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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토리얼_주성철 편집장] 제목 바꾸지 맙시다
주성철 2017-02-10

<핵소 고지>에는 ‘삭제’와 ‘편집’이 없다, 는 게 뉴스가 되는 세상이다. 지난호 국내뉴스로도 전했듯이, <얼라이드>를 비롯하여 최근 일부 수입영화들의 가위질 논란 탓인지 오리지널 본편 그대로 개봉하는 것도 화제가 되는 것이다. 그동안 우리 사회에 당연하지 못한 일들이 얼마나 횡행했으면, 어쩌다가 당연한 것이 당연하다는 이유로 칭찬받는 세상이 되었단 말인가. 괜히 나도 나라는 이유로, 너도 너라는 이유로 칭찬받고 칭찬해주고 싶은 것이다. 실제로 <핵소 고지>에는 전장에서의 모르핀 투약 장면이나 심각하게 훼손되는 육체 등 다소 엄격한 심의기준이 적용될 만한 장면들이 있었으나, 이에 15세 관람가 등급을 결정한 영상물등급위원회쪽은 “심의 결과 영상의 표현에 있어 폭력적인 부분이 정당화되거나 미화되지 않게 그려졌다. 그 밖에 대사와 공포 부분은 사회 통념상 용인되는 수준”이라고 밝혔다. 어쨌건 호불호를 넘어 ‘감독 멜 깁슨’이 언제나 추구해왔던 거의 집착에 가까울 만큼의 사실적인 묘사를 그대로 감상할 수 있게 된 것은 무척 다행이다.

이러한 가위질의 경우 일체 타협의 가능성을 논할 수 없는, 절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한다면 거기에 더해 ‘제목’ 작명법에 대해서도 좀 할 말이 많다. 원칙적으로는 <핵소 고지>나 <라라랜드>처럼 원어 제목을 그대로 쓰거나 번역하든지, 아니면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처럼 제목이 길더라도 원어 그대로 살려서 쓰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최근 <어라이벌>(Arrival)의 경우 원제가 딱히 번역이 어렵거나 그대로 쓰는 게 이상하지도 않고 제목 자체도 길지 않은데 <컨택트>라는 전혀 새로운 제목이 붙었다. 이처럼 수입·배급사에서 보다 이해하기 쉽고 어울리는 제목을 찾아 의역하는 경우도 종종 있는데, 어쨌거나 원칙적으로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는 리메이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무방비도시> <네 멋대로 해라>처럼 원래 유명한 영화 제목을 그대로 가져다 쓰는 것도 문제다. <컨택트>는 <얼라이드>의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이 오래전에 만든, <그래비티>(2013)의 제작자 린다 옵스트와 배우 매튜 매커너헤이가 처음으로 ‘컨택’했던 <콘택트>(1997)와도 충돌한다. 사실 이럴 때 직업적으로 가장 힘든 점 중에는 옛날 영화, 요즘 영화 뒤섞여 검색하기 불편하다는 것도 있다.

그나마 관객 사이에서 용인되어온 의역 수준은, 바로 그 <컨택트>의 드니 빌뇌브 감독을 한국에 처음 알린 <그을린 사랑>(2010)이라는 제목일 것이다. 원제는 화재, 전란이라는 뜻의 불어 <Incendies>이고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최초 상영될 때도 <그을린>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됐는데, 나중에 극장 개봉 당시 ‘사랑’이라는 말이 덧붙여졌다. 그 고민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최소한 우디 앨런의 <비키 크리스티나 바르셀로나>(2008)가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처럼 20자평스럽게 탈바꿈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그런 고민은 영화 잡지도 마찬가지다. 국내 개봉 제목이 정해지지 않은 시점에서 해외영화제 초청작 소개나 기대작 소개를 할 때, 기자 스스로 ‘작명’해야 하는 운명에 처하기 때문이다. 미개봉, 미출시작에 대해 써야 할 때도 그렇다. 그래서 오래전 모 영화 잡지에서 스탠리 큐브릭 추천작으로 <이상한사랑 박사>를 소개하는 것을 보면서 기자가 참 대단한 원칙주의자구나, 하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바로 <닥터 스트레인지러브>(1964)였다. 아무튼 세상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제목 바꾸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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