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오후, 상수동 카페에서 박혁지 감독을 만났다. 한 남편의 두 아내로 수십년을 동거해온 두 할머니 이야기 <춘희막이>(2015)로 지난해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만난 이후 오랜만의 인터뷰였다. 마침 감독은 <춘희막이>로 우크라이나국제영화제에 참석하고 돌아왔다고 했다. “쉴 새? 오자마자 주말에 충남 홍성에 다녀왔다. 벌써 5개월째 매주 홍성행이다.” 그곳에 <시간을 꿈꾸는 소녀>의 주인공 소녀가 있다. 소녀는 무녀다. 4살 때 신내림을 받고 지금껏 신점을 본다. “낯선 이의 미래를 꿰뚫고 대안까지 제시하는 무녀라니 얼마나 매력적인가. 소녀는 때때로 자신의 미래도 꿈에서 본다고 한다.” 박혁지 감독이 소녀의 존재를 안 건 오래전이다. “SBS <진실게임>에 ‘진짜 무속인을 찾아라’라는 내용으로 당시 초등학교 3학년이던 소녀가 나왔다. 부모에게 응석을 부릴 나이인데 어른들의 미래를 본다니. ‘이 소녀가 자라면 어떻게 될까’ 궁금했다. 6년 후, TV 휴먼다큐 프로그램을 보는데 또 소녀가 나왔다.” 몇해에 걸쳐 눈에 밟힌 소녀가 불현듯 떠오른 것이다.

“2014년 여름에 처음 만났다. 1년간 세번 청한 끝에 촬영 수락을 받았다. 기분이 묘하더라. 소녀 눈에 뭔가 보였나, 내가 꿈에 나왔나 싶고. (웃음)” 촬영은 쉽지 않았다. “올해 스무살인 소녀가 서울의 대학에 입학했다. 학교와 기숙사 생활을 찍고 싶은데 부탁을 해왔다. ‘친구들과 선생님들과 시간을 보내고 내가 무녀라는 걸 자연스럽게 말하고 싶다. 그러니 지금은 촬영을 말아달라.’ 무턱대고 찍을 수 없으니 기다리는 수밖에.” 다큐멘터리 감독과 찍는 대상 사이의 ‘밀당’이 시작됐다. “소녀의 마음을 얻으려고 이번에 귀국하면서 초콜릿도 사왔는데…”라는 감독의 말이 빈말이 아니었다. 감독의 일상도 주중에는 서울 학교에서, 주말이면 고향에서 신을 모시는 소녀의 생활 패턴에 맞춰졌다. “소녀를 찾아온 손님 중에 교인도 많다. 촬영에 민감해하는 분들도 있어 홍성 촬영도 순조롭지는 않다.” 시간만큼 좋은 해결책은 없을 거라 믿으며 촬영 기간 2년을 목표로 서두르지 않을 생각이다.

<시간을 꿈꾸는 소녀>

풀어야 할 숙제는 다른 데 있었다. 감독은 “소녀를 통해 시간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했다. “<백 투 더 퓨처>(1985), <메멘토>(2000), <인셉션>(2010) 등 시간과 꿈을 소재로 한 영화를 워낙 좋아한다. 다큐멘터리에서도 시도할 수 없을까. 꿈을 통해 미래를 내다보는 소녀의 이야기를 뻔하지 않게 풀기 위한 장치들을 고심한다. 남들이 안 해본 걸 해야 만드는 나도 재미있을 테니. 공포다큐로 한번? (웃음)” 폴라로이드 카메라도 장치 중 하나다. “소녀가 꾼다는 꿈을 어떻게든 표현하고 싶었다. 재연이나 애니메이션을 생각하다 소녀에게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쥐어줬다. ‘너의 꿈을 한컷으로 시각화해다오.’ 꿈을 상징할 만한 소재, 이미지를 찍고 그 위에 꿈 내용을 짧게 메모해주길 부탁했다. 이렇게 컷들을 모으면 뭔가 나오지 않겠나.”

박혁지 감독은 방송다큐멘터리 작업을 오랫동안 해왔고 극장 개봉용 영화 제작은 <춘희막이>가 처음이었다. 개봉을 한번 경험하며 많은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사람은 늘 원점에서 다시 시작한다’는 걸 제대로 깨달았다. <춘희막이>를 찍었지만 그 사실을 기억해주는 분들이 얼마나 되겠나. 새 작품에 들어가면 촬영 대상과의 관계 만들기부터 모든 게 처음 같다.” 숨 가쁘게 찍어 완성하는 쾌감이 TV용 다큐의 매력이라면 극장용 다큐는 방송에서 할 수 없는 시도들을 하게 한다. “방송다큐는 아무리 멋진 그림도 컷이 길어지면 시청자들이 채널을 돌린다. 반면 영화는 감독의 의지에 따라 신 구성을 할 수 있다. 해보고 싶은 게 많아졌다.” 계속 방송과 영화를 오갈 생각이다. <시간을 꿈꾸는 소녀>를 찍는 틈틈이 <달팽이의 별>(2012)의 이승준 감독과 EBS <다큐영화 길 위의 인생>을 준비 중이다. 촬영을 마친 종교다큐멘터리도 올해 개봉한다. “우크라이나국제영화제에서 관객이 묻더라. ‘<춘희막이>는 몇 번째 영화야? 전작은 어디서 볼 수 있어? 다음 작품은 준비하니?’ 이런 질문들을 받으면 보람을 느낀다. 힘, 많이 얻고 왔다.” 좋은 기운을 안고 박혁지 감독은 2년 뒤 완성될 <시간을 꿈꾸는 소녀>를 꿈꿔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