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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 듀나의 원작 소설 <핑거스미스>와 박찬욱의 <아가씨>

<아가씨>

박찬욱의 여자주인공들의 가장 큰 특징은 그들 대부분이 번역된 캐릭터라는 것이다. 박찬욱의 영화에는 일반적인 한국영화나 문학이 습관적으로 해석해 내미는 ‘한국 여성’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스토커>(2013)의 인디아(미아 바시코프스카)는 미국인이고 <공동경비구역 JSA>(2000)의 소피(이영애)는 스위스인이다. <박쥐>(2009)의 태주(김옥빈)는 에밀 졸라의 <테레즈 라캥>에서 가져온 인물인 데다가 심지어 뱀파이어다. <싸이보그지만 괜찮아>(2006)의 영군(임수정)은 일본 만화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보인다. <친절한 금자씨>(2005)의 금자(이영애)의 국적을 따지는 건 힘든 일이지만, 이 인물을 한국 여성의 전형성 틀에 맞추는 건 더 힘든 일일 것이다.

이들 영화에서는 일반적인 한국 여성 캐릭터를 정의하고 결박하는 고정된 테마들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다시 말해 그들이 한국영화에 나오는 동료들과 다르게 행동하는 것은 그들이 어느 정도 외국인이기 때문이다. 번역의 과정은 그들에게 여분의 자유를 준다. 그 자유는 종종 원작의 주인공들도 온전히 누리지 못하는 것이다.

<아가씨>(2016)의 숙희(김태리)와 히데코(김민희) 역시 이런 번역의 과정을 거친다. 이들의 원형은 빅토리아조 영국을 배경으로 하는 세라 워터스의 소설 <핑거스미스>의 주인공 수와 모드이다. 히데코는 일본인이고 이들 대사의 상당부분이 일본어로 진행되니, 또 번역의 층이 생겨난다. 번역의 과정을 본다면 이 작품은 지금까지 나온 박찬욱 영화 중 가장 복잡하다.

재미있는 것은 이 영화가 <공동경비구역 JSA> 이후 나온 박찬욱의 영화 중 한반도라는 공간의 특수성에 가장 신경을 쓴 작품이라는 것이다. <박쥐>나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는 무대가 어디여도 이야기나 주제가 특별히 바뀌지 않는다. 하지만 <아가씨>를 지배하는 일본색은 이들 사건이 벌어지는 공간이 일제강점기의 조선이기 때문에 고유의 의미를 가진다. 같은 이야기를 일본으로 옮긴다면 몇겹의 레이어가 사라져 얄팍해질 수밖에 없다. <아가씨>에서 1930년대 일제강점기의 조선이라는 배경은 지워낼 수 없다.

이런 배경은 대부분 캐릭터의 행동을 제한한다. 특히 한국영화에서 이 시대배경의 영화를 만든다면 캐릭터들은 모두 미리 정해진 각각의 팀으로 들어가며, 그 안에서 팀원 또는 팀의 배반자로 활동하게 된다. 여기에 젠더의 선입견을 끼얹는다면 행동반경은 더 좁아져버린다. 만약 히데코 아가씨를 속이러 들어간 조선인 소매치기가 남자였다고 생각해보자. 한국 관객은 이 남자가 일본인 여자와 사랑에 빠지는 걸 어떻게 생각할 것이고 그 남자가 어떻게 행동하길 바랄까? 반대로 일본인 귀족이 남자라면 소매치기 숙희는 관객에게 어떤 사람처럼 보일까?

<아가씨>는 1930년대라는 시대와 조선이라는 공간을 외면하지 않으면서 두 주인공을 그 굴레에서 해방한다. 조선인 주인공인 숙희가 히데코와 사랑에 빠지는 것을 막는 정서적 장벽은 놀라울 정도로 얇다. 그건 일단 이들이 모두 번역된 인물이라 ‘한국영화 속 한국 여자’ 또는 ‘한국영화 속 일본 여자’의 틀 어디에도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은 모두 21세기 영국 작가가 창조한 빅토리아조 영국인으로, 30년대 조선인이나 일본인과 같은 가치관을 공유하지 않는다. 당연히 이들의 행동과 동기는 계속 어긋나며 관객은 이들에게서 익숙한 전형성을 찾는 데에 애를 먹는다. 이들의 관계가 동성애라는 사실 역시 혼란을 초래한다. 일반적인 일제강점기의 조선인/일본인의 로맨스는 두 사람 모두가 여자인 경우에 대한 선입견을 마련해놓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일들이 정리된 뒤 편안하게 자신의 세계에 머물며 새로운 삶을 쌓아올리는 <핑거스미스>의 주인공들과는 달리, 숙희와 히데코가 조선과 일본을 떠나 달아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선입견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세상이 이들에게 자리를 마련해놓지 않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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