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더지>

2016년 한국영화는 부재중이다. 극장에 걸어놓기만 해도 관객이 드는 요즘인데 무슨 엉뚱한 소리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영화가 사회를 투사하는 거울이라면 현재 한국영화라는 거울이 열을 올려 비추는 건 무언가의 빈자리, 혹은 그저 비어 있다는 상태다. 때론 그 빈자리에 맹목적인 욕망이 들어차기도 한다. 어느 쪽이건 현재 극장가를 점령하고 있는 영화들 사이에서는 무언가 비어 있다는 의심, 다시 말해 부재중인 상태만이 분명하게 감지된다.

시스템의 부재라는 만능키

한국영화가 시스템의 부재를 묘사하는 데 매달린 건 오래된 일이다. 신뢰할 만한 정의와 온당한 과정이 사라진 환경은 서사적으로 접근해도 갈등을 부각시키는 효과적인 장치다. 인물은 부조리한 상황에 내던져지고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 갈등한다. 심지어 매일 영화 바깥에서 그 부재를 느끼며 하루하루 자력갱생의 길을 모색해야 하는 불안의 시대를 거치고 있는 우리는 영화를 적극적으로 독해해나갈 준비가 되어있다. 세월호 사건 이후 많은 영화가 세월호의 그림자 속으로 들어가는 건 그런 이유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 하기에 현실은 이미 서사적으로 이해되고, 영화는 너무 현실적으로 묘사된다. 우리는 이 둘 사이 경계를 쉽게 구분할 수 있을 거라 믿지만 그 막은 생각보다 얇고 투명해서 쉽게 서로의 세계로 침투한다. 이때 필요한 것이 작가의 통제와 조율이다. 영화적 상상력을 어느 지점에서 발휘해야 할 것인지 선택하는 것이 작가의 역할 전부라고 해도 좋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한국영화는 ‘시스템의 부재’를 마법의 키로 남용하고 있는 것 같다. 모든 문제의 원인을 시스템의 부재, 공권력의 무능으로 환원시키는 태도는 ‘어쩔 수 없는 운명’이라는 체념의 말처럼 들릴 때도 있다. 그렇게 확보된 시간적 여유를 어디에 할애하는가를 살펴보면 최근 한국영화라는 거울에 낀 얼룩의 형태를 그릴 수 있을 것이다. 2016년 여름 극장가를 점령한 영화들은 무엇을 보여주기 위해 무엇을 생략했는가. <터널>은 정수(하정우)가 터널에서 구조되는 과정을 생략해버린다. 자신의 죽음에 동의한 아내와 아무 문제 없이 재결합할 수 있을지 생존자의 무게가 궁금하지만 영화는 이에 응답하지 않는다. 구조된 이후에 겪어야 마땅할 트라우마를 지워버리고, 상쾌하게 웃으며 터널을 통과하는 엔딩으로 모두의 죄책감을 함께 씻어내려 할 따름이다.

대신 그렇게 확보된 시간을 메우는 건 무능력한 재난 대응 시스템과 무분별한 미디어의 욕망, 인명을 숫자로 치부하는 잔혹함이다. 매일매일 영화보다 영화 같은 현실을 버티고 있는 우리에겐 미디어를 통해 이미 직간접적으로 학습된 생존법칙이기도 하다. 요컨대 영화는 도처에 깔린 ‘재난’이라는 상태를 일대일로 조명하는 것에 그친다. 여기엔 어떤 질문이나 판단도 없다. 달리 말해 작가로서 세월호라는 재난에 대한 해석이 부재하다. 그리하여 남는 건 기능적으로 소비된 ‘재난의 잔재’들 뿐, 상황을 직시하고 받아들이는 애도의 과정과는 거리가 멀다. 이것이 단지 게으름의 결과인지 의도된 외면인지는, 혹은 아직 충분히 숙고할 거리를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인지는 알 길이 없다.

<덕혜옹주>는 좀더 심각하다. 허진호 감독이 <덕혜옹주>를 제작한다고 했을 때 내가 궁금했던 건 대마도주 소 다케유키와 혼인한 이후 인간 이덕혜의 삶이었다. 덕혜옹주는 결혼하고 딸까지 낳았는데 왜 어느날 딸이 자살을 했으며 그 자신은 이혼을 한 후 정신병원에 수감되었는지, 그 사라진 행간에 대해 상상력을 발휘할 수는 없었던 걸까. 굳이 망국의 옹주라는 조건을 덧씌우지 않아도 충분히 질문해볼 수 있는 고단한 인생이었지만 영화는 정작 인간 이덕혜의 삶에 무신경하다. 대신 ‘순진하고 가여우신 우리 공주님’이란 인물의 위치로 모든 상황을 환원시킨다. 다시 말해 옹주가 아닌 덕혜는 아무것도 아니다. 여기엔 다시 망국의 한을 겪지 않도록 일치단결하자는 불순한 욕망이 일정 부분 깔려 있을지도 모르겠다. 굳이 거기까지 나아가지 않더라도 답을 정해놓고 발휘되는 상상력은 서사를 좀더 매끈하게 다듬는 역할 이상을 하지 못한다. <터널>이 게을렀다면 <덕혜옹주>는 뻔뻔하다. 2016년 한국영화가 사회를 투영하는 방식은 대략 이 두 가지로 요약되는 것 같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작가의 부재

시대정신이란 작가가 몸으로 현실을 체험하고 사실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소화하여 토해내는 결과물에 가깝다. 정확히는 답변보다는 질문하는 태도이며 작가의 질문이 관객 각자에게 공명하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 특히 현실과의 경계가 이토록 얇은 영화는 서사와 재현의 위험성을 끊임없이 경계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한국영화에서 이같은 고민은 ‘시스템의 부재’라는 주제를 꺼낸 이후 휘발되어버린 건 아닌지 걱정스럽다. 봉준호 감독의 <괴물>(2006)이나 나홍진의 <추격자>(2008)는 시스템의 부재를 고발하고 우리가 이토록 불안한 사회에 살고 있다는 것이 증명되는 순간 걸음을 멈췄고, 그 결과 관객의 마음속에 얼룩을 남긴다. 하지만 <부산행>과 <터널>은 깔끔하게 정리되는 해피엔딩으로 얼룩을 지워버린다. 이 순간 생략되어선 안 되는 것들, 대상에 대한 신중한 관찰과 이해의 시간마저 함께 쓸려 내려간다. 재난 이후 남겨진 자들이 되뇌어야 할 질문들은 끼어들 틈이 없고 서사와 기능적 소모, 상업영화라는 변명만이 남는다. 이러한 태도를 ‘그저 영화 한편’이라고 하기엔 이 영화들의 모든 장면들이 현실과 너무 가깝고 영화는 여전히 힘이 세다.

“감독은 영화의 창조적 원천을 통제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는 <카이에 뒤 시네마>의 작가정책에 관한 해묵은 논쟁을 잠시 꺼내야겠다. 예술에서 자기반영성은 필수불가결한 과정이며 이는 영화도 예외가 아니다. 작가가 시대를 반영한다는 건 단지 받아쓰기가 아니라 독자적인 해석과 표현의 틀이 동반된다는 의미다. 그런 다음에야 작가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질문해본다. 지금 현재 한국영화에서 시대성을 제 한몸에 녹여내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는 작가가 존재 하는가. 2011년 동일본 대지진 이후 일본 감독들은 지속적으로 재난 이후의 풍경을 영화 속에 끌고 들어왔다. 하지만 다큐멘터리를 제외하곤 재난을 있는 그대로 찍는 영화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노 시온은 <두더지>(2011)를 통해 현재를 억압하는 아버지 세대에 대한 저항과 젊은 세대의 절박한 외침을 전달했다. “평생 큰 행복이나 불행없이 평범하게 살면 만족”이라는 주인공에게 목이 터져라 “힘내라”고 외치는 니카이도 후미의 모습은 가슴을 후벼파는 에너지로 넘쳐난다. 진심이라 불러도 좋겠다. 모두를 속박하는 가족이란 사슬에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아오야마 신지의 <도모구이>(2013)는 어떤가. 이들은 아무도 재난의 풍경에 직접 카메라를 들이대지 않지만 마음속에 재난이 할퀴고 간 상처를 품고 살아가는 각각의 얼굴을 그린다. 일본 작가들이 공통적으로 품고 있는 부채의식이 각자의 화술로 발현된 결과물이라 할 만하다. 한편 9·11 테러 이후 미국영화의 시대성은 2007년을 기점으로 확연한 변화를 드러냈다. 테러를 소재로 한 영화들이 무수히 쏟아져나온 물량의 차원만이 아니다. 2007년 제작된 코언 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프랭크 다라본트의 <미스트>, 폴 토머스 앤더슨의 <데어 윌 비 블러드>는 각자 다른 방식, 다른 장르, 다른 시점으로 9·11 이후 익숙해진 절망과 일상이 된 불안의 풍경을 그렸다.

작가라는 필터를 거친 영화적 상상력은 먼 길을 돌아 내면 깊숙이 박혀버린 상처와 마주할 기회를 제공한다. 영화란 그렇게 재구성된 시공간의 다른 이름이다. 지금 우리 주위에 재난의 풍경을 전시하는 영화들, 역사의 빈칸을 입맛에 맞게 채색한 영화들과 비교해보면 어떤가. 한때 우리에게도 <꽃잎>(1996)처럼 시대를 직설하는 영화들이 있었고, <살인의 추억>(2003)처럼 시대와 조응하는 영화들이 있었으며, <그때 그사람들>(2005)처럼 시대를 조롱하는 영화들도 있었다. 짧지 않은 시간 차곡차곡 쌓여왔다 믿었던 시선들은 지금 어디로 사라졌을까. 그동안 한국영화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역설적이지만 우리가 시대정신을 읽을 수 있는 지점은 <터널> <덕혜옹주> <인천상륙작전> <부산행> 같은 영화들이 제작되고 활발히 소비되는 상황 자체인지도 모르겠다. 문득 돌아보니 가난하고 게으르며 순진한 영화들만이 우리를 위로한답시고 손 내밀고 있다. 영화 속 공권력의 무능을 비웃으며 손가락질하던 관객은 극장 밖을 나서는 순간부터 세상으로부터 조롱 당한다. 망망대해 한가운데 눈길 닿는 곳 모두 물이지만 갈증을 달랠 길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