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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원의 도를 아십니까] 마술사의 도(道)

<나우 유 씨 미: 마술사기단> <대마술사> <프레스티지> 등으로 본 마술사의 도(道)

<프레스티지>

전대 학생회가 남긴 빚더미에 시달리던 황폐한 대학 시절, 어떻게든 빚을 갚기로 결심했다. 그래야 남은 1년간 무위도식하며 새로운 빚더미에 앉을 수 있을 테니까.

첫 번째 시도는 대규모 야외 행사가 많은 연말을 노려 따끈하게 데운 정종과 어묵을 파는 거였다. 산 중턱에 자리한 우리 학교는 11월만 돼도 한겨울 혹한을 자랑하는 중부 산간지역, 일기예보를 볼 때면 강원도 기온을 찾아보는 편이 나은 서울 시내의 툰드라 지대라고 할까, 캠퍼스에서 하산하면 일단 하의 한벌을 벗으면서(스타킹 위에 레깅스, 레깅스 위에 바지를 입고 다녔다) 가본 적도 없는 겨울 산행의(여름 산행이라고 가본 적 있을까마는) 기분을 만끽하는 나날이었다. 그래서 나는 자신 있었다. 정종 포차를 열면 추위에 얼어붙어 살아 있는 시체가 되어가던 수백명의 학생들이 좀비떼처럼 몰려들겠지, 정종행. 지나치게 많이 벌어 돈방석에 올라앉으면 어떡하나, 다른 단과대를 상대로 돈놀이라도 해야 하나.

마침내 결전의 날, 바람은 매서웠고 공기는 살얼음이었다. 노스페이스도 없던 시절, 아니 어딘가에 있긴 있었겠지만 어쨌든, 헐벗은 학생들은 무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말든지 뜨거운 정종을 내놓으라며 몰려들어 아우성을 쳤다. 그리고 나는 돈다발을 쓸어담으며 흐뭇… 하기는커녕 한잔도 못 팔았다, 재료비만 날렸다. 부탄가스가 얼어서 불이 붙지 않았던 것이다. 역시 중부 산간지대, 3X년 인생에 부탄가스가 얼었던 건 그때뿐이었다.

그렇게 빚은 쌓이고 쌓여 빚 독촉에 시달리다 못해 학생회실 전화를 끊어야 하나 고민하던 어느 날, 마침내 선배 한명이 결단을 내렸다. 이렇게는 못 살겠다, 미안하지만 학우들을 등쳐먹어야겠다. 그 선배는 알아주는 인문대 사기꾼. 아아, 그 순간 선배의 드넓은 어깨 뒤로 후광이 떠오르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렇게 선배는 축제에 나가 야바위판을 차렸다. 먼 옛날 학원 민주화를 외치는 선배들이 모였다던 신성한 역사의 광장에….

그래서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부채의 첫 자릿수가 바뀌었다, 높은 쪽으로. 그러면 그렇지, 우리가 무슨 사기를 쳐. 그런 재주가 있었다면 한겨울에 살얼음 낀 정종 한잔 마셔봐, 댓병 들고 나발 불면 뜨거운 정종이 부럽지 않아, 이거 먹고 후끈해진다고 내복 벗으면 우리가 그거 살게, 19XX년 F/W 신상 가격으로. 학우들 정신 못 차리게 구라를 쳤겠지(이렇게 써놓고 보니 한번 해볼걸 그랬다).

<나우 유 씨 미: 마술사기단>

나중에 알고 보니 야바위는 전문 마술 용어로 ‘컵앤볼’이라 불리는 기술로서, 배우들도 따라하기가 힘들어 야바위 장면을 찍을 때면 마술사를 대역으로 고용해야만 한다고 했다. 선배, <나우 유 씨 미: 마술사기단> 보니까 카드 마술 하려면 하루에 여덟 시간씩 1년 넘게 연습한다고 하더라. 사기도 노력이 필요해. 그리고 우리는 노력을 하느니 전화 없는 삶을 택할 인간들이지, 얼마나 좋아, 아날로그의 슬로 라이프.

이 또한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부탄가스는 영하 10도가 되면 연료로 기능할 수 없다고 했다. 1월도 되기 전에 영하 10도라…. 그런 학교를 폴리에스테르 100%의 파카를 입고 (이수 학점이 모자라) 5년씩이나 다니면서 얼어죽지 않고 잘도 살아남았구나.

<대마술사>

영화 <대마술사>의 대마술사 장현(양조위)은 마술사가 사기꾼이라는 연적(戀敵)의 말에 마술사는 꿈을 만드는 사람이라고 받아치지만, 꿈이고 사기고 소용없다. 마술의 도(道)는 과학의 도, 우리가 과학을 알았다면 부탄가스 대신 장작을 땠겠지. 어떤 마술 프로그램을 보니까 그 비밀을 설명하면서 숫자의 알고리즘을 적용했다고 하던데, 이런 거였다면 마술의 비밀을 폭로한 마술사 타이거 마스크는 어째서 살해 위협까지 받았던 걸까. 나는 봐도 모르겠어.

하지만 마술사가 지나치게 과학에 집중하면 본질을 잃는 수가 있다. 마술의 마지막 단계를 뜻하는 제목의 영화 <프레스티지>는 라이벌의 순간이동 마술을 모방하려고 애쓰는 마술사가 주인공이다. 라이벌과는 다르게 금수저 귀족 출신으로서 돈을 아끼지 않는 그는 전설적인 괴짜 과학자 테슬라까지 만나 실험 비용을 대지만 결국 그 마술의 비밀은 아날로그. 거긴 아무 비밀 없다며 몸으로 때우라고 주장하던 조수 할아버지를 무시하더니 제대로 당했다. 그거 봐, 역시 아날로그라니까.

또한 과학을 알아야 한다며 공부만 해선 안 된다. 영화 <데스 디파잉: 어느 마술사의 사랑>의 주인공이자 전설적인 탈출 마술의 대가 해리 후디니(가이 피어스)는 매일 두 시간 동안 15km를 달린다고 말한다. 그래야 자물쇠 따고 금고 열고 나올 수 있나 보다. 그렇게 체력을 단련한 해리는 새로운 도시에 도착할 때마다 아무 도전자나 복부에 주먹 한방을 때릴 수 있게 하는 것이 트레이드 마크였는데, 결국 그러다 복부 괴저로 사망했으니 차라리 공부를 할걸 그랬지, 배 나오더라도.

이처럼 많은 마술사가 마술은 과학이라 주장하고 어떤 마술사는 체력이 있어야 마술을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모든 마술사가 인정하는 건 마술은 눈속임이라는 사실이다. 관객이 시선을 돌리는 순간, 그 시선의 사각지대에서 모든 트릭이 일어난다. <프레스티지>에 의하면, “마술사 세계에 진실이란 없다”.

그러고 보면 연예인 스캔들 뉴스가 나올 때마다 음모이론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이번엔 무슨 뉴스를 덮으려고 이러는지 모르겠다고 투덜거리는 것도 이해가 간다. 하지만 누군가가 사람들의 시선을 돌리려고 한다는 사실보다 중요한 건 이게 아닐까, <프레스티지>에서 말하듯이, 마술에 속는 사람들은 그 트릭을 “알아낼 수도 없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속고 싶어 한다”.

머리로는 지지 마라

만약을 대비해 마술사가 예비 동원군으로 확보하면 좋을 두세 가지 것들

<프레스티지 >

미인을 동원한다

천계영의 <드레스 코드>는 체형의 결점을 보완하면서 옷 잘 입는 법을 알려주는 만화다. 이 만화에 따르면 시선을 위로 끌수록 키가 커 보이기 때문에 키가 작은 사람들은 얼굴이나 목 부근에 화려한 액세서리를 하면 도움이 된다. 고로 얼굴이 예쁘면 키가 커 보인다…. 하, 사는 게 뭐 이래. 어쨌든 그래서 마술사들은 예쁜 조수를 써야 한다. <프레스티지>의 마술사 앤지어(휴 잭맨)가 새 조수로 올리비아(스칼렛 요한슨)를 쓰는 것도 그쪽으로 시선을 돌려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에도 블루 오션은 있으니 <오싹한 연애>와 <조선마술사>는 웃기게 생긴 조수를 기용한다. 어찌 됐든, 시선은 가니까.

<대마술사>

기술을 동원한다

중국영화의 세계는 신비롭기도 하지. 동네 꼬마나 골목길 만두 장사도 쿵후를 하는 것이 중국영화다. 영화 <대마술사>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뭔가 불리하게 돌아간다 싶으면 마술사 포함해 출연진 전원이 무술 고수로 돌변한다. <조선마술사>의 환희(유승호)도 알고 보면 검술사. 마술만 하고 살기도 힘들 텐데 이 불확실한 시대에 역시 사람은 투잡을 준비해야 하는 것인가.

<조선마술사>

두뇌를 동원한다

아무리 투잡 시대, 두렵지 않을 기술이 있더라도 머리가 받쳐주지 않으면 안 된다. <조선마술사>의 환희를 보라, 여자친구 떼쓰는 거 받아주다가 자기 마술.단에서 홀로코스트급 복수극이 벌어지는데도 모르지, 명색이 마술사인데 트릭 하나 못 깨지. 얘는 마술 배우다가 좋은 청춘 다 갔다는데 뭘 해도 좋은 청춘 다 갔을 거 같다. 그러니까 누나 그만 욕해, 너 뒷바라지하다가 시집도 못 갔잖아. <나우 유 씨 미: 마술사기단>에서 이르듯이, 마술사라면 “상대가 누구든 머리로는 지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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