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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영화] 박현진의 <허공에의 질주> 삶의 무게를 견딘다는 것
박현진(영화감독) 2017-01-04

<허공에의 질주>(1988)를 처음 보게 된 건 의미를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멋지다고 생각했던 제목과 리버 피닉스 때문이었다. 친구들끼리 키아누 리브스와 리버 피닉스 중 누가 더 좋냐고 서로 묻고 답하던 시절이었다.

<허공에의 질주>는 그가 세상을 뜬 이후에야 찾아보게 됐다. 리버 피닉스가 피아노 치는 장면은 말할 것도 없고 안경을 벗거나 머리를 쓸어올리는 자잘한 동작까지 그에게서 한순간도 눈을 뗄 수 없었다. FBI의 추적을 피해 도망다니면서도 이렇게 아들을 잘 키워낸 부모가 대단하다고 느꼈지만 모든 감상은 리버 피닉스로 귀결됐다. 마지막 장면은 그 자체로 슬펐지만 아름다운 배우가 이제 세상에 없다는 게 겹쳐 배로 슬펐던 것 같다.

<허공에의 질주>를 다시 본 것은 <오래된 정원>(2006) 스크립터로 일할 때였다. 극중 1980년 5월 광주에 있었던 오현우(지진희)의 ‘도바리’ 시절 장면 레퍼런스 영화로 찾아봤는데, 여전히 예민한 미소년 리버 피닉스가 거기 그대로 있었다. 리버 피닉스의 표정, 작은 동작들과 걸음걸이에는 눈에 띄지 않고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애쓰면서 살아온 세월이 묻어 있었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돼서부터 6개월에 한번씩 이사하고 이름도 머리색도 바꿔야 했던 대니라는 소년을 이렇게 매 장면 세밀하게 그려냈었다니, 뒤늦게 탄식이 흘러나왔다.

아더(주드 허시)와 애니(크리스틴 라티) 부부는 도바리 생활에 익숙해 보였고 그런 만큼 또 지쳐 보였다. 신념대로 살아온 삶이라고 회한이 없겠는가. 다시 보면서 눈에 크게 들어온 것은 아더와 애니가 거리에서 혼자 우는 장면이었다. 그들은 서로에게 맘 놓고 우는 모습을 보일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아더는 접선한 동료에게서 어머니가 한달 전에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후에, 애니는 대니(리버 피닉스)가 줄리아드 입학이 가능한 피아노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에, 그렇게 혼자 운다. 아더와 애니는 15년 전 반전운동의 일환으로 군사실험실을 폭파했다. 그리고 그 일로 인해 공항에서 잠깐 접선한 게 마지막 기억인 어머니의 부고를 뒤늦게 전해 듣게 되는 슬픔을 겪고, 자신의 부모가 그랬던 것처럼 FBI의 눈을 피해 대니를 몇년에 한번 간신히 만날 것을 각오하고라도 줄리아드에 보내야 할지 말지를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놓인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옳다고 생각한 일을 한 대가라기엔 참 가혹하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했던 일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후회하지 않아야 견딜 수 있는 삶의 무게가 느껴졌다.

영화의 마지막, 가족이 FBI를 피해 또다시 도망가야 하는 상황에서 아더는 대니의 자전거를 차에 싣지 말라고 한다. 엄마, 아빠도 열심히 했으니 너도 세상에 좋은 일 하면서 살라는 말을 남기고 차는 점점 멀어진다. 세상에 좋은 일 하려고 했던 부모가 그 대가로 자식을 떠나보내야 하는 순간에 할 수 있는 최고로 근사한 대사다. 아더의 나이에 점점 더 가까워졌는데도 이 장면에서는 혼자 남겨진 대니의 심정이 되고 만다. 세상에 좋은 일 하면서 살고 있니? 영원히 젊은 얼굴로 기억되는 리버 피닉스를 보고 있자니 더욱 부끄러워졌다.

나이가 들수록 부끄러움을 모르는 인간으로 늙게 될까봐 두려운 순간들이 많아진다. 그런 두려움이 생길 때면 <허공에의 질주>를 꺼내본다. 보고 나면 항상 더 좋은 사람이 돼야지, 옳은 일을 해야지 결심하게 된다. 이것은 좋은 영화를 만들겠다는 결심이기도 하다.

박현진 영화감독. <6년째 연애중>(2007), <좋아해줘>(2016) 연출. 웹드라마 <출출한 여자>(2013), <출중한 여자>(2014) 공동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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