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원전사고를 소재로 한 <판도라>는 한마디로 말하면 막막함에 관한 영화다. 철저한 관리와 감독이 필요한 원자력은 일단 인간의 통제를 한번 벗어나는 순간 인간의 무력함을 여실히 드러낸다. 영화는 이 정지된 세계에서 사태를 수습하려 발버둥치는 이들의 사투를 담아내야 한다. 원자력 발전소장 평섭(정진영)은 모두가 혼란에 빠진 그 순간 유일하게 정신을 부여잡고 지옥문이 열리는 걸 막으려는 인물이다. 그에게는 인간적인 고뇌에 빠질 시간도, 괴로워할 여유도 없다. 사태 해결을 위한 로드맵을 가지고 있는 건 그뿐이기 때문이다. “아마 배우 중엔 내가 제일 먼저 시나리오를 받아봤을 것”이라는 정진영은 제안을 받자마자 일말의 고민 없이 수락했다. “필요한 이야기이자 누군가는 해야 할 이야기”라는 게 첫 번째 이유였다. 사실 평섭은 입체적인 인물이 아니다. 아니, 이 영화 속 누구도 입체적일 수 없다. 거대한 재난 앞에 놓인 선택지는 단 두 가지뿐이다. 달아나거나 주저앉거나. 하지만 <판도라>의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제3의 선택지를 향한다.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치사량의 방사능으로 뒤덮인 지옥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뭔가 대단한 사명감으로 하는 일은 아니다. 발전소장이고 자신의 자리에서 책임을 다하는 것뿐이다. 문제는 그 일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게 만드는 시스템에 있다.” 온전히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는 발전소장의 존재는 역설적으로 모든 비정상적인 상황을 두드러지게 만든다. 그는 “흥미로운 고민을 하거나 깊은 그늘을 보여줄 수 있는 캐릭터에 끌린다”고 했지만 평섭은 정반대로 오로지 직진하는 단순한 캐릭터다. 그럼에도 기꺼이 <판도라>에 출연을 결심한 건 “나를 필요로 하는 역할”이었기 때문이다. “이 나이가 되니 어떤 모습으로 보일지에 대한 불안과 욕심이 줄어든다. 해야 할 이야기에 할 수 있는 역할이 있으면 당연히 하는 거다.” 너무도 끔찍한 재난 앞에 상대적으로 편편해질 수 있는 이야기의 중심과 무게를 잡아주는 건 정진영이란 배우가 쌓아온 신뢰의 힘이다.
“그냥 소장님이 그 자리에 서 있는 것 같았다. 뒷모습을 믿고 따라가면 되는.” 발전소의 기술직 근무자이자 재혁(김남길)의 절친 길섭 역을 맡은 김대명은 정진영과 함께한 현장을 그렇게 기억했다. 정진영 역시 김대명을 “늘 그 자리에 있어줘서 고마운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길섭은 딱 그런 캐릭터다. 순진하고 느린 듯 보이지만 있어야 할 자리에 늘 서 있다. 원전이 폭발한 상황에서도 길섭은 당연한 듯 상황을 수습하러 들어간다. 인명을 구하고 재난을 막겠다는 거창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그것이 자신의 할 일이기 때문이다. “영웅적인 행동으로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길섭은 단순한 사람이다. 복잡한 이해타산을 하기 전에 몸이 먼저 반응한다.” 김대명은 시종일관 “내 이웃의 평범한 사람처럼” 보였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드라마 <미생>의 김 대리 역할로 대중적 인지도를 높였지만 사실 영화에서 그간 김대명이 맡은 역할들은 독특한 쪽에 가까웠다. <특종: 량첸살인기>의 비밀스러운 목격자, <덕혜옹주>의 독립운동가 등 일상적인 연기와는 거리가 먼 캐릭터들이다. 한데 김대명이 역할의 옷을 입으면 희한하게 평범한 사람의 얼굴로 바뀐다. “독립운동가라고 매 순간 비장한 삶을 살진 않았을 것 같다. 가능하면 울고, 웃고, 화내는 그런 보통의 순간들을 표현하고 싶다.” <판도라>의 길섭도 사실 재난을 수습하기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비범한 인물이다. 하지만 김대명은 “모든 비범한 일들은 평범한 사람들의 손에서 이뤄진다”는 생각으로 최대한 일상의 표정들을 연기했다. 덕분에 얼핏 비현실적인 재난을 그린 <판도라>가 바로 우리 곁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로 생생하게 내려앉는다. “한때 시인을 꿈꿨다. 시도, 연기도 뭔가를 표현한다는 점에서 닮았다. 가능하면 쉽고 와닿는 표현을 하고 싶다. 특별히 하고 싶은 역할을 그리고 있진 않다. 어떤 역할이든 김대명이 하면 어떨까 하는 궁금증을 줄 수 있는 배우였으면 좋겠다.” 가장 보통의 사람의 얼굴을 한 그는 이미 다음이 궁금한, 좋은 배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