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백남기 선생이 세상을 떠나기도 전에, 마치 죽기만을 기다리는 듯 서울대병원 주위로 까마귀떼처럼 새까맣게 내려앉은 경찰들을 보는 순간, 머릿속을 불안하게 맴도는 단어가 있었다. 안티고네. 강제 부검을 위해 시신을 탈취하려는 공권력의 저 일사불란함, 세월이 무색하게 여전히 우리는 그렇게 안티고네의 시대에 붙박여 있었나 보다.
소포클레스의 희곡 <안티고네>. 그녀의 오빠 폴리네이케스는 독재자 크레온에 의해 짐승들의 밥으로 광야에 내던져진다. 죄인의 장례를 치러주는 것은 지엄한 국법에 의해 금지되어 있다. 안티고네는 오빠의 주검이 짐승들에게 헤쳐지는 걸 차마 볼 수 없어 몰래 장례를 치르고, 극형을 피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이렇게 안티고네의 세계에서 애도는 금기다. 가족을 애도할 권리, 같은 인간을 사랑하고 그 죽음을 애도하는 가장 인간적인 권리를 박탈하는 ‘국가의 법’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세월, 여기 한국에서도 수많은 안티고네들이 통한의 노래를 불러왔다. 경찰이 증거 인멸을 위해 가족 허락도 없이 시신을 화장했던 박종철, 한달간 사경을 헤매다가 죽자 곧바로 압수 수색영장을 들고 병원에 들이닥쳐 ‘압수’하려던 이한열, 장례식에 침탈해 사람들을 집단구타하고 시신을 탈취해 늦은 밤 매장해버린 노동자 이석규, 진압 과정에서 사망하자 수차례 시신 탈취를 시도했던 김귀정, 91년 장례식장 벽을 뚫고 끝내 시신을 탈취한 한진중공업 노동자 박창수 등. 오욕의 80년대를 경유하며 그렇게 버려지고, 도둑질 당하고, 또는 다시 부검되었던 죽음들이 존재한다. 최근까지도 시신 탈취가 이어졌다. 2014년 지속적인 노조 탄압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삼성전자서비스 하청 노동자 염호석의 경우도 경찰들이 장례식장에 난입해 시신을 탈취해 화장해버렸다. 그의 어머니는 자식의 유골함을 결국 만져보지도 못했다.
공권력이 이렇게 시신을 탈취하고 부검에 목을 매는 이유는 책임을 회피하고 진상을 은폐하려는 표면적 이유도 있지만, ‘애도’ 행위를 통해 이뤄지는 인륜과 공분을 금기함으로써 국가법과 권력의 힘을 현시하고 대중에게 공포를 살포하기 위해서다. 가족과 이웃의 죽음을 애도하는 그 원초의 순간을 금지하는 것, 그리 하여 법 바깥에서 서로의 삶을 보듬는 연대의 기미를 미연에 차단하는 것, 바로 그것이 공권력이 시신 탈취라는 그렇듯 참혹하고 과시적인 전근대적 폭력을 행사하는 이유다. 그리고 지금 경찰은 다시 한번 서울대병원을 에워싼 채 호시탐탐 탈취를 노리고 있다. 경찰이 쏜 물대포에 맞아 쓰러진 지 317일 만에 사망한 백남기 선생을 부검하기 위해서다. 이를 위해 판사는 초유의 조건부 영장을 발부해줬고, 주치의는 누가 봐도 물대포에 의한 외인사임에도 ‘병사’라며 부검의 알리바이를 제공했다. “미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하기 위해서 태어났다”는 안티고네의 외침이 서럽도록, 여기는 그렇게 여전히 야만의 나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