.

박: 뭐, <배트맨> 만들던 사람이 <에드 우드> 찍는 거나, <위험한 관계> 만든 감독이 <>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 만든 거나, <크라잉 게임> 감독이 <뱀파이어와의 인터뷰> 찍은 거나. 나는 날 작가로 분류하는 것이 적당치 않다고 인터뷰에서 말한다. 내 영화에 감독의 흔적이나 일관성이 없었으면 좋겠고 심지어 한 사람이 만든 영화 같지 않았으면 좋겠다.

▶ 제 2장 그 영화, 이상하다

▶ 제 3장 그 배우, 더 이상하다

▶ 제 4장 리얼리즘, 그것도 이상하다

▶ 제 5장 이상해서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