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박찬욱 감독의 단편 <심판>(1999)을 다시 보았다. 그의 세 번째 장편영화 <공동경비구역 JSA>(2000)를 굳이 지금의 박찬욱을 설명할 수 있는 진정한 출발이라고 부른다면, 직전에 만든 <심판>에서 지금의 박찬욱을 설명할 수 있는 여러 요소가 엿보여 흥미로웠다. 무엇보다 그는 <아가씨>에 대해 신년호인 1036호(박찬욱, 김지운, 최동훈, 류승완, 나홍진 표지 촬영 및 좌담)와 창간 21주년 기념 1051호(박찬욱, 김상범, 류성희, 정서경, 오달수, 류승완 좌담)를 통해 거듭 ‘믿음’에 관한 영화라고 강조했다. 그런 점에서 <심판> 또한 그 믿음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사실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특히 <심판>의 배우 기주봉, 고인배는 죽은 여자의 시신에 얼굴까지 나란히 맞대어 제각각 자신의 딸이라고 주장하며 대립하는데, 그들은 <공동경비구역 JSA>에 각각 대립하는 남한군과 북한군으로 나오기까지 했다. <심판>을 본 뒤 <공동경비구역 JSA>를 본 관객에게는 믿음에 관한 색다른 재미였을 것이다.
다시 <심판>에서 병원 영안실의 염사(기주봉)는 대형 참사로 얼굴이 심하게 훼손된 20대 여자의 시신을 두고, 이미 영화가 시작할 때부터 존재하던 부모가 있는데도 갑자기 자신의 딸이라고 주장한다. 그가 전에도 시체를 보고 자신의 자식이라고 주장한 적 있다는 증언이 등장하며, 관객이나 영화 속 인물들 모두 그가 헛소리를 하고 있다고 여기게 만든다. 마치 <복수는 나의 것>(2002)에서 영미(배두나)가 동진(송강호)에게 조심하라고 경고하며 자신이 혁명적 무정부주의자 동맹의 일원이라고 한 얘기를, 역시 관객이나 영화 속 인물들 모두 믿지 않는 상황과 거의 같다. 그런데 얼마 안 가 그들 부모의 진짜 딸이라는 다른 여자가 나타나면서, 누구를 믿어야 할지 힘든 상황이 된다. <아가씨>의 두 여성이 처한 믿음의 흔들림도 비슷하다. 그처럼 오래전의 작품들과 지금의 작품을 잇는 작업이 꽤 흥미롭다.
또한 박찬욱 감독은 <아가씨> 이전에도 줄곧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를 빈번하게 만들어왔다. 현역 한국 남성감독들 중에서 가장 눈에 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번호에서 긴 인터뷰를 진행한 김혜리 기자는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스토커> <아가씨>까지 이른바 ‘소녀 3부작’을 넘어, <친절한 금자씨>와 <박쥐>를 더해 다섯 작품이 ‘여성의 탈출기’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게다가 인권영화 옴니버스 프로젝트였던 <여섯 개의 시선>(2003) 중 <믿거나 말거나, 찬드라의 경우>뿐만 아니라 동생 박찬경 감독과 ‘Parking Chance’라는 이름으로 공동 연출한, 베를린국제영화제 단편부문 금곰상을 수상한 <파란만장>(2010)과 코오롱스포츠 40주년 필름 프로젝트 <청출어람>(2012)도 여성주인공 영화라 할 수 있다. 그에 대해 정서경 작가, 류성희 미술감독, 조상경 의상감독 등 주요 여성 스탭들과의 작업의 영향이라고 파악하는 시선들도 있다. 직접적인 인과관계를 넘어 무척 중요한 이야기라 생각한다.
그러고 보면 에르메네질도 제냐의 의뢰로 만든, <아이 엠 러브>(2009)의 루카 구아다니노가 제작을 맡은 단편 <A Rose Reborn>(2014)의 경우 나타샤 브레이어라는 아르헨티나 출신 여성 촬영감독과 함께 작업하기도 했다. 베를린국제영화제 금곰상을 수상했던 클라우디아 리오사 감독의 <밀크 오브 소로-슬픈 모유>(2008) 촬영감독으로, 올해 <아가씨>와 함께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된 니콜라스 윈딩 레픈 감독의 <네온 데몬> 촬영감독이기도 하다. 요즘 주목받는 ‘라틴계 촬영감독’ 중 주목할 만한 여성 촬영감독인 것. 이처럼 <아가씨>라는 영화의 전후/안팎을 여성의 시선으로 읽어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영화도 그렇고 지금 세상도 그렇다. 그래서 바로 지금 시점에 개봉한 <아가씨>는 여러모로 고마운 영화라고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