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절 논란부터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 논란까지, 언젠가부터 한국 현대사는 우리 사회에 분란을 일으키는 애물단지처럼 여겨지게 되었다. 그러는 와중에 정작 중요한 ‘우리가 살아온 이야기’로서의 현대사마저 밀쳐두고 있는 건 아닐까?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우리의 할아버지·할머니·아버지·어머니·삼촌·이모들이 살아온 이야기를 더듬으며 지금까지 우리가 알아왔던 한국 현대사에 대한 편견을 깨보자. 바로 요즈음 각광받는 역사 읽기의 신조류 ‘한국현대 생활문화사’를 소개한다.
군대 가야 사람 된다?
지난 ‘최고급품 쓰고 꿀꿀이죽 먹던 1950년대로의 여행’에 이어 1960년대를 찾아간다. 예나 지금이나 군대란 피하고 싶은 곳이다. 1960년대에도 마찬가지였다. 1961년 6월9일 병역의무 불이행자 자수 기간을 정했는데, 10일 동안 무려 24만명이 신고할 정도였다. 많은 이들이 피하는 곳이었지만, 한편으로 사람들은 “군대 가야 사람 된다”는 말을 입에 올렸다. 지금은 가당치도 않은 말이지만, 이 말에는 역사적 맥락이 담겨 있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일제강점과 전쟁의 참화를 겪은 대다수의 농촌 청년들이 문맹이었고, 전근대적인 인습과 가치관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들은 군대를 감으로써 비로소 글을 배우고 자동차, 무기, 통신장비 등 기계문명을 접할 수 있었다. 단체생활을 통해 규율과 협동, 복종을 배우고 졸병들을 거느리면서 통솔력과 지도력, 사람 다루는 법도 익혔다. 또 1960년대 초반에는 농사기술을 배워 제대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군대를 갔다 오면 사람이 달라져 오니 “군대 갔다 와야 사람 된다”는 말이 생길 법도 했다.
신파극의 전형이 만들어지다
1960년대는 또한 오늘날의 한국영화계가 자리를 잡아가는 시대이기도 했다. 군사정권의 무차별 검열에도 불구하고 한국영화는 꾸준히 대중 속으로 파고들었다. 1950년대 중반까지 10편 내외에 머물던 한국영화의 연간 제작편수가 1959년에는 100편을 넘어섰고, 일제강점기 때부터 있던 극장을 비롯해 아카데미극장(1958년), 피카디리극장(1959년)이 들어서며 일반인이 영화를 관람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다. 이를 기반으로 신상옥 감독의 <성춘향>이 서울 관객 38만명이라는 흥행기록을 세우는 등 대중상업영화들이 쏟아져나왔다. 많은 이들이 기억하는 <미워도 다시 한번>도 그중 하나이다. 이 영화 역시 서울 관객 38만명, 대만과 일본 수출 등의 대기록을 세운 바 있다. 이후 사연 많은 주인공들이 얽히고설켜 만들어내는 한국적 신파극이 봇물을 이루었다. 아이의 장래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는 엄마, 재벌 집안에 들어가 고초를 겪는 여성의 이야기 등은 모두 1960년대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녀노소 불문 야간통행금지!
1962년 6월부터 20여년 동안 밤 외출은 불법이었다. ‘조국 근대화’를 외치면서부터는 가난도 하루빨리 사라져야 할 비정상적인 것이 되었다. 이것도 불법 저것도 불법인 때에 사람들은 금지곡을 틀고, 난도질당한 영화를 보고, 언제 폐간될지 모를 잡지를 펼쳤다. 흘러간 옛이야기라고 하기에 1960년대는 오늘날까지 너무도 생생하게 남아 있다. 생활문화사는 우리의 부모 세대들이 키워왔던 열망을 하나하나 살필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될 것이다. (<한국현대 생활문화사: 1960년대> 참조, 다음 회에 계속)
아카데미극장 앞의 인파. 1960년대는 영화 문화 전반의 인프라가 구축되며 영화가 새로운 대중문화로 자리잡게 되었다. 일제강점기부터 있던 극장 외에 아카데미극장, 피카디리극장 등이 1950년대 말 새로이 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