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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그날의 분위기
김혜리 2016-09-28

※<밀정>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할머니의 먼 집>

“올해는 꼭 죽어야 쓰것는디.” 다큐멘터리 <할머니의 먼 집>의 주인공이 털어놓는 여망은, 관심을 호소하는 외로운 노인의 제스처가 아니라 진담이다. 열여덟살에 결혼해 가족을 보살피는 보람만 알고 살아온 여인은, 자식을 여의고도 살날이 다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고역으로 느낀다. 매일 그녀의 손길을 요하는 살아 숨쉬는 존재는 이제 마당의 식물뿐이다. 돌연 아들을 앞세운 해, 심은 적도 없는데 돋기 시작한 화초들을 보며 할머니는 놀란다. “내가 꽃 좋아하는 걸 알고 하느님이 꽃나무를 뿌려주셨나보네.” 그녀의 목소리에는 고마움과 더불어, 지친 당신을 구태여 지상에 붙드는 신의 의지에 대한 탄식이 서려 있다. 장성한 손주와 노쇠한 자식들의 걸음도 뜸해진 집. 박삼순씨는 안방 미닫이에 풀밭과 나비 그림 스티커를 붙여 마당을 집 안에 들인다. 잠든 할머니는, 나비를 꿈꾼다.

09/10

10년 떨어진 시대적 배경을 택한 일제강점기 드라마 <밀정>(2016)과 <암살>(2015)은 얼추 비슷한 얼개를 취한다. ‘조선-상하이-경성 작전의 실패-복수’의 순서로 두 영화의 이야기는 흘러간다(<암살>의 경성 작전은 클라이맥스, <밀정>의 그것은 안티 클라이맥스다). 또한 두 영화의 중심인물 가운데에는 같은 자리에서, 반대 방향으로 운동하는 염석진(이정재)과 이정출(송강호)이 있다. 감독이 사로잡힌 강렬한 ‘장면’을 연결하기 위해 이야기가 조직된 것처럼 보였던 김지운의 전작에 비해 <밀정>은 플롯과 스토리에 공을 많이 들인 영화다. 내실의 보물 거래에서 시작해 기차의 모험을 거쳐 인물들을 흩어놓는 결론은 전작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2008)의 기시감을 불러일으키지만 <밀정>은 인물의 사회적, 역사적 주소에는 무심해 보였던 김지운의 영화로서는 새롭게도 “누구나 때가 오면 궁극적으로 제 이름을 올릴 곳을 정해야 한다”는 인식에까지 도달한다.

그러나 여전히 <밀정>은 앞에 나열한 유사점들이 무색하게도 관객에게 <암살>과 딴판의 영화로 느껴진다. <밀정>에서 이야기의 역학은, 결코 최동훈 영화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갖지 못한다. 김지운은 관객이 드라마의 기승전결에 몰입하기에 앞서 영화가 그려놓은 시공을 둘러보고 음미하기를 원한다(적어도 의열단이 경성역에 도착하기 전, 영화 3/4 지점까지는 그렇다). 인물에 대해서도 그가 우선적으로 전달하고 싶어 하는 것은 역동적인 밀고 당김이라기보다, ‘배치’인 것처럼 보인다. A는 B와 마주본다, C는 A와 B 사이를 갈라놓는다, B와 D는 대치하다가 비스듬히 나란한 자리로 옮긴다…등등. 이 시야를 확보하려면 우리는 약간 뒷걸음질 칠 필요가 있다. 최동훈은 관객이 뛰어들길 바라고, 김지운은 관객이 한발 물러나길 바란다

<밀정>은 장르와 고전의 인용을 통해 1920년대와 관객 사이에 미적 관조의 거리를 확보한다. <위대한 레보스키>의 잘린 발가락(물론 무수한 마피아영화에서 배달된 잘려진 신체 말단 부위), <펄프 픽션>의 금시계, <히트>의 적과의 우호적 독대, <그림자군단>(<밀정>의 영어 제목 ‘Age of Shadows’는 이 영화에서 비롯된 듯하다)의 레지스탕스 연쇄 체포, <제3의 사나이>의 활엽수길 등이 우리가 역사 및 영화에 관한 영화를 보고 있음을 정직하게 환기시킨다. 상하이에서 긴장한 주인공들이 골목을 걸을 때마다 무심히 스쳐가는 자전거, 우산을 쓴 노파, 빨래 터는 여인은 영화 속 긴박한 사건이 누군가에겐 먼지만큼 사소함을 말하는 “이 또한 지나가리라”의 이미지다. 크시슈토프 키에슬로프스키의 영화에서, 더 장구한 시간, 더 넓은 세계를 불현듯 상기시키는 거리의 노파들처럼. <밀정>에서 김지운 감독이 세심하게 구축한 이 미장센과 무드를 완성하는 요소는 재미있게도, 이병헌이 연기하는 인물 정채산이다. 이를테면, 의열단장 정채산이 이정출을 설득할 때 구사하는 말은 다분히 무협의 언어다(<묵공>에서 두 장수가 잠시 전투를 멈추고 장기를 두는 일화도 떠오른다).

앞서 다른 장면에서 “마음의 움직임이 가장 무서운 것 아니겠소?”라고 정채산이 동지들에게 물을 때 <달콤한 인생>의 “움직이는 것은 너의 마음일 뿐”이라는 대사를 추억하는 관객은 나만이 아니었을 터다. 요컨대, 존재의 목적(국가)이 사라졌는데도 목적에 봉사함으로써 존재를 지탱하는 근 사한 인물 정채산은 캐릭터라기보다 의인화된 분위기이고 대의다. 이병헌을 포함한, 김지운 감독의 ‘구성된 1920년대’ 맞은편에서, 송강호의 이정출은 현실의 포스로서 홀로 줄을 잡아당겨 균형을 잡는다. 망설이고 허튼소리를 하기도 하고, 판단해서 행동하는 만큼 행동으로 말미암아 생각 하기도 하는 그는 이 스타일리시한 영화의 개인적, 역사적 차원을 담보하는 알리바이다. 내적인 구도가 이러하기에 <밀정>이 정채산을 퇴장시키고 다시 캐릭터 김우진(공유)을 영화의 양대 축으로서 이정출과 마주 세우려고 할 때 편집의 단정함이 흐트러진다. 정채산과 이정출의 대면을 주선한 다음 김우진이 도움을 호소하는 장면과 피날레가 그 예다.

09/11

치열한 정치적 저항을 다루고 있음에도 <밀정>의 세계는 의도적으로 미지근하다. 국가 없는 정부의 내부자들은 투쟁의 지리멸렬함에 지쳐가고, 나머지 세계의 보통 사람들은 기약도 방향도 없이 괴어 있는 시간에 잠겨 있다. 임시정부에 몸담았다가 대단한 존재론적 결단 없이 일본 고등경찰로 전신한 이정출은 매국노라기보다, 1990년대로 치면 대기업에 취직한 운동권 학생 정도의 위치로 보인다. <밀정>은 이 대목에서 나서서 인물을 판단하지 않는다. 진행 중인 역사의 당위는 회고하는 이들의 눈에 보이는 만큼 선명하지 않다. 역사에는 수많은 망국(亡國)이 있었고, 사람들은 “나는 일본 신민으로 평생 살다 죽을 수도 있다. 어디에 인생을 쓸 것인가”를 결단해야 한다. 그처럼 정체된 세계에 어울리게 <밀정>의 액션은 카타르시스를 비껴가거나 혹은 밀폐 공간-기차-에 담긴다. 영화에서 가장 규모 큰 액션인 오프닝의 김장옥(박희순) 체포 시퀀스와 경성역 신은 패배의 풍경이고 일본제국주의와 독립군 세력의 한판 대결이라기보다 독립군 세력 내부의 실패를 드러내는 무대다. 오프닝 시퀀스의 또 다른 흥미로운 기능은 이정출의 자리매김이다. 첫 등장부터 이정출은 사건이 일어나는 저택에, 그리고 저택 내부의 장소들에 매번 일본군의 주력과는 다른 방향으로부터, 다른 시점에 도착한다. 그는 군대보다 먼저 김장옥에게 닿기 위해- 그래서 구명하기 위해- 혼자만 알고 있는 모종의 근거에 의지해 따로 움직인다. 대조를 최대화하기 위해 부대와 이정출의 동선은 주로 직각으 로 교차한다. 여기서 동선의 논리는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충분히 스펙터클로도 즐길 만하지만, 이 시퀀스의 궁극적 목표는 이정출이라는 인물이 영화에서 외따로 움직이는 포스이고 독립군에 접근하는 각도가 다름을 제시하는 것이다. 장황하지만 이유 있는 ‘일러두기’인 셈이다. 내가 왜이래야 하는지 스스로도 모르는 채 일본 경찰보다 앞질러 의열단에 닿기 위해 분투하는 이정출의 운동은 20여분간 지속되는 경성행 열차 시퀀스에서 재연된다. 영화 전체를 축소한 미니어처 같은 이 대목이 끝날 즈음 송강호는 앞뒤로 왕복하기를 멈추고 <설국열차>와는 딴판인 이유로 다시 열차 옆구리로 굴러떨어진다. 가만, 따지고 보면 딴판도 아닌가? (다음에 계속)

<고스트버스터즈>

좋 아 요

적절한 만둣국

슬랩스틱은 코미디언 멜리사 매카시의 장기 중 하나다. 그리고 많은 시나리오들은 할리우드 기준 과체중과 (그 원인으로 곧장 지목되는) 그녀의 식탐을, 신체 개그의 중요 포인트로 매카시에게 할당해왔다. 40대 여성 4인조로 리부트된 <고스트버스터즈>에서도 애비(멜리사 매카시)가 중국집에서 배달된 만두 하나 든 만둣국에 분노하는 상황이 반복된다. 그러나 폴 페이그 감독은, 이 러닝 개그를 애비가 남달리 식욕이 과해서 뚱뚱한 여성이라는 전제와 연결시키는 대신, 고객의 불만에 모 아니면 도로 대응하는 중국 식당의 서비스에 대한 농담으로 쓴다. 마치 반항하듯 배달된, 만두로 꽉 찬 국을 받아든 애비는 일갈한다. “난 다만 적당한 비율을 원한다고!” 물론 이 대사는 기울어진 할리우드의 성비를 향한 <고스트버스터즈>의 슬로건으로도 쓸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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