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디스토피아로부터
[조광희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죽여주는 여자와 죽여달라는 남자

※소셜미디어에서 “몸을 어떻게 팔 수 있나? 그건 빌려주는 거다”라는 주장을 본 적이 있다. 그럴듯하다 생각하여 이 글에 사용한다. 이 글에는 영화의 줄거리가 일부 포함되어 있다.

며칠 전 이재용 감독의 신작 <죽여주는 여자>의 상영회가 있었다. 오래전에 각본을 읽었기 때문에 내용은 알고 있었다. 의미심장한 이야기였지만 제작비를 쉽게 구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뜻밖에도 짧은 시간에 마련한 모양이다.

이 영화를 볼 마음을 내기는 쉽지 않다. 달달하거나 감동적이거나 눈이 휘둥그레질 이야기들이 즐비한데, 할아버지들을 상대로 몸을 빌려주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왜 보아야겠는가. 취향이 독특하거나 인류애가 넘치는 사람이 아니라면 또는 제작진의 지인이 아니라면 하기 어려운 선택이다. 몬트리올국제영화제에서 각본상과 함께 윤여정씨가 주연상을 받았다는 소식으로 만듦새가 만만치 않을 거라고 짐작은 했지만, 초청이 없었다면 스스로 영화관에서 관람했을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오프닝 크레딧이 흘러가면서 나는 점점 영화에 몰입했다. 줄거리를 기억하고 있었음에도 두 시간 가까운 러닝타임이 전혀 길게 느껴지지 않았다.

주인공 소영(윤여정)은 끔찍한 세월을 견뎠고 지금도 통과하고 있지만, 고통스럽다고 징징대지 않는다. 감독과 배우들은 난감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을 우리와 별로 다르지 않은 사람들로 묵묵히 묘사한다. 그 무심한 듯 따뜻한 태도는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을 사로잡는다. 어떤 점에서 소영과 그 주변인들은 부박하기 이를 데 없는 이 시대 평균인들보다 훨씬 견실한 마음의 소유자로 보인다. 물론 그 마음속 회한과 휘몰아치는 폭풍에 대해 우리가 뭘 알겠는가. 성적 만족을 주는 데 능란한 ‘죽여주는 여자’가 피치 못해 죽음을 원하는 사람들을 ‘정말로 죽여주는 여자’로 도약할 때, 우리는 소영이 그토록 담담하게 자신의 피부 안에 가둬둔 마음의 심연을 비로소 가늠하게 된다. 그녀가 성적으로 죽여주었던 남자들을 실제로 죽여줄 때, 그것은 범죄인 동시에 베풂이고, 해방인 동시에 살인이다.

이 영화가 한국의 이지러진 현대사나 노인 문제를 환기시키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러나 그런 배경이 영화에 두터운 현실감을 제공하지만 정작 영화는 무엇보다 인간 실존에 대한 이야기다. 살기 위해 몸을 빌려주는 사람과 그것이라도 빌려야 하는 사람들. 그들 모두 병들고 고립되고 존엄을 잃어가는 생의 마지막 장에서, 다시 한번 자신을 빌려주는 소영의 이야기는 우리를 먹먹하게 한다.

이 무상하고도 절박한 이야기가 펼쳐지는 공간들은 집에서 멀지 않다. 주말마다 그 거리와 산자락을 거닐며 마음을 가다듬고 체력을 가꾸었건만 이제는 익숙했던 풍경과 마주치는 사람들이 다르게 보인다. 배회하던 소영이 눈에 어른거린다. 소영에게 죽여달라 애원하던 노인들이 눈에 밟힌다. 이 영화는 나와 전혀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로 치부했던 이들을 이웃이나 지인처럼 느끼게 해주었다. 나는 영화를 보면서 ‘저런 삶도 있구나’ 하고 느끼기보다는 그들을 삼킨 운명이 내게도 다가오고 있다고 느꼈다. 나는 그 점이 이 영화의 가장 좋은 점이라고 생각한다.

관련영화

관련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