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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민의 오독의 라이브러리] <엑소시스트>, <소서러>, <곡성> 악(惡)의 탐구
박수민(영화감독) 2016-05-24

<곡성>

여러 의미로 무서운 데뷔작이자 그해의 영화였던 나홍진의 <추격자>(2008)를 심야에 보고 홀로 돌아가던 길을 기억한다. 서사의 내부 논리와 작동에 무리가 없는, 제목 그대로 시종일관 내달리는 영화였지만 영화가 끝나자 남겨진 감정은 ‘모호함’이었다. 놀랍게도 이 잘빠진 스릴러는 악(惡)이 끝내 처벌받아 나름대로 세상의 정의가 지켜졌다고 착각하게 하는 영화가 전혀 아니었다. 관객이 영화에서 영민(하정우)의 악과 그 원인, 이유를 이해할 방도는 없다. 그가 조카의 머리에 남겨놓은 상처와 거처했던 반지하의 벽에 그려놓은 그림 정도가 결코 설명되지 않는 악의 내면에 대해 영화가 묘사한 전부다. 희생자의 딸을 바라보는 중호(김윤석)의 모습과 창문 너머 서울의 밤하늘을 배치한 엔딩 컷이 결국 전해준 건, 이유 없는 악에게서 누구 하나 온전히 지켜내지 못하는 이 세계의 절망과 돌아가거나 나아갈 곳 없는 모호한 감정이었다.

관객이 길을 잃게 하는 일

이 ‘모호함’은 최근 한국영화에서는 생소하고 접하기 드문 감정이다. 소수의 작가가 시도하여 극소수의 작품만이 관객을 이 감정에 도달하게 만든다. 모호함을 추구했다 해서 모두 훌륭한 영화는 아니지만, 위대한 영화들이 대체로 명확한 감정을 선사한 것도 아니다.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의 아르놀트 하우저가 지적했듯, 한 영화의 감상이 모든 관객에게 동일하길 바라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흔히 관객이 그럴 거라고 믿지만, 실은 영화에 돈을 대는 쪽이 혼동하는 것. 바로 플롯의 모호함과 감정의 모호함의 차이다. 플롯은 언제나 분명해야 하지만 감정은 때로는 모호할 수 있다. 반대로 분명한 감정을 위해 플롯이 모호해서는 안 된다. 플롯은 닫힌 육체지만 감정은 열린 영혼이며, 그 영혼은 육체를 통해 관객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돈을 대는 쪽에선 모든 것이 설명되고 통제되길 원한다. 관객이 여기서 웃고, 여기서 울기를 원한다. 그걸 성공시키는 것만 해도 영화산업의 극한이다. 관객의 손을 잡고 정해진 길을 따라오게만 하는 일도 어렵지만, 도중에 관객의 손을 놓아버리고 길을 잃게 하는 일은 더 어려운 일이다. 플롯의 개연성에 사기를 치지 않았다면, 영화예술의 극치가 기다리는 것이다.

<황해>(2010)가 나오자 이 모호함은 더 분명하게 모호해진다. 연쇄하는 범죄의 복판에 함몰된 개인들을 통해 세계의 모순과 병폐가 구조적으로 폭로될 거라 기대하게 만들던 영화는 말미에서 그 모든 이유의 명확한 설명을 거절한다. 이쪽의 착취가 저쪽의 착취를 사고파는 수요와 공급의 자본주의 구조를 얼마든지 더 중요하게 말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죽어가는 태원(조성하)의 웅얼거림으로 관객에게 들릴 듯 말 듯하게 “그 새끼가 내 여자를 건드렸”다고 말할 뿐이다. 범죄의 먹이사슬 꼭대기에 있는 자의 최후 대사치고는 터무니없을 만큼 개인적인 고백. 이후에 어느 저축은행 창구에서 밝혀지는 숨겨진 사슬 역시 사건 이면에 존재한 지극히 개인적인 연관성을 짐작하게만 한다. 돈 몇푼에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자본과 폭력의 결탁이 밝힌 원인과 결과라는 것이, 그렇다, 겨우 치정(癡情)이었던 것이다.

그 결과 영화는 개인도, 세계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대신 폭력의 기이한 스펙터클만이 남았다. 분명히 압도는 있었지만 이 불분명과 불가해함은 겉으로 보이는 영화의 비대한 사이즈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제작비 100억원을 들여 170회차 이상을 찍어서 만들었다는 영화가 제공하는 감정이 끝내 모호함이라면, 과연 관객이 납득할 수 있을까? ‘황해’라는 거대한 제목에서 기대했던 세계의 구조는 오히려 그 속을 알 수 없는 개인의 내면 흙탕물에 잠겨버렸고, 구남(하정우)의 아내가 돌아오는 에필로그는 영화가 추구한 모호함을 도리어 해치는 사족처럼 보였다. 전작의 대단한 성공 덕분에 가능했던 기회로 만든, 지극히 감독의 개인적인 영화이며 과대망상적인 시도라고만 치부하기에도 그 안에 들어간 만듦새의 공을 무시할 순 없었으니. 이 감독은 어쩌자고 벌써 자신의 <지옥의 묵시록>을 찍어버린 것일까? 그것도 대한민국에서!

윌리엄 프리드킨, 최초의 단서

나홍진은 다음 영화를 절대로 한국에서 찍을 수 없다더라, 미국에서 찍는다더라, 아니 벌써 미국에 갔다더라 등등의 소문이 오가던 터라 한국영화계가 길들일 수 없는 작가를 그렇게 떠나보내나 싶었을 때 <곡성>의 제작 소식이 들려왔다. 게다가 귀신이 나오는 공포영화일지 모른다는 얘기를 듣고서 놀란 내가 처음 상상한 영화는 나홍진이 작정하고 만드는 <여곡성>(1986) 비슷한 것이었다. 그의 재능이 관객을 괴롭혀도 합당한 장르 안에서 산업과 적당히 타협한다면? 이전에 그가 어느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언급한 유일한 선배 영화감독의 이름은 ‘윌리엄 프리드킨’이었고, 그 이름을 본 순간 나는 나홍진의 세계를 이해하는 최초의 단서를 얻었더랬다. 시놉시스가 조금 더 구체적으로 알려지면서 자연히 나는 나홍진이 만드는 <엑소시스트>(1973)를 상상했다.

그래서 마침내 보게 된 <곡성>을 논하기 이전에 프리드킨의 <엑소시스트>는 물론 리처드 도너의 <오멘>(1976)까지, 두편의 오컬트 클래식에서 그려진 선과 악의 대결 양상과 그 결과, 그리고 악의 존재를 보여주려 두 영화가 택한 방식부터 말하고 싶다. <곡성>과 이들 영화의 밀접한 관련을 증명하려는 게 아니다. <곡성>에 도달하기 위한 레퍼런스적 단서를 먼저 검토하는 이유는 오히려, <곡성>에 다다랐을 때 우리가 완전히 길을 잃기 위해서다.

먼저 <엑소시스트>에서 선과 악의 싸움은 선의 전멸적인 희생으로 악이 잠시 물러나는 것으로 끝난다. 선은 그 자신의 의심과 함께 악을 부둥켜안고 자살해버리고, 결국 리건(린다 블레어)의 몸에 침입한 악의 정체는 밝혀지지 않는다. 영화에서 악의 존재는 빙의한 리건의 모습 외에도 메린 신부(막스 폰 시도)가 이라크에서 발굴한 고대 유물과 카라스 신부(존 밀러)가 엑소시즘 말미에 보는 어머니의 모습까지 매번 다양하다. 프레임에 몰래 삽입하는 서브리미널(Subliminal) 방식으로 보여준 악마의 얼굴까지 그 형태는 다양하지만 분명한 실체는 없다. 반면 <오멘>은 악이 선에게서 거의 압도적으로 승리한다. 선은 이번에 의심을 넘는 확신을 갖고 악을 막으려 하지만 실패한다. 영화는 데미안이란 이름의 꼬마를 등장시켜 머리에다 짐승의 표식 ‘666’을 박아넣고 악의 실체를 노골적으로 정의하려 한다. 그 정체는 ‘적그리스도’다.

형이상학에 도달하다

<곡성>에서 악에 맞서는 선은 먼저 무지(無知)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앞의 영화들과 달리 이 선은 상황 판단부터 안 된다. 이 영화에서 선은 그저 악이 아니기에, 피해자이기에 선일 뿐이다. 미련하고 우악스럽게 맞서는 선에겐 오직 의심만이 꼬리를 문다. 이것이 선악의 대결임을 영화 속 인물과 관객이 뒤늦게 깨달았을 때는 이미 최후의 문답이 진행 중이다. 확신이 필요한 시점에 와서야 좀더 구체적인 의심이 시작된 것이다. 당연하게도, 이제 와서 의심하기엔 너무 늦었다. 선은 악을 이기거나 막을 방법을 애초에 아는 바 없다. 종구(곽도원)의 딸에게 깃든 악의 정체는 모호하지만 나중에 밝혀지는 그 실체는 구체적이다. 이 영화는 놀랍게도 악의 맨 얼굴을 관객에게 보여주려 하고, 정말 보여준다. 심지어 그 정체는 적그리스도다! 한쪽에서 선이 의심의 문답을 할 때, 다른 한쪽에서는 악이 확신의 문답을 한다. 의심을 가지고 간 쪽과 확신을 가지고 간 쪽 모두 답을 하지 못한다. 악에게 대항할 무기로서의 의심과 확신은 서로 다른 쪽에게 주어졌다. 묻는 자들은 가만히 지켜볼 뿐이다. 이 영화의 가장 커다란 덫, 최강의 낚시는 “절대 현혹되지 마라”라는 말이다. 주인공과 관객은 결국 이 말에 현혹당했다.

우리는 사실 이 영화에 이르러서야 나홍진의 세계를 제대로 이해할 기회를 얻었다. 전작들의 모호함이 얻어걸린 감정의 다양한 스펙트럼이나 혹은 작가가 플롯을 엮다가 도중에 길을 잃어 도달한 무엇이라고 오해했다면 이번에 정정해야 한다. 이 감독은 명쾌한 감정에 관심이 없다. 그가 세편의 작품을 통해 일관되게 추구한 감정은 모호함이다. 이 모호함이야말로 자신의 작품 세계와 주제에 가장 합당한 감정이기 때문이다. 그 주제는 바로 악이다. 한국영화 역사상 이토록 일관되게 악을 탐구하고 추구한 작가가 있었을까? 게다가 그 악에 대한 처벌은 실은 실패하거나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의 전작들에서 악이 개인과 개인이 처한 상황과 상황을 제공하는 세계의 이면에 작용하고 있었다면, <곡성>에서는 악의 존재가 실체를 드러내고 제 얼굴을 내보이며 관객에게 묻는다. 의심도 늦었고, 확신도 늦었다. 우리는 이미 현혹당한 세계에 갇혔다. 출구 없는 모호한 세계. 감독은 바로 지금의 한국인 이 세계에서 우리 모두가 갇혀 영원히 구원받지 못하기를 바란다. 선은 악을 이기지 못하고, 부모는 자식을 지켜내지 못한다. 우리는 사진 찍힌 시체들이다. 감독은 그의 모든 역량을 총동원하여 내부에서 출구를 막았다. 의도한 바를 관철시키기 위하여, 몇 가지 명백한 사기와 허점마저 출구를 막는 공구리질에 사용했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재능이 뛰어난 감독이 아니라, 야심의 집요함이 뛰어난 감독이다. 이쯤되면 별 의미 없지만 굳이 프리드킨을 다시 언급해야 한다면, <곡성>은 <엑소시스트>가 아니라 <소서러>(1977)에 가깝다. 나홍진은 지금 형이상학에 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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