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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원의 도를 아십니까] 공무원의 도(道)

<나는 공무원이다> <영어완전정복> <스파이> 등으로 본 공무원의 도(道)

<영어완전정복>

몇년 전, 학교 선배가 취직을 했다. 선배는 삼수 끝에 대학에 합격, 졸업은 5년 만에 하고 그로부터 12년 뒤에 박사 학위를 딴, 인생을 남들 두세배 길이로 늘려 사는 사람이었다(왠지 죽는 것도 남들보다 늦을 것 같아). 당연하게도 마흔이 넘도록 시간강사로 일하던 선배는… 공무원이 되었다, 그것도 특채로.

어떻게 된 거지? 요즘 젊은이들은 스무살 때부터 10년을 공부해도 9급 공무원 되기 힘들다던데 17년간 사회학 한길을 걸은 선배가 단번에 6급으로 채용된 걸 보면 역시 급할수록 돌아가야 한다는 삶의 진리가 가슴으로 다가오면서 3년째 실업자 신세로 새해를 맞은 나에게도 인생 잘 살고 있다는 한 줄기 위로의 서광이… 아, 이게 무슨 말이지.

아무튼 우리는 거의 20년 만에 처음으로 선배에게 술을 얻어 마시기 위해 모였다. 선배의 첫 월급은 내가 10년 넘게 일해서 받던 월급보다 많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박봉이었기에 유혹의 기술이 필요했다. “그냥 오겹살 말고 흑돼지 오겹살 먹을까? 이제 지방 강의 안 가도 되니까 기름값 굳잖아.” 선배는 정색했다. “아니야, 강의는 계속할 거야.” 도대체 무슨 재주로? 야간대만 다녀? “그냥 말하고 갔다오면 돼. 딱히 할 일도 없고. 다들 그러다가 교수 되면 그만둬.” 그렇게 교수 되면 빈자리 생기니까 선배 같은 사람이 취직해서 술도 사고 좋은 게 좋은 거… 는 무슨, 내 세금 내놔, 요새는 실업자라 별로 내지도 않지만.

<스파이>

그러고 보니 우리 과 동기 30명이 하나같이 공무원을 꿈꾸던 시절이 있었다. 모 공공기관에 아르바이트로 차출돼 일하러 갔던 애들이 돌아와 무릉도원의 신선과도 같은 공무원의 나날을 들려주었기 때문이다. 자, 들어봐, 출근하면 일단 일간지를 훑어, 그러고도 점심때까지 할 일이 없으면 스포츠 신문을 돌려 보는 거지. 이윽고 12시가 되면 불 피우고 기왓장을 달궈서(당시 청사 신축 공사 중, 가뜩이나 할 일 없는데 사람 더 뽑게?) 삼겹살을 구워 소주를 마시는 거야, 그러고 나서 한숨 자고 일어나면 퇴근. 오, 오, 오, 오! 세상에서 대학생이 제일 한가한 줄 알았는데! 역시 세상은 넓고 구멍은 많다.

온종일 놀면서 고기 굽고 술이나 마시는 나태하고 쓸모없는 인생의 단꿈에 젖었던 우리가 그 꿈을 포기한 건 그 기관에 공채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곳에 들어가기 위한 조건은 단 하나, 박사가 될 것(선배도 박사라서 공무원 됐다). 나태하고 쓸모없게 살려면 열심히 공부해서 박사가 되어야 하는데 그런다고 거기 들어가리라는 보장도 없는 삶의 부조리를 감당하지 못하여 우리는 모두 무릉도원을 포기했지.

어쨌든 나이 마흔에 처음 정규직이 됐는데 그 순간부터 남들 은퇴 생활 버금가는 여유를 즐기는 선배를 보며, 나는 가고 싶어졌다, 내가 가지 못한 공무원의 도(道)를. 내 나이 서른네살에 엄마가 네 인생에 더이상 비전은 없다며 공무원 시험이나 보라고 할 때 말 들을걸 그랬나. 근데 우리 엄마는 내 나이 서른두살에도 네 인생에 더이상 비전은 없다며 이혼남이랑 선보라 그래서, 나이 서른 넘어 난 다리 밑에서 주워온 아이가 아닐까 고민하게 만든 사람이지.

<나는 공무원이다>

공무원의 도를 알고 싶다면 역시 이거다, <나는 공무원이다>, 제목부터 나무랄 데가 없는 공무원 영화. 이 영화의 모범 공무원 한대희(윤제문)가 밝힌 바에 따르면, 나이 서른여덟 7급 공무원 9호봉은 수당 포함해 연봉 3500만원을 받는다. 많은 건 아니지만 정시 출퇴근에 임금 체불도 없으니 누가 건드리지만 않으면 삼성전자 임원 부럽지 않다는 것이 한대희의 주장이다. 하지만 삼성전자 임원 아무나 되는 거 아니지, 누가 건드린다, 그것도 떼로 몰려와서. 그럴 때 중요한 공무원의 자질이 평정심이다. 한대희가 경고하기를, 다혈질은 공무원 되면 안된다, 흔들리면 위험하다고(엄마, 어차피 난 안 되는 거였어). 그래, 공무원은 중도를 걸어야 하지(그래서 얼마 전 공공기관 발행지가 내 원고를 잘랐다, 정치적으로 중립을 취해야 한다며. 근데 그쪽 보스는 정치적으로 중립을 취하지 못해서 뉴스 엄청 나오던데요). 너무 평범해서 영어 이름을 ‘노멀’(Normal)로 지을까 고민하는 <영어완전정복>의 9급 공무원 영주(이나영)처럼, 튀지 않는 게 중요해.

2003년 영화 <영어완전정복>을 보면 세월이 무상하다. 중2 때부터 영어 포기하고 살아도 공무원이 될 수 있었던 아름다운 시절, 웬 서양 남자가 영어로 민원 넣으러 오지만 않았어도 영어 따위 공부하지 않고 끝까지 나태하게 살 수 있었을 텐데. 그래도 일단 공무원이 되고 나서 영어를 배우는 게 낫지 않을까, 학원비라도 벌잖아.

그나저나 공무원에게 가장 무서운 존재는 역시 민원 넣는 시민인가 보다. 6개월간 공무원 시험 준비하다가 한계를 깨닫고 홍보 회사에 취직한 후배는 공무원들하고 한달 반 일하고 나서 새로운 꿈을 갖게 됐다. 프로 ‘민원러’. 휴가 받아서 담당자 부서로 민원만 넣으러 다니겠다고.

하지만 공무원이라고 꽃길만 걸을까, 7급 공무원인 <스파이>의 김철수(설경구)는 간이 영수증을 5만원까지 허용해준다는 상사의 발표에 환호하지만 그는 몇년 뒤 김영란법이 나타나는 미래를 짐작하지 못했으니…. 그 미래는 이런 거였다. 함께 일하는 공무원들이 회식을 잡았다, 이제 법인카드를 쓸 수 없으니 너네가 내라고 했다, 그리고 나는 누군지도 모르는 옆 부서 사람들이 몰려왔다…. 아, 꽃길 맞네. 아는 사람한테 1인당 3만원 넘는 밥을 얻어먹으면 안 되지만 모르는 사람한테 1인분 1만3천원짜리 삼겹살 얻어먹는 건 상관없으니, 세상은 넓고 구멍은 많기도 하다.

프로 민원러를 피하라

연금 받는 그날까지, 기나긴 공무원의 여정에 필요한 두세 가지 생존 기술

<나는 공무원이다>

골라야 산다

<나는 공무원이다>의 7급 공무원 한대희는 수당 포함해 3500만원을 받는데, <스파이>의 7급 공무원 김철수는 세후 6천만원을 받는다. 이것은 호봉 차이일까, 부서 차이일까, 아니면 작가의 실수일까. 아무튼 국정원은 월급 많이 받는구나, 직장 잘 골랐어. 국가의 운명이 우리 어깨에 걸려 있으니까 한낱 가정사 따위로 고민하지 말라면서, 국가의 운명이 걸려 있는 작전 나가라고 받은 출장비로 타이에서 맥주도 댓병으로 퍼마시고.

<오베라는 남자>

피해야 산다

<오베라는 남자>의 오베는 공무원이 됐으면 참 좋았을 성격의 소유자로, 꼼꼼하고 성실하며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자, 이런 남자가 공무원의 적이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끈기와 근성으로 엄청난 양의 민원을 퍼부어 공무원에게 패배의 쓴맛을 선사하는 프로 민원러가 된다. 갇혀사는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공시촌에서 뛰쳐나온 한 마리 야생동물 같은 후배야, 넌 아무래도 프로 민원러는 되지 못할 것 같아.

<영어완전정복>

배워야 산다

<영어완전정복>의 영주는 공무원 됐다고 안심했지만 학생 때도 안 다니던 영어 학원 다니는 팔자가 된다. 배움에는 끝이 없다. 박사라고 임용된 공무원이 내 원고를 보고 전화를 했다. “볼이 발간, 이라고 돼 있던데, 이런 말이 어딨어요? 녹색 창에 ‘발간’ 치니까 신문이나 잡지를 내는 일이라고만 나오던데?” 박사님, 단어는 국어사전에서, 용언은 기본형으로 찾아주시기를 부탁드려요. 배움에는 정말 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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