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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 <더 킹>은 현재의 정치적 현실에 대해 발언하고 있는 영화인가

한재림 감독은 <더 킹>으로 말미암아 이제 중견 감독으로서의 입지를 다질 것으로 보인다. 이전까지의 그의 영화들은 완성본보다 시나리오가 더 흥미로웠을 것으로 추측하게 만드는, 연출력이 기획력보다 못하다는 느낌을 주었다. 등장인물의 기운을 쫓아다니느라 탈진할 것 같은 인상을 주는, 한재림의 전매특허였던 핸드헬드 촬영이 특히 그런 인상을 주는 데 일조했다. <더 킹>은 좀 달랐다. 촬영을 맡은 김우형의 업적으로도 보이는데, 빠른 호흡의 서사인데도 앵글이 정갈하다. 별다른 구독점 없이 일정한 시각적 매칭으로 장면전환을 해가는 스타일의 영화에 김우형의 프레이밍 장악 능력은 딱 알맞아 보였다.

이 영화를 모니터 시사를 통해 봤다는 몇몇 감독들의 전언을 통해 나는 이 영화에 굉장한 장면들이 있다는 정보를 듣고 내심 큰 기대를 했지만 그들이 말한 장면은 극장 개봉판에 없었다. 이를테면 주인공 박태수(조인성) 일행이 동물원에 있던 말을 끌고 나와 강남 테헤란로를 질주하는 장면은, 아마도 모니터 시사 반응에 따른 것이었겠지만 극장판에서는 볼 수 없었다. 감독이자 제작자인 한재림의 판단으로 그런 수위의 묘사는 이 영화의 등장인물들에 대한 관객의 이입과 거리두기의 균형추에 맞지 않는 것이었을지 모른다. 그런 경계선 안의 묘사 수위 때문에 이 영화는 안전한 정치계몽영화의 수준에 머문다는 느낌을 준다. 검찰 상층부 내부에서 작동하는 권력 유지 메커니즘은 새로운 지식을 생산하는 정도는 아니다. 등장인물들에 대한 감독의 입장도 일관성이 없고 애매한데, 특히 조인성이 연기하는 주인공 박태수에 대한 묘사가 그러하다.

풍자를 가장한 조롱으로의 후퇴

빠른 호흡으로 박태수의 성장담을 묘사하는 초반부에서 태수는 양아치였던 아버지 밑에서 대책 없이 자라는 싸움꾼이었다가, 시끄러운 데서만 집중이 잘되는 신묘한 능력을 발휘해 학업성적이 일취월장하며 서울대 법대에 들어간 후에는, 우연히 운동권 동료 여학생을 보호하려다가 군대에 강제징집당하는 운동권 투사가 되고, 머리가 비상한 덕분인지 사법고시에도 예상치 못하게 빨리 합격한다. 박태수는 새파랗게 젊은 검사에게 굽신거리는 아버지의 모습을 본 후 공부 잘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한다. 자신의 권력 상승에의 욕망을, 검사 임용 후 한 여학생의 성폭행 사건을 담당하면서 박태수는 다시 한번 스스로 확인한다. 지적장애가 있는 피해자의 어머니를 설득해 벌금형으로 종결된 사건을 다시 기소했던 그의 일시적 정의감은 검찰 최고 권력자 한강식(정우성)의 오른팔인 선배 검사 양동철(배성우)의 회유로 금방 무너진다. 양동철이 한강식과 가해자 부모의 상호 후원관계를 암시하며 검찰 비밀 창고에 보유하고 있는 어느 여배우의 섹스 비디오를 틀어주고 나간 후 박태수는 화면 속 여배우가 자신과 관계하는 환상을 겪는다. 감독은 이걸 풍자적 톤으로 보이는 선에서 연출했다. 보기에 불편하지 않은 설정이지만 나는 이쯤해서 이 영화가 더이상 강하게 치고 나가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적당한 우연적 계기로 박태수가 고급 출세길에 오르기까지의 경로를 경쾌한 조롱조로 다루는 이 영화의 초·중반부는 보기에 무난하며 관객에게 별다른 심리적 저항선을 남겨놓지 않는다. 이건 묘사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근본적으로는 감독의 등장인물에 대한 관점의 문제다. 박태수가 우리 자신일 수도 있다는 것은 당연히 동의할 수 있는 전제지만 이 경우에는 다소 진지함이 결여되어 있다. 그다음 전개에서 조인성/박태수가 안전한 경계선을 타며 우리에게 도식적인 인생의 롤러코스터를 보여줄 것이라는 전조로서 이 영화의 초반 장면들은 작동한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마침내 박태수는 한강식이 주관하는 고급 파티에 초대받는데 그 파티가 열리는 장소는 더이상 올라갈 곳이 없는 펜트하우스다. 가장 높은 곳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는 것처럼 보이는 한강식의 캐릭터를 설명할 때 감독은 역시 다소 안전한 방법을 쓴다. 위장된 자존감을 내세우며 자리를 뜨려는 박태수에게 다짜고짜 따귀를 갈기며 대한민국 권력자의 현실을 이야기하는 한강식, 좌중의 충성을 다짐받은 후에야 나름의 풍류가로서의 제스처를 취하는 한강식, 주지육림의 미장센을 통해 강조되는 물질에의 페티시즘, 그러나 여기에는 그것들의 저류를 관통하는 결핍을 묘사할 여백이 아예 제거되어 있다.

인생이 풍류였으면 했는데 고급 월급쟁이 신세에 매달리는 것조차 감지덕지한 건 영화 속의 마초들뿐만 아니라 우리 대다수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대다수 인간들은 삶에서 자기 욕망을 추구하지만 그것을 일시적으로 이룬 사람들에게도 경계 없이 무한대로 치닫는, 소유할 수 없는 것을 소유하려는 결핍의 무한반복 사이클에는 필연적으로 펜트하우스의 호화스런 외관이 감출 수 없는 불안과 초조와 공포가 끼어들 것이다. <더 킹>은 이 과정을 다소 안전하게 푼다. 한강식이 장악했던 욕망의 미장센/펜트하우스는 일시적인 착시였고 한강식은 맨 꼭대기에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자신보다 더 높은 사람에게 끊임없이 줄을 대고 그 줄이 안전하다는 걸 확인한 상태에서 수평적으로 마구 내달릴 수 있는 권한을 얻는다. 영화 속의 한 장면에서 한강식과 박태수 무리는 군인들의 보호를 받으며 군사보호구역 해변에서 여자들과 해수욕을 즐기고 경찰의 보호를 받으면서 국도를 질주한다. 더 높은 곳과의 끈이 떨어지는 순간 이들의 수평적으로 내달릴 수 있는 권력도 차단된다.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정권을 거치며 한강식 검사 무리는 자신들이 갖고 있는 독점적 정보를 이용해 더 높은 곳과의 끈이 떨어지지 않도록 작업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것이 새로운 지식은 아니다. 우리가 몰랐던 검찰 권력 내부의 작동방식이 이렇다는 걸 인류학적으로 가치 있는 정보를 조합해 만들어낸 서사는 아니다. 역사의 흐름을 초월한 척하지만 실은 거기에 편승해서 권력을 유지할 것이라고 믿었던 한강식이 현실의 최고 권력자의 이동향배를 알아내고자 기껏 할 수 있었던 일은 용한 무당을 찾아가 비는 것뿐이다. 앞서 박태수와 마찬가지로 인물에 대한 이런 접근은 외형상으로 경쾌해 보이지만 진지하지 못하다. 애초에는 권력의 민낯을 제대로 보여주는 척했다가 적당히 거리를 두면서 슬쩍 비겁하게 풍자를 가장한 조롱으로 후퇴해버리는 것이다. 한강식의 강건한 육체 뒤에 숨은 그의 내면의 불안 징후들은 역시 우아하게 몇 차례 반복해 묘사되는 그의 식사 장면인데, 그는 피가 뚝뚝 배어나오는 스테이크를 조금씩 우아하게 나이프로 썰어먹으며 와인을 음미한다. 한강식이 처한 상황적 맥락이 달라져도 이 장면들이 전해주는 반복과 차이의 효과는 그다지 강력하지 않다.

보이지 않는 인물 내부의 괴물성

나는 이 모든 왜소한 효과가 인물들의 바닥을 보여주지 않고 안전하게 경계를 친 채 시각적 메타포로 그물을 치고 도식적으로 풀어간 접근방식에 있다고 본다. 아무리 밝음과 어둠의 경계를 묘사하고 색채가 살아 있는 공간에서 점점 어두워지는 공간으로 인물들이 이동한다고 해도, 또는 밝음과 어둠의 경계가 무화되는 곳에서 다시 뭔가를 시작한다고 하는 후반부의 반전이 시각화된다고 해도 인물들의 바닥이 드러나지 않는 한 이런 것들은 그냥 제스처일 뿐이다. 여기서 어쩔 수 없이 이 영화가 레퍼런스로 삼은 마틴 스코시즈의 <좋은 친구들>(1990), <카지노>(1995),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2013) 등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 영화들에선 갱스터 세계, 카지노 자본주의, 월가의 금융 자본주의 메커니즘에 대한 인류학적 정보가 풍부하게 담겨 있을 뿐만 아니라 적당한 지점에 반드시 들어가야 할 인물들의 결핍과 불안과 공포에 대한 묘사가 정확하게 새겨져 있다.

영화의 근본주의자인 일본의 평자 하스미 시게히코가 야멸차게 저열하다고 경멸하는 마틴 스코시즈의 영화는(사실 난 그의 비판이 지나치다고 생각하지만), 특히 위 세 영화의 경우에는 병자의 시선으로 만든 결과물이다. 화면은 약물에 취한 사람이 연상할 수 있는 속도와 결합으로 마구 흘러가지만 영화 속의 인물들도 정확히 그런 상태이며 그들 역시 병자이다. <좋은 친구들>의 초반부에 주인공 헨리 힐(레이 리오타)이 동경하는 마피아들의 무한소유의 삶은 초법적인 폭력을 통해 지탱된다는 것이 충분히 묘사되는데 이런 폭력을 행사하는 인간들의 면면이 온전할 리 없다. 초법적인 폭력의 하수인으로서의 헨리 힐의 삶은 겉보기와 달리 내재적으로 이미 무너질 수밖에 없는 괴물성을 노출하는데, 이를테면 그의 그런 괴물성은 훗날 결혼하게 되는 여자친구를 희롱했던 이웃집 남자를 찾아가 다짜고짜 갖고 있던 권총으로 상대편 남자의 얼굴을 짓이기는 장면에서 잘 드러난다. 또는 영화의 후반부에 서로의 배신을 염려하게 된 상황에서 헨리의 아내 카렌(로레인 브라코)이 도움을 청하러 헨리의 선배 제임스(로버트 드니로)를 찾아갔을 때 제임스가 훔쳐 팔다 남은 옷을 가져가라고 권하는 장면에서, 관객은 제임스가 카렌을 죽이려는 것인지 실제로 호의를 베푸는 것인지 알 수 없는 공포를 카렌의 시점에서 경험하게 된다. 그때까지 헨리의 좋은 친구처럼 보였던 제임스에 대해 그가 실은 자기 이익을 위해 살인을 아무렇지도 않게 저질렀던 흉악범임을 관객은 새삼 서사를 소급해 깨닫게 된다. <카지노>에도 관객을 한계 직전까지 몰아붙이는 등장인물의 괴물성에 대한 이런 예는 많이 찾아볼 수 있고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의 초반부에는 아예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연기하는 주인공 조던이 여자와 섹스를 하면서 여자의 항문에 마약을 주입하는 장면을 묘사하면서 인물에 대한 일체의 낭만적 미화 요소를 제거해버린다. <좋은 친구들>과 <카지노>와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가 인물들의 욕망을 미화하고 그들만의 천국을 동경하는 척하면서 그들 각자의 존재와 그들 관계의 뒤틀린 상태를 가차 없이 폭로해버렸다면, 이들 영화의 스타일을 차용한 <더 킹>은 오로지 외연적인 활기만을 가져오고 욕망의 주체가 될 수 있다고 믿었던 그들의 실제 상태를 보여주는 묘사들은 진지하게 시도하지 않았다.

<더 킹>이 이런데도 찬반양론을 일으키며 현재의 정치적 현실에 대해 어떤 발언을 하고 있는 영화로 받아들여진다면 과연 이 영화의 정치적 비판의 영향력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가 스스로 고발한다고 믿고 있는 것을 제대로 고발하고 있는지 아니면 고발한다고 하지만 실은 이 영화가 보여준 권력 체제에 오히려 봉사하거나 그에 대한 유효한 질문 자체를 봉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재고해야 한다. 이 영화는 비극이 될 수 있는 조건을 스스로 갖추지 못했다고 겸손하게 인정하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비극적 현실을 유사 조롱이나 유사 풍자의 형태로 가까스로 봉인하고 있다. 권력이 작동하는 메커니즘을 보여주는 도식적 서사 안에 그걸 수행하는 인물들에 대해 바닥까지 파고들어가 보여주겠다는 결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스타일을 찬미하거나 이 영화가 담고 있는 정치 비판적 내용을 상식선에서 추인하면서 이 영화의 정치적 비판 효과를 긍정하는 것은 과녁이 빗나간 평가라고 본다.

<더 킹>에 관한 정직한 반응이라면 이미 알고 있는 수준의 정치적 현실을 영리하게 다시 중언부언하면서 현란한 스타일로 스타배우들의 매력을 전시하는 오락이라고 할 것이다. 영화의 말미에 정우성/한강식과 조인성/박태수가 고급 식당에서 스테이크를 썰며 대화하는 가운데 상대의 허점을 공략하는 장면에서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미묘하게 교과서적으로 로앵글을 나눠 잡은 숏/역숏 배치를 보며 나는 이 영화를 미워하거나 경멸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배우들의 기운이 담겨 있고 화면의 격이 유지되고 있는 선에서 이 영화는 부패한 권력자와 망했다가 회개한 권력 하수인을 연기하는 스타배우들의 안전한 매력과 유사 비판의 제스처를 전시한다. 이게 이 영화의 마지노선이다(그 밖에 낭비되었다고 볼 수밖에 없는 배우들의 사례, 이를테면 고아성이 조직폭력단의 린치 현장에서 다방 커피를 나르는 여자로 나오는 장면 같은 것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적어도 한국의 관객에게는 이런 배우의 카메오 출연이 서사의 몰입도를 높여준다기보다는 방해하며 쓸데없는 맥거핀 효과를 낳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어떤 것이 옳다고 믿는 관객의 취향을 존중하면서 공을 들여 만든 정치오락영화라 할지라도 어느 편에서든 그의 내부에 있는 괴물성이 우리 자신의 것이기도 하다는 자각이 수반되지 않는 정치적 각성이라면 그것은 그냥 오락에 불과하다. 스타 시스템의 유혹이 아무리 세다 하더라도 인물의 리얼리티와 병행하여 그걸 부수는 노력이 없으면 그 단계의 성취는 무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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