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아야 산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지만 아이들을 주요 타깃층으로 하는 특촬물은 다른 장르의 영화나 드라마와 달리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것을 팔아야 하는 숙명을 안고 있는 작품이다. 등장인물의 피겨에서부터 의상, 소품, 탈것까지 모든 게 상품화된다. 일본에서는 이미 50년 넘게 관련 시장이 형성되어왔고 그에 따른 제작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다. 국내에서도 몇몇 유의미한 시도들이 있었지만 거의 시장에서 살아남지 못했다. 그런데 최근 EBS에서 방영을 시작한 <레전드 히어로 삼국전>은 이전 작품들과는 다른 기운을 뿜어내고 있다. 방영되자마자 몇몇 인터넷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화제가 되기 시작했고 EBS의 어떤 방송도 쉬이 도달하지 못했던 놀라운 타깃 시청률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중국과의 합작을 통해 총제작비 70억원을 투자했고 전문 영화 인력들이 대거 투입되어 만들어진 <레전드 히어로 삼국전>은 과연 어떻게 팔릴 만한 이야기를 만들 수 있었을까.
<삼국지>에서 시작된, 하지만 다르게 뻗어가는
무술 도장 도원관에서 후계자 수련을 연마 중인 유비와 공손찬은 어린 시절부터 함께해온 가족 같은 친구 사이다. 유비는 대책 없이 착하고 우유부단한 성격인 반면, 공손찬은 꼼꼼하고 악착같다. 또 언제나 궂은일은 모두 공손찬의 몫인데 사부는 유비만 예뻐하는 것 같아 불만이 쌓여간다. 도장 운영하랴, 무술 수련하랴 바쁜 두 사람은 하늘에서 내려온 신선 서서와 사마의에 의해 ‘레전드 히어로’로 간택당한다. 그리고 둘은 ‘드림배틀’이란 게임에 참가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히어로가 되어 자신의 꿈을 걸고 배틀을 벌이게 된다. 신선과 영웅패는 인간이 되기 위해서, 그리고 인간은 꿈을 걸고 최종 승자가 되어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 드림배틀에 참여하게 된다. <레전드 히어로 삼국전>은 다소 유치해 보이지만 사실 아이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영웅 서사다. 신선에 의해 영웅심이 투철하다고 판단된 사람들은 일종의 요정과 같은 존재인 영웅패와 함께 힘을 합쳐 레전드 히어로가 된다. 영웅패는 인간을 군주로 모시면서 마음을 합쳐야 한다. 게다가 배틀에 참가하는 모든 히어로가 선한 의도를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 때문에 자연스레 등장인물도 선악 구도로 나뉘게 된다. 그래서 이 이야기가 <삼국지>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전재훈 감독과 지한솔 작가는 원작에서 등장인물의 이름과 성격, 기본적인 인물 관계와 굵직한 사건 전개의 흐름만 따와 원작과 전혀 다른 세계의 이야기를 만들었다. 유비, 관우, 장비가 한몸이 되어 히어로로 변신하거나 극의 주요 사건을 주도해갈 조조와 손책이 등장하는 등 별도의 설명이 필요 없는 <삼국지>의 인물들이 주인공이지만 반드시 이들의 관계가 원작과 똑같이 설정되지는 않는다.
중국과의 원활한 합작을 위해 <삼국지>라는 익숙한 원작을 빌려온 이유도 있지만 제작진은 단순히 그것을 그대로 가져올 생각은 없었다. 영웅이 각성해서 세상을 구하게 된다는 성장 드라마의 골격을 지니고 있지만 이 작품에서 주목할 것은 드림배틀이라는 설정이다. 드림배틀에 참가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은 자신의 꿈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 유비는 막연하게 자신을 친자식처럼 키워준 노식 사부와 친남매처럼 함께 자란 공손찬에 대한 고마움 때문에 도장의 후계자가 되고 싶다고 말하지만 후계자가 되어 도장을 어떻게 이끌겠다는 목표는 사실 없다. 반면 공손찬은 유비에 대한 막연한 질투심을 갖고 있다. 하지만 둘은 신선인 서서와 사마의에 의해 드림배틀에 참여할 수 있는 히어로가 된 다음부터 자신이 제압한 상대는 소중한 꿈을 잃게 된다는 현실을 자각하게 되고, 나의 미래와 다른 누군가의 꿈에 대해서 인식하게 된다. 즉, 다른 이의 꿈의 크기에 대해 알게 된 유비는 그럼으로써 더욱 자신의 꿈을 소중히 여기게 된다. “드림배틀이라는 큰 배경을 통해서 우리가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떻게 노력해야 할지, 그리고 해서는 안 될 일이 무엇인지를 찾아보고 싶었다.”(지한솔 작가) 아이들의 눈높이를 의식해 이야기와 캐릭터를 단순화했지만 여러 갈등 속에서 빚어질 깨달음의 크기는 어른들에게도 충분히 교훈적인 이야기가 될 터. 이전의 수많은 특촬물이 제대로 시도하지 않았던 탄탄한 이야기는 <레전드 히어로 삼국전>의 수준을 한 차원 끌어올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렇다고 해서 <삼국지>의 기본 골격을 전혀 무시하는 이야기 전개는 아니다. 영웅패인 관우와 장비를 모두 소유하게 된 유비에 이어서 반드시 악을 처단해야 한다고 여기는 경찰 출신의 조조가 강력한 다크 히어로의 존재감을 과시하며 등장한다. 그리고 뒤이어 아직은 등장하지 않은 손책이란 캐릭터와 함께 유비, 조조, 손책이라는 기본 3강 구도 체제를 이어나갈 것으로 보인다. 사실 이 세 사람의 관계는 <레전드 히어로 삼국전>의 주제와 밀접하게 연관을 맺고 있다. 먼저, 유비는 드림배틀을 주관하는 신선에 의해 임명되는 인물이다. 반면 조조는 자기 스스로 이름을 바꾸고 영웅이 될 것을 선택하는 인물이다. 그 누구보다 악인을 무찔러야 한다는 강한 목표를 가지고 있다. 지한솔 작가에 의하면, 아직 등장하지 않은 손책은 태어날 때부터 영웅이었던 인물로 설정했다고 한다. 결국 세 사람 모두가 전혀 다른 경로로 영웅의 삶을 살게 되면서 서로 다른 목표를 갖게 되는 것이다. 또 영웅으로서의 의무 또한 각자 다른 방식으로 풀어나가게 된다. 물론 아직 등장하지는 않았지만 제갈량 역시 갈등의 한축으로 등장할 예정이다. “제갈량과 유비의 관계를 통해서 어린이들이 자신들의 꿈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꿈을 찾으며 살아가는 게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를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지한솔 작가) <삼국지> 본연의 재미를 잘 아는 시청자들이라면 단순한 인물 관계도를 통해서도 충분히 춘추전국시대의 향수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종합해보면, 오래전부터 특촬물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품어왔던 전재훈 감독과 지한솔 작가, 박한 디자이너에게 <삼국지>는 최적의 콘텐츠였다. 액션 활극으로서의 재미를 놓치지 않으면서도 나름의 도덕적 가치를 내세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기반이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삼국지>는 할 수 없는 것보다 뭐든 할 수 있는 점이 열려 있는 원작이었다. 거기에 더해 특촬물로서의 사업가능성도 충분했다. 2010년대 이후, 때마침 중국 내 특촬물 수요가 급성장하는 상황에서 <삼국지>는 아시아 전역에서 충분히 소비될 수 있는 안정적인 원작이었다. 또한 마음대로 원작을 훼손시키면 까다로운 심의 절차를 거쳐야 하는 중국의 특성상, 실제 역사가 아닌 설정만 가져와 현대적으로 각색하기 용이하게 했다는 점도 <레전드 히어로 삼국전>의 강점으로 작용했다.
“사건 전개는 철저히 상업적인 이슈와 연결”
하지만 무엇보다도 특촬물이 투자를 유치하고 제작에 들어갈 수 있었던 필수 경쟁 조건은 결국 완구 시장에서의 경쟁력이다. “재미있는 플롯을 기본으로 하되, 사건 전개는 철저히 상업적인 이슈와 연결된다. 처음에 어떤 장난감이 발매되고 몇주 뒤 어떤 장난감이 나오는지 전체 완구 발매 로드맵이 이야기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지한솔 작가의 말은 작품과 시장 가능성을 동시에 염두에 둬야 하는 특촬물의 기획력의 필요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수십편의 영화를 제작하며 영상 시장 전반에 관해 잔뼈가 굵은 제작사 문와쳐와 전문 CG 업체, 김정민 무술감독이 속한 한국 최고 무술팀인 열혈남아 등의 국내 영화 인력이 제작에 투입됐고 중국 파트너사인 차이나 필름 애니메이션과의 합작을 통해 새로운 시장 가능성을 담보하는 이상적인 관계가 형성됐다. 그리고 이들이 모두 지금의 <레전드 히어로 삼국전>을 탄생시킨 주역들인 것이다.
문와쳐 윤창업 대표는 “한국 최고의 특촬물을 만들어야 한다는 기본적인 사명이 있었다. 한국에서 만들기에는 너무 어려운 작품인데 우리가 엉망으로 만들어놓으면 누가 뒤이어 이 시장에 뛰어들 생각을 하겠는가. 영화를 만들던 인력들이라 더 잘할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지만 단순히 돈만 많이 들이면 만들 수 있는 작품이 아니라는 것도 보여주고 싶었다. 오랜 시간 동안 장르에 대한 애정을 갖지 않았다면 쉽지 않은 도전이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아무도 쉽게 도전할 수 없었던 분야의 시장을 개척하는 도전정신이 만들어낸 <레전드 히어로 삼국전>의 다음 시즌이 또 이어질 수 있기를 바란다면, 매주 수요일과 목요일, EBS 채널에서 방영되는 본방을 주목해보자.
“다른 사람의 꿈과 경쟁하며 성장하는 이야기다”
<레전드 히어로 삼국전> 전재훈 감독
-<삼국지>를 기반으로 한 특촬물에 대한 기획은 언제부터 구상했나.
=6년 전에 <시공전기 레이포스>라는 특촬물을 기획하다가 무산된 적 있다. 그 이후 현실적인 제작 가능성을 고려해 중국시장을 내다봤다. <삼국지>나 <서유기> 같은 중국 고전을 바탕으로 한 작품이 좋겠더라. 그런데 시도한 지 3일 만에 왜 일본이 여태 <삼국지> 기반 특촬물을 만들지 않았는지 알겠더라. 어려우니까. (웃음)
-프로덕션 과정 전반에 걸쳐 특촬물만의 특수한 상황들이 많았으리라 짐작된다.
=기획 단계가 어려웠다면 촬영 단계는 힘들다고 표현한다. 국내에 코스튬이나 소품 전문 제작사가 전무하다 보니 업체를 컨트롤하는 경험조차 없는 거다. 기획 단계에서는 레퍼런스가 전무한 상황에서 전체 디자인의 통일성과 디자인 모티브를 결정하는 게 어려웠다면, 촬영 때는 소품의 소재와 가격, 기능 등을 일일이 따져가면서 시행착오를 거쳐야 했다.
-연출자로서 이 작품에서 가장 공들인 부분이 있다면.
=‘군신일체’라는 개념이다. 캐릭터의 고유성은 변형시킬 수 없으니 특촬물 안에서 유비의 정치가로서의 매력을 살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관우와 장비가 영웅패로서 유비를 군주로 모시면서 세명의 캐릭터가 하나의 히어로가 된다는 설정이 우리에겐 중요했다.
-<레전드 히어로 삼국전>의 큰 주제는 어떤 방향으로 구상했나.
=극 초반에는 꿈의 소중함을 알게 되고 진짜 꿈을 찾는 이야기를 한다면, 20화 이후 후반부에는 나 못지않게 중요한 꿈을 가진 사람들과의 경쟁을 통해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를 고민하고 좌절도 하며 성장하는 과정을 담게 된다.
-완성한 작품을 보니 어떤가.
=배우들이 잘됐으면 좋겠다. 당신들을 지켜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 작품을 선택한 걸 적어도 후회하는 일은 없도록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들에게도 분명 용기가 필요했을 작업이었다.
한국 특촬물의 오리지널리티를 위해
<레전드 히어로 삼국전> 박한 디자이너, 김정민 무술감독
-타깃 시청층이 어린이 대상이므로 리얼 액션을 추구할 수 없어 답답하진 않았나.
=김정민_물론 리얼 액션을 좋아하지만 화장실에서 학생 둘이 싸우는데 중국 무술을 쓸 수는 없지 않나. (웃음) 시나리오에 대한 맞춤에서 출발했다. 일본은 풀숏도 많고 와이어 액션도 많이 쓰지만 우리는 그럴 수 없으니 아기자기한 재미를 살리는 데 공을 들였다. 사실 그게 더 어렵다. 평소와 똑같이 시뮬레이션한 다음에 동선만 그대로 유지하며 수위 조절을 하는 것이 말이다.
-로봇, 코스튬 디자인에 따라서 무술도 달라졌겠다.
=김정민_캐릭터 위주의 액션 디자인이었다. 터프한 성격인지 민첩하고 약삭빠른 캐릭터인지를 먼저 고민하면서 액션을 부여했다. 워낙 많은 캐릭터가 등장하다 보니 중복되지 않는 액션을 부여하는 데 공을 들였다.
-디자인 역시 쉽지 않은 도전이었을 것 같다.
=박한_<삼국지>로 특촬물을 만든다고 했을 때 나는 조지 워싱턴을 상상하면서 슈트 디자인을 하는 것만큼 어려울 거라며 회의적이었다. 막연하게 조자룡 하면 스테레오타입의 상상 이미지가 있지만 그대로 디자인할 수 없듯이 말이다. 그때 전재훈 감독이 캐릭터마다 성격이 어울리는 동물 이미지를 부여해보자고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가장 큰 테마는 결국 중국 이야기니까 중국의 갑옷을 기반으로 완구의 가능성을 고려한 이미지를 만드는 데 주력했다.
-또다시 특촬물에 도전할 의향이 있나.
=박한_처음 시작할 때는 과연 할 수 있을까 불안했다. 짧은 시간에 일본의 업적을 따라잡기는 불가능하겠지만 그 대신에 장르 카테고리 안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차별화 전략을 구사한다면, 그저 선망의 대상이었던 것이 현실 가능성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데 의의를 두고 싶다. 이후에 또 좋은 작품이 기획되어 일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