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주년을 눈앞에 둔 도쿄는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었다. 호소다 마모루와 이와이 슌지, 일본을 대표하는 애니메이션 감독과 실사영화 감독의 특별전을 기획해 일본 관객의 주의를 집중시켰고, ‘아시아 삼면경 2016: 리플렉션’(Asian Three-Fold Mirror 2016: Reflections) 프로젝트와 ‘크로스 컷 아시아 #03: 컬러풀 인도네시아’ 기획전을 열어 아시아영화계와의 관계를 다졌다. 경쟁부문 상영작 16편 또한 예년에 비해 알찼다. 지난 10월25일부터 11월3일까지 롯폰기 힐스에서 열린 제29회 도쿄국제영화제 소식을 전한다. 올해 영화제에서 특별전을 연 호소다 마모루 감독과 연출 데뷔작을 찍은, 허우샤오시엔과 지아장커 영화의 음악감독 한노 요시히로, 경쟁부문 <설녀>를 연출한 기키 스기노 감독과도 만났다.
주말, 영화제를 찾은 관객들로 롯폰기 힐스는 활기가 넘쳤다.
“영화제 레드카펫이 일본 국회 카펫보다 더 흥분된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지난 10월25일 도쿄 롯폰기 힐스에서 열린 제29회 도쿄국제영화제 개막식에 참석해 유머 섞인 축하인사를 전했다. 그렇다고 의례적인 멘트나 하려고 레드카펫을 밟은 건 아니었다. 동남아시아 지역을 두고 중국과 경쟁 외교를 펼치고 있고, 필리핀, 미얀마 정상과의 회담을 줄줄이 앞둔 그로서는 동남아시아 지역 영화들이 많이 초청된(동남아시아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기자들이 취재하러 온) 도쿄의 레드카펫만큼 최적의 외교 홍보 무대도 없었을 것이다. 아베 총리는 “아시아의 재능들이 일본으로 오고, 일본의 크리에이터들이 아시아로 나가길 바란다”고 아시아 내에서의 긴밀한 협력을 강조했다.
올해로 취임 3년째에 접어든 시이나 야스시 집행위원장 체제의 도쿄국제영화제는 아시아 영화인들과의 유대를 굳건히 다지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일본국제교류기금(재팬파운데이션) 아시아센터와 함께 올해 처음으로 준비한 ‘아시아 삼면경 2016: 리플렉션’ 프로젝트가 그 성과 중 하나다. 필리핀의 브리얀테 멘도사, 일본의 유키사다 이사오, 캄보디아의 소토 퀄리카 감독이 ‘아시아에서 함께 살아가기’라는 주제로 만든 중편영화를 모은 옴니버스 프로젝트다. 이 작품은 개막 첫날 야심차게 공개됐다. 브리얀테 멘도사의 <죽은 말>(Shiniuma)은 일본에서 30년 동안 불법 체류를 하다 일본 경찰에 발각돼 고향 필리핀으로 강제추방당한 마르샬 할아버지의 사연을 그린 작품이다. 30년 만에 고향 땅을 밟았지만 돈도 없고, 힘도 없는 그를 반겨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카메라는 갈 곳 없는 마르샬을 가까이서 쫓는데, 그의 긴 여정이 꽤 씁쓸한 여운을 남긴다. 유키사다 이사오 감독의 <비둘기>(Pigeon)는 말레이시아 페낭에 살고 있는 일본인 할아버지와 그의 집에서 일하는 말레이시아 가정부 야스민의 관계를 그린 이야기다. 태평양전쟁에 참전했던 젊은 시절을 회상하고, 비둘기를 키우는 게 유일한 즐거움인 그는 붙임성 많은 야스민에게 조금씩 마음을 연다. 이 영화는 평화의 상징인 비둘기를 할아버지와 야스민을 잇는 장치로 설정해 과거를 극복하고 밝은 미래로 나아가자는 메시지를 던진다. 소토 퀄리카 감독의 <다리 너머에>(Beyond the Bridge)는 전쟁 전 연인이었다가 전쟁때문에 헤어진 뒤 40여년 만에 캄보디아의 다리 위에서 재회한 일본인 남자와 캄보디아 여자의 사연을 그린 멜로 드라마다. 지나간 시간을 되돌릴 수 없는 현실이 무척 안타까운 이야기다. 이 밖에도 지난해 신설된 ‘크로스컷 아시아’ 섹션에서 CJ와 인도네시아가 합작한 영화 <차도 차도>를 비롯해 <엠마> <픽션> 등 인도네시아영화 11편이 소개됐다.
‘구마 디너’ 행사에 참여한 푸드트럭 모두 구마모토현의 레스토랑이다.
사회적인 메시지가 분명하고 개성 강한 작품 16편
올해 롯폰기 힐스는 사건, 사고 하나 없이 조용했다. 도쿄국제영화제는 롯폰기 힐스에서 열린다. 외국인과 사무실이 많아 낮에는 정장 입은 직장인들로, 밤에는 외국인 관광객들로 가득한 동네다. 롯폰기 힐스 한가운데에 자리한 54층 높이의 모리타워에서 인터뷰가 진행되고, 프레스센터가 마련됐다. 상영작 모두 모리타워 옆에 위치한 도호 시네마에서 상영된다. 부산국제영화제처럼 떠들썩한 분위기는 이곳에 없다. 하지만 언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였는지 신기할 만큼 관객은 조용히 좌석을 채우며 상영관에 열기를 불어넣는다. 도쿄국제영화제 취재는 온라인 예약이 필수다. 상영작 관람도, 취소도, 인터뷰 신청도 온라인에서 미리 신청해야 한다. 상영시간이 겹치는 영화는 예약이 불가능하다. 한 상영관에서 영화를 보다가 다른 상영관으로 이동해 같은 시간대에 상영하는 영화를 볼 수 없다. 사정이 생겨 영화를 볼 수 없으면 다른 기자, 배급 관계자, 관객에게 상영 기회를 주기 위해 상영시간 전에 예약을 취소해야 한다. 예약한 영화만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취재에 불편한 점이 있는 동시에 내 자리가 보장되어 있어 정해진 일정대로 취재하면 된다는 장점도 있다.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정해진 규칙은 영화제를 빈틈없이 운영하기 위한 목적도 있겠지만, 한 사람이라도 더 영화를 볼 수 있도록 하려는 배려이기도 하다.
그런데 영화제의 관건은 운영보다는 상영작 프로그래밍에 있다. 영화제 기간 내내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영화가 한두편은 있어야 한다. 그 부분에 있어 지난 몇년 동안 다소 아쉬웠던 게 사실이다. 올해 경쟁부문의 식단은 사회적인 메시지가 분명하고 개성이 강한 작품 16편으로 다양하게 차려졌다. 야타베 요시 수석 프로그래머는 “영화만큼 세상을 이해할 수 있는 수단이 없을 것”이라며 “전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회문제를 반영한 작품들로 모았다”고 정체성을 분명히 밝혔다.
미켈레 플라치도 감독의 신작 <7분>은 1950년대 프랑스 공장에서 있었던 실화를 빌려와 이탈리아를 무대로 각색한 이야기다. 이탈리아 섬유공장 사장은 대량의 주식을 다른 회사에 팔아 공장을 매각하려고 하고 노동자 200명은 해고 위기에 처한다. 이 공장을 매각하려는 새 회사 사장은 점심시간을 7분 단축하면 노동자들의 지위를 보장해주겠다는 제안을 노조위원회에 제시한다. 여성 노조위원 11명은 회사쪽의 제안을 받아들일지 말지를 결정해야 한다. 투표를 앞둔 그들의 논쟁은 격렬하다. 몇몇은 “다른 공장에 취직하기 힘든 시대이니 회사의 제안을 수용해 노동자들을 해고로부터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다른 몇몇은 “우리가 이 제안을 받아들이면 다른 공장도 그들의 노동자들에게 똑같은 제안을 하게 될 것”이라며 “결국 이건 노동자의 자존감과 연결되는 문제”라고 반대한다. 11명의 각기 다른 사연을 들어보면 그들이 왜 그런 주장을 하는지 이해가 된다. 무엇을 선택하든지 간에 만족스럽지 않은 선택지에서 고민해야 하는 딜레마가 무척 안쓰럽다.
야마우치 마리코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마쓰이 다이고 감독이 연출한 <아즈미 하루코는 행방불명>은 현대 일본 여성이 사회에서 겪는 차별과 분노를 다룬 이야기다. 어느 날 갑자기 독신녀 아즈미 하루코(아오이 유우)가 실종된다. 젊은 그래피티 작가 두명이 그녀의 실종 포스터를 보고 호기심이 생겨 온 동네 벽을 그래피티로 뒤덮는다. 그리고 정체가 불분명한 한 여고생 그룹이 길거리에서 무차별적으로 지나가는 남성들을 공격한다. 아즈미 하루코는 납치된 것일까, 아니면 가출한 것일까. 가출을 했다면 이유가 무엇일까. 영화는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아즈미 하루코가 어떤 사람이고, 그녀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그녀의 사연과 상처를 따라가다보면 남녀차별 문제가 일상에 얼마나 깊숙이 퍼져 있는지 실감할 수 있다. 그것은 여성 혐오 분위기가 팽배하고, 그것으로 인해 페미니즘 이슈가 촉발되고 있는 최근의 한국 사회에도 유효한 메시지다.
데뷔작 <중노동>(2011)으로 2011년 칸국제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초청됐던 마르코 두트라 감독의 신작 <하늘의 침묵>은 성폭행당한 여성과 그녀의 가족이 겪는 트라우마를 그려낸 작품이다. 두 아이의 엄마인 다이아나는 가족이 없는 집에 침입한 괴한 두명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한다. 하지만 다이아나는 그 사실이 너무 수치스러워서 가족이나 친구에게 털어놓지 못한다. 어떤 계기로 아내가 성폭행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남편 마리오는 몇 가지 단서를 가지고 범인을 찾아내 복수하려고 한다. 이 영화는 복수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 (사람을 죽일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복수를 머뭇거리는 마리오의 심리를 섬세하게 포착해낸다. 머릿속은 분노로 가득 차 있는데 또 다른 두려움 때문에 행동을 실행하지 못하는 인간의 나약함이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이 밖에도 경쟁부문에서 상영된 기키 스기노 감독의 <설녀>(雪女, Snow Woman), 아시아의 미래 부문에 초청된 한나 요시히로 감독의 <빗속에서 흔들리는 여자>, 일본영화 스플래시 부문에서 틀었던 아다치 신 감독의 <14댓 나이트>(14That Night) 등 젊은 감독들의 작품들이 기억에 남는다.
세일즈 관계자와 바이어들이 세일즈 부스에서 미팅을 하고 있다.
‘일본 콘텐트 쇼케이스 2016’과 ‘구마 디너’
영화제 기간 동안 인공섬 오다이바와 시부야에서는 ‘일본 콘텐트 쇼케이스 2016’(Japan Content Showcase 2016)이 열렸다. 일본 콘텐트 쇼케이스는 티프콤(TIFF COM), 도쿄국제아니메페스티벌(TIAF), 도쿄국제음악마켓(TIMM) 등 영화, 애니메이션, 음악 등 모든 콘텐츠들이 한자리에 모인 행사다. 올해는 전세계 20개국에서 356개 회사가 참여했다. 특히 오다이바에서 열린 마켓 티프콤은 도쿄국제영화제의 또 다른 얼굴이다. 완성된 영화를 사고 팔던 과거와 달리 최근에는 소설, 만화, 방송 같은 엔터테인먼트 지적재산권(E-IP, 원작 판권)을 거래하는 움직임이 많아졌다. 티프콤 역시 이 변화에 맞게 움직이고 있다. 티프콤의 야마다 유코 매니저는 “최근 몇년 동안 원작 판권을 거래하고 공동 제작을 하려는 움직임이 많아지고 있다”라며 “관련 피칭 행사와 비즈니스 세미나를 준비한 것도 비즈니스 미팅을 유도해 실질적인 거래로 이어지게 하기 위한 목적”이라고 말했다. CJ E&M 영화사업부문 해외배급팀 김현우 대리는 “티프콤은 유럽 세일즈 회사들이 일본 콘텐츠에 관심을 가지고 왔다가 한국이나 중국과의 미팅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며 “CJ는 베트남, 인도네시아, 중국에서 현지 영화를 많이 제작해온 덕분에 올해는 한국영화에 관심을 가지고 찾아온 동남아시아 회사들이 많았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는 티프콤 안에 국제공동제작 미팅존 부스를 마련하고 한국의 창작자와 일본 회사의 만남을 주선했다. <모먼트>(감독 김용완, 프로듀서 백혜성•한동환), <목욕의 신>(감독 안상훈, 프로듀서 윤창업), <디어 마이 요리코>(감독 이호현, 프로듀서 조윤진), <키네마의 신>(감독 김성수, 프로듀서 윤민영), <풍운아 김옥균>(감독 미정, 프로듀서 김영) 등 국제공동제작 기획개발 지원작 5편의 감독과 제작자들은 10월25일부터 27일까지 3일 동안 닛카쓰, 가도가와, 쇼치쿠 등 일본 회사와 총 61건의 일대일 비즈니스 미팅을 진행했다. 영진위 국제사업팀 유수지 주임은 “지난해 미팅 건수보다 10% 증가한 수치다. 또 참여한 프로젝트들은 일본 지역 영상위원회로부터 투자 유치 가능성을 제안 받았다”고 말했다.
도쿄국제영화제는 영화를 통해 아시아 영화인들과의 연대를 도모하는 한편, ‘구마 디너’ 행사를 운영해 일본 지역사회와의 끈을 놓지 않았다. 구마 디너는 지난 4월 구마모토현을 강타한 지진으로 피해를 입은 구마모토현 사람들을 돕기 위해 마련한 푸드트럭 이벤트다. 도쿄국제영화제 홍보팀 시마무라 유카리는 “우리 영화제는 영화산업뿐만 아니라 구마모토현의 재건 사업에도 큰 힘을 불어넣을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며 “단순히 수익을 전달하는 것보다 구마모토현의 음식과 술을 먹으면서 구마모토현에 용기를 주는 게 더 의미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기자도 이곳에 들러 하타케 아오야마 식당의 햄버거와 구마모토 호텔의 중식 레스토랑에서 만든 국수를 먹었는데 웬만한 맛집 저리 가라였다.
좋은 영화를 모아 상영하려고 노력하고, 영화산업의 플레이어들끼리 편하게 비즈니스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며, 일본 사회와의 연대를 도모해 영화제를 알렸다는 점에서 시이나 야스시 집행위원장 체제의 도쿄국제영화제는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을 제대로 찾은 듯했다. 서른살을 맞는 내년이 벌써 기다려지는 이유다.
경쟁부문 상영작 <설녀> 연출한 기키 스기노
<설녀>는 고이즈미 야쿠모 작가의 괴담 <유키 온나>를 각색한 영화다. <유키 온나>는 눈의 정령이 흰옷을 입은 여자로 둔갑해 나타난다는 민간 설화다. 고바야시 마사키 감독이 <설녀> <귀 없는 호이치> <흑발> <찻잔 속에> 4편을 만들어 <괴담>(1964)이라는 옴니버스영화로 묶어 개봉시킨적이 있다. 기키 스기노 감독은 <유키 온나>를 읽다가 “그녀의 존재는 무엇일까? 그녀가 낳은 아이도 영원한 삶을 살 수 있을까?” 같은 호기심이 생겨 “영화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설녀>는 크게 두 가지 이야기로 구성된다. 유키(기키 스기노)가 사냥꾼 미노키치(무네타카 아오키) 앞에 나타나 그와 결혼해 가정을 꾸리고 아이 우메를 낳는게 전반부다. 후반부는 우메가 병약한 남자친구 미키오와 함께 산에 올라갔다가 미키오가 갑자기 죽으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설녀 이야기가 중심인 원작과 달리 그녀는 “<설녀>를 단순히 과거 이야기로 만들고 싶지 않”아 “딸을 설정해 현재 시점으로 괴담을 해석해보고 싶었다”고 한다. 설녀가 등장한 오프닝 시퀀스만 흑백으로 연출하고 나머지 이야기는 전부 컬러로 설정한 것도 그래서다. 감독, 배우, 프로듀서로 활동하고 있는 그녀는 이 영화에서 연출과 주인공 유키 역을 맡았다. “<유키 온나>를 읽었을 때 직접 연기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웃음)” 기키 스기노의 다음 영화는 2012년 부산국제영화제 아시아프로젝트마켓에 선정됐던 <망각>(가제)이다. “곧 기획 개발하려고 한다. 이 영화에서도 연출과 연기 모두 할 거냐고? 그럴 것 같다.(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