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장 좋아하는 <환상특급> 에피소드 중에 이런 게 있다. 소년이 부모와 함께 놀이공원에 간다. 부모는 사이가 나쁘다. 부모가 또 다투는 동안 소년은 혼자 동굴 사파리에 들어간다. 어두컴컴한 길을 따라 유리벽으로 막힌 방들이 있다. 방 안에는 부부가 한쌍씩 들어가 있다. 소년이 지나가는 동안 그들은 소년에게 우리가 얼마나 좋은 부모가 될 수 있는지에 관해 구애하고 설득한다. 사랑받고 싶어 안달이 나서 큰소리로 외친다. 마지막 방에 이르러 소년은 어느 소박해 보이는 부부를 발견한다. 이 부부는 소년에게 뭘 사줄 수 있는지 말하는 대신 사랑해주겠다고 말한다. 다음 장면에서 소년은 마지막 방에 갇혀 있는 부부의 손을 잡고 사파리를 떠나고 있다. 처음으로 환하게 웃는 모습이다. 소년의 부모는 예의 그 방에 갇혀 떠나가는 소년의 뒷모습을 향해 애타게 부르짖는다.
한편의 영화가 관객과 만나는 순간도 이와 같다고 생각한다. 대개의 영화들은 관객의 사랑을 얻길 갈구한다. 겉으로 짓고 있는 표정이 엄숙한지, 가벼운지, 시끄러운지, 우스운지, 근사한 몸짓으로 유혹을 하는지, 네가 나를 사랑해주든 말든 상관없다는 식인지와 전혀 무관하게 말이다. 모든 영화들은 관객이 자신을 선택해주길 바라고 또한 이해받기를 원한다.
유일한 차이는 영화가 관객에게 구애하는 태도로부터 발견된다. 많은 영화들이 우리가 얼마나 같은지, 얼마나 똑같은 코드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큰소리로 외치며 손짓을 한다. 그 결과 다수의 관객이 여태 수백번 되풀이해서 봤던 똑같은 이야기를 선택하고, 극장을 나서면서 지루하다고 느끼거나 시간을 잘 때웠다고 안도한다. 반면 어떤 영화들은 우리가 얼마나 다른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나는 이렇게 다른 생각과 풍경들로 가득하다고 말이다. 소수의 관객이 이런 영화를 선택한다. 그리고 극장을 나서며 내 스타일이 아니라고 투덜거리거나 묘한 두근거림을 간직한 채 며칠 동안 가슴을 쓸어내리며 영화를 떠올린다.
<비밀은 없다>를 보고 대개의 관객은 속았다고 느낄 것이다. 분명히 익숙한 장르 이야기라고 믿고 극장을 찾았는데, 정작 영화는 장르적인 소재를 전혀 장르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다루는 매우 ‘다른’ 모습이기 때문이다. 즉 <비밀은 없다>는 앞서 설명한 태도에 있어서 전자의 표정을 하고 다가와 후자의 속내를 드러내는 영화다. 장르 규칙을 각이 나오게 잘 다루어 선명한 기승전결로 허를 찌르게 하는 것이 영화가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룰이라고 믿는 관객은 이 영화의 개연성과 짜임새에 관해 매우 큰 불신을 가질 가능성이 높다. 한편 누군가는 거의 주인공 시점의 의식의 흐름처럼 전개되는 이 영화의 이상하고 특별한 공기로부터 깊은 호감을 느낄 것이다.
그저 ‘다르다’는 것이 장점이 되는 시절은 오래전에 지났다. 그러나 벽지 타입 고르듯 찍어내기 바쁜 요즘의 한국 영화산업을 되돌아볼 때 ‘다르다’는 것이 단어 이상의 매우 복잡하고 힘 있는 맥락을 가져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최근의 한국영화를 보면 기독교영화와 뮤지컬영화 찍어내기로 명맥을 이어나가다 <이지 라이더>와 코폴라 세대의 출현으로 할리우드 뉴시네마 시대가 도래하기 직전의 할리우드 시절을 보는 것 같다. 그리고 이 영화는 바로 그 시절 한심한 할리우드의 반작용처럼 등장하기 시작했던 ‘이상한 영화들’의 공기를 닮았다. 아메리칸 뉴시네마의 맹아들 말이다.
<비밀은 없다>는 주인공 딸의 실종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주인공은 젊은 정치인의 아내다. 남편은 지방 선거를 앞두고 유세 활동에 한창이다. 남편의 정당은 이 지역에서 전통적인 강세를 보여왔으나 요번에는 탈당파 무소속 의원의 영향으로 선거가 쉽게 풀리지 않는다. 선거를 보름 앞두고 본격적인 유세가 시작되던 날 딸이 갑자기 사라진다. 정황은 상대 후보가 딸을 유괴한 것 같은 모양새로 비친다. 집요하게 딸의 마지막 자취를 좇던 주인공은 충격적인 사실과 마주하게 된다.
이야기만 보면 익숙한 정치 스릴러 같다. 그러나 <비밀은 없다>는 정교하게 단서를 쌓아올려 마침내 진실에 가닿는 구조적인 영화가 아니다. 이 영화는 그런 데에 관심이 없다. 사건은 주인공의 의식의 흐름대로 서술된다. 무게중심은 주인공의 심정과 소녀들의 유대관계로 옮겨져 있다. ‘소녀는 어떻게 되었나’라는 질문을 중심에 둔 미스터리지만 스릴러의 관점으로 사건을 해체하지 않고 감정의 움직임과 사연의 자취를 좇아 마침내 진실-복수라는 결론에 이르는 것이다. 취향에 따라 극적으로 다른 감상을 낳겠지만 나는 이 영화의 모양새가 매우 마음에 들었다. 어느 영화의 ‘다름’이 곧장 성취도와 완성도로 이어지는 경우는 흔치 않다.
영화 제목과 정치 스릴러라는 단어를 적절하게 대체하면 앞의 문단은 흡사 피터 잭슨의 <천상의 피조물>을 묘사하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 <비밀은 없다>는 <천상의 피조물>과 유사한 전략으로 연출되어 있다. 사전 정보 없이 그저 뉴질랜드의 유명한 살인사건을 다룬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천상의 피조물>을 본 관객의 당혹감을 <비밀은 없다>의 관객 또한 느낄 것이다. <비밀은 없다>가 <천상의 피조물>과 같은 걸작은 아닐지언정 그만큼 다른 데서 찾아볼 수 없이 유일한 감각을 지닌 영화라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개인적으로는 <비밀은 없다>로부터 소노 시온의 초기작들, 이를테면 <자살클럽>에서 <노리코의 식탁>으로 이어지는 작품의 기시감을 느꼈다. <자살클럽>이나 <노리코의 식탁>을 당대 일본 사회에 대한 영화적 반응으로 해석한다면 <비밀은 없다>는 다소의 시간차를 두고 유사하거나 더욱 격화된 갈등을 겪고 있는 한국 사회를 향한 답변일 것이다.
앞서 설명했다시피 지금의 주류 한국 영화시장에서 ‘다르다’는 것을 증명하려면 많은 것을 감수해야 한다. 제작자나 투자자를 속여야 할 수도 있고 어떤 경우 감독에 대한 배우의 신뢰 또한 배반해야 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 영화가 만들어지는 오랜 시간 동안 자기만의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 ‘미쳐’ 있어야 한다.
그저 독특한 호흡을 가진 이야기꾼으로 생각되었던 <미쓰 홍당무>의 이경미 감독은 <비밀은 없다>로 충무로에서 가장 놀라운 감독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