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시작하면 한 청년이 밧줄을 타고 콘크리트 장벽을 능숙하게 올라가는 장면이 나온다. 청년이 2, 3층 높이의 콘크리트 장벽 꼭대기에 올라갔을 때 어디선가 총알이 날아들고, 청년은 반대편으로 미끄러지듯 줄을 타고 내려간다. 손바닥 상처를 슬쩍 바라본 후, 청년은 황급히 좁은 골목길로 도망쳐 한 집에 도착한다. 문을 두드리면 청년 앞에 한 소녀가 나타난다.
팔레스타인 서안지구를 배경으로 한 하니 아부 아사드의 영화 <오마르>(2013)를 보고 나서 떠오른 의문은 팔레스타인 청년 오마르(아담 바크리)가 왜 이 위험한 장벽을 넘어서 여자 친구 나디아(림 루바니)의 집을 찾아가는가 하는 거였다. 처음에는 당연하게 여자 친구가 이스라엘에 사는 팔레스타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장벽 양쪽 마을의 풍광은 어떠한 차이도 보여주지 않는다. 극단적으로 달라지는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2015) 속 멕시코와 미국 국경 정도는 아니라 하더라도, 여자 친구 집이 이스라엘 지역에 있다면 좀더 현대적인 건물이나 거리처럼 다른 모습이 나타날 것 같은데, 장벽의 양쪽은 똑같이 오래된 팔레스타인 마을로 보인다.
오마르가 마주한 선택의 딜레마
국경의 장벽은 정치체계나 문화 혹은 경제적 차이가 만들어내는 모순이 물리적인 형태로 체계화된 것이다. 따라서 장벽의 양쪽은 이러한 차이가 만들어내는 다른 풍경을 갖고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공동경비구역 JSA>(2000)나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같이 경계를 무대로 한 영화들은 둘 사이의 차이를 서사의 중요한 주제로 취하기 마련이다.
영화에서 공간적인 체계가 현실처럼 연속성을 가질 필요는 없다. 건물 안은 부산에서 찍고 건물 밖은 서울에서 찍어도 공간과 스타일의 연속성이 관객에게 인정된다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영화의 공간은 현실이 아닌 서사 논리에서 연속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마르>의 경우, 서사의 근간을 이루는 공간 체계에 대해 관객이 의문을 갖게 한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나와 같은 의문을 갖는 사람이 많았었는지, 하니 아부 아사드는 2015년 1월 <씨네21>과의 인터뷰(991호)에서, 영화 속 장벽은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사이가 아닌, 서안지구의 팔레스타인 마을들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경계에 설치된 분리장벽은 잘 알려져 있다. 우리는 팔레스타인 서안지구의 이 콘크리트 분리장벽을 이야기할 때 일반적인 국가 사이의 장벽처럼 영토와 주권을 명확하게 분리하는 경계로 쉽게 받아들인다.
서안지구는 우리가 흔히 요단 강으로 부르는 요르단 강(Jordan 江) 서쪽에 위치한 지역을 의미한다. 몇 차례 이스라엘과 주변국 사이에 벌어졌던 중동전쟁 이후 팔레스타인은 지중해에 면한 가자지구를 제외하고는 내륙으로 밀려나 서안지구로만 남았다. 1949년에 이루어진 휴전협정 당시에 그린라인(Green Line)이라 불리는 경계선이 그어졌지만 이스라엘은 분리장벽을 그린라인보다 더 안쪽으로, 많은 팔레스타인 마을을 가로질러 건설했다.
영화 속, 장벽은 예루살렘의 칼란디야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는 오마르의 언급이 있다. 역사적인 도시 예루살렘은 특히 팔레스타인 거주지역과 이스라엘 거주지역이 복잡하게 얽혀 있고, 이스라엘이 건설한 장벽은 팔레스타인 거주지역을 폭력적으로 단절시키는 문제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스라엘의 시작을 현대의 영역으로만 한정한다면, 그 시작은 키부츠나 모샤브 같은 공동체 정착촌이다. 식민지 시대로부터 시작된 이러한 민간 영역에서의 토지의 점유는 1945년 이스라엘의 독립선언을 통해서 국가의 영토로 변환되고, 팔레스타인 마을들을 파괴하고, 새로운 거주 지역을 건설하는 방식으로 도시의 건설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이스라엘은 가자나 서안지역에 불법적인 점유를 통한 정착촌과 군사기지를 건설하는 시도를 계속 이어왔다. 자유로운 이동을 가로막는 장벽들은 벗어날 수 없는 공간적 딜레마를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삶에 강제하고, 그곳을 벋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것을 통해서이다.
오마르는 오랜 친구 타렉(이야드 후라니)과 아므자드(사메르 비스하랏)와 함께 이스라엘 병사를 살해한다. 타렉이 계획을 짜고, 오마르가 차를 훔치고, 아므자드가 총을 쏜다. 이들의 행위는 누군가의 밀고로 발각되고, 홀로 잡힌 오마르는 감옥에서 팔레스타인 죄수로 변장한 이스라엘 형사의 유인에 속아 “절대 자백하지 않겠다”는 말을 하게 된다. 그리고 “자백하지 않겠다”는 말이 명백한 자백의 증거로 쓰이는 상황에 빠지게 된다.
오마르는 사랑하는 여자 친구와 헤어져 나머지 인생을 감옥에서 보낼 것인지, 아니면 타렉이 총을 쏜 사람이라고 믿고 있는 형사들의 제안을 받아들여 나디아의 오빠이자 자신의 친구인 타렉을 잡는 데 협조할 것인가 하는 힘든 선택 앞에 놓인다. 적어도 형사들에게는 타렉을 찾는 데 보낼 짧은 석방기간 동안 오마르는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오마르가 마주한 선택의 딜레마는, 나디아를 임신시켰다는 아므자드에게 화가 난 타렉이 몸싸움을 하던 중 사고로 죽게 되고, 죽은 타렉의 시신을 이스라엘 형사에게 넘겨주는 것으로 해결된다. 그리고 동시에 나디아가 자신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아므자드의 말을 믿고 둘의 결혼을 맺어주는 것으로 나디아와의 관계도 끝이 난다. 하지만 몇년이 지난 후, 오마르는 자신이 아므자드의 거짓말에 속았었고, 의심의 벽 안에 갇혀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절망한다.
영화의 마지막, 오마르는 과거의 일을 미끼로 밀고자로 일할 것을 협박하는 이스라엘 형사와 후회와 절망의 벽 안에서 영원히 탈출할 수 있는 최후의 선택을 한다. 오마르는 형사에게 총을 구해줄 것을 요청한다.
원숭이 이야기의 의미
영화에서 아므자드가 친구들에게 원숭이 사냥에 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밀림에 각설탕을 뿌려놓아 원숭이들을 설탕 맛에 길들인 후, 목이 좁은 구멍에 각설탕을 집어넣어놓으면 욕망 때문에 구멍 속 설탕을 움켜쥔 손을 풀지 못하는 원숭이를 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처음에 나는 사냥을 당하는 원숭이가 오마르와 그의 친구들,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상징하는 것인지, 설탕을 움켜쥐고 손을 놓지 못하는 형사 같은 이스라엘 사람들인지를 고민했다. 하지만 문뜩 서안지구 안에 도로로 연결되어 들어와 있는 정착촌들의 형태가 원숭이 사냥에 필요한 구멍과 닮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원숭 이 이야기는 해결 방법이 보이지 않는 팔레스타인의 상황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마르>는 이제 더이상 움켜쥔 손을 풀 선택마저도 갖지 못하게 된 사람들에 관한 영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