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텔 톤 배경에 분방한 손글씨로 적힌 제목, 한가운데 떡하니 버티고 선 (일러스트레이터 박오롬이 그린) 분명한 표정의 주인공과 그 옆 아담한 구름까지. <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전해달랬어요>(2013)가 지난해 한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소설 <오베라는 남자>(2012)를 쓴 스웨덴 작가 프레드릭 배크만의 또 다른 작품이라는 걸 알아차리기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표지뿐만 아니라 그 안을 들여다보면 좀체 다가서기 어려운 만만찮은 성격의 등장인물들, 사건과 갈등의 연속 끝에 이루어지는 가족과 이웃간의 화해, 웃음과 눈물을 자유롭게 오가는 전환 등 닮은 구석이 많다. 다만 <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전해달랬어요>는 데뷔하기 전 작가가 블로그에 연재하기 위해 쓴 <오베라는 남자>에 비해 더 소설 같다. 첫 소설의 어마어마한 성공 이후 본격적인 소설가로 발을 내디딘 후 내놓는 작품이라 작품에 담긴 고민의 흔적이 역력하다.
<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전해달랬어요>의 주인공은 7살 소녀 엘사다. 남들보다 조금 더 성숙한 엘사의 유일한 말상대는 (친구도 엄마도 아닌) 할머니. 세상이 보기에는 유별난 엘사와 할머니의 우정은 특별하다. 엘사를 위해 모든 일을 처리해주는 ‘슈퍼히어로’ 할머니의 활약상은 웃음을 선사하는 한편 그 안에 깔린 맑고 바른 마음이 묵직한 감동을 남긴다. 비록 할머니가 하늘나라로 떠나지만 그 우정이 끝나기는커녕 더 크게 자라나 독자들의 마음을 뒤흔든다. 주변의 불의에 똑바른 소리로 일관했던 할머니가 부탁한 편지를 아파트 이웃들에게 전달하면서 엘사는 이웃을, 엄마를, 할머니를 깨닫고 한뼘 더 성장한다. ‘우라지게 사랑하는 엘사를 두고 주글 수밖에 없는’ 할머니의 마음은, 엘사와 할머니 사이에만 존재하는 왕국 ‘깰락말락나라’가 현실 속 엘사의 주변 사람들과 겹쳐지는 기묘한 판타지 아래 절절하게 전달된다. 잘 읽히도록 쓰인 책이지만 부러 속도를 늦춰 프레드릭 배크만이 켜켜이 심어놓은 흔적들을 곱씹어보길 권한다. 덧붙임. 작가의 2014년작 <Britt-Marie Was Here> 또한 곧 출간될 예정이다.
아빠는 종종 그런다. 엘사에게 뭘 하고 싶으냐고 묻는다. 아빠는 하고 싶은 일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번주 화요일은 돌발 상황이다. 아빠는 돌발 상황에 대처하는 재주가 별로 없다. (…) 리세트와 리세트가 낳은 아이들과 함께 살기 시작한 뒤로 아빠는 엘사까지 있으면 집이 너무 ‘복잡해진다’고 했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그 소리를 들었을 때 아빠에게 전화를 걸어서 1분 동안 적어도 열번쯤 나치라고 퍼부었다. 아무리 할머니라도 그 정도면 나치 자주 들먹이기 신기록이었다. (…) 하지만 할머니는 전쟁터에 나갈 때 데려가면 좋을 만한 사람이었고, 그래서 엘사는 할머니가 좋았다.(111쪽)
나갔다가 돌아와서 계단을 다시 올라오는 도중에 알프가 브릿마리네 집 현관문 앞에서 잠깐 걸음을 멈춘다. 엘사는 알프가 어떤 눈빛으로 문을 쳐다보는지 포착한다. 첫사랑은 있었지만 두 번째 사랑은 없었던, 이후로 아무것도 없었던 사람의 눈빛이다. 엘사는 올해 처음으로 피자 냄새가 나지 않는 크리스마스 장식을 쳐다본다.(43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