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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지라는 함께 성장한 동창생 같다”
이화정 사진 최성열 2016-03-17

다카라다 아키라 인터뷰

-1953년 도호에 입사하면서 배우의 길에 접어들었다. 어떤 계기로 이 일을 시작하게 됐나.

=학창시절에 연극반에서 활동했는데 그때는 생활고로 아르바이트를 전전했다. 배우가 되면 생활이 더 편해지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도호 입사시험을 보기로 작정했다. 시험 당일 자신이 없어서 입구에서 머뭇거리며 안 들어가고 있으니 수위아저씨가 들어와 시험을 보라고 하더라. (웃음) 그렇게 배우의 길에 접어들었고 이왕 배우가 된 거 최선을 다해 제대로 된 배우가 되자 마음먹었다.

-만주에서 태어나 2차대전 종전까지는 하얼빈에서 지내다 일본으로 왔다. 그때 보수적인 일본인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대륙’이라고 놀림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워낙 어릴 때라 당시 기억이 없다. 아버지께서 철도기사였고 조부가 해군무관이었는데, 그 때문에 (함경북도) 청진에서 태어나 만주로 갔다. 덕분에 아주 국제적인 환경에서 자란 셈이다. 배타적인 일본과 달리 해외에서 자라며 자유로운 분위기를 습득했다.

-미후네 도시로, 모리 마사유키 같은 배우가 중후하고 남성적인 이미지로 각인된다면 당시 당신의 이미지는 세련된 신세대적인 스타일과 사고방식을 대변하는 인물이었다.

=어릴 때부터 외국에서 자라고 외국인들과 어울리는 생활을 하다 보니 제스처가 커서 좀 달라 보였다. 게다가 키도 크고. (웃음) 형제 모두가 키가 크다. 일본인 평균 신장보다 월등히 커 외국인들을 만나면 항상 아버지가 미국인이냐, 필리핀 사람이냐라는 질문을 받았다. 이국적인 외모 때문에 당시 도호의 ‘미남 계보’를 잇는 떠오르는 스타로 알려졌는데, 선배들 입장에서는 내가 그들의 자리를 치고 들어간다 생각했는지 따돌리기까지 하더라. 도호 구내식당에 내가 밥 먹으러 들어가면 선배가 “야, 나가자” 하고 다른 배우들을 다 데리고 나가곤 했다. (웃음)

<고지라>

-대중적으로 각인된 작품은 역시 혼다 이시로 감독의 <고지라>다. 첫 주연작으로 이른바 대스타가 됐는데, 이후 배우로서 입지에 변화가 있었을 것 같다.

=200여편의 출연작 중 <고지라> 시리즈에 6편 출연했다. 첫 주연작으로 말 그대로 대성공을 한 것이었다. 겨우 세 번째 작품이었고, 갓 스무살이 되어 연기에 대한 열정이 넘치던 시절이었다. 주연이 되면 출연료를 많이 받으니 술집 외상값도 다 갚을 수 있겠구나 싶었다. 촬영 첫날, “이번에 주연을 맡게 된 다카라다 아키라입니다”라고 했더니 조명감독이 “바보야, 주연은 네가 아니라 고지라야”라고 하더라. (웃음) <고지라> 주연 이후에도 도호에서 제작하는 다른 작품에 단역으로도 출연했는데, 키가 크고 튀다보니 지나가는 행인을 여러 번 하기 힘들었다. 매일 아침에 현장에 가면 그날의 일정표가 나오는데 한번이라도 스크린에 더 나오고 싶어서 의상을 두벌 준비해 다른 역할로 행인에 참여하고 그랬다. 도호에서 잔뼈가 굵은 배우들은 그렇게 현장에서 카메라와 렌즈, 프레임을 익히며 성장해갔다고 할 수 있다. 그때부터 배우로서의 방향도 정해졌고, 그 뒤로 일년에 10여편의 영화에 꾸준히 출연했다.

-<고지라>의 인기는 말 그대로, 전세계적으로 영원하다.

=<고지라>는 나와 함께 활동을 시작한 같은 반 친구, 동창생 같다. 50년 동안 28편의 <고지라>가 제작되었다. 할리우드에서는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는데, 쟁쟁한 할리우드의 손도장 사이에 고지라 이름도 새겨져 있어 아주 부러울 따름이다. <고지라>는 일본에서 대성공을 거둔 후 2년 뒤 미국에서 개봉했다. 한참 지난 뒤에 제대로 된 오리지널 버전이 상영됐지만 첫 상영 때는 미국 입장에서 불편한 진실은 다 삭제하고, 핵 폐기와 관련된 주제가 드러나는 장면을 들어내고 다른 장면을 넣는 등 끔찍한 편집으로 상영됐다. 미국 시카고에서 열린 행사에 갔더니 당시 영화를 즐기던 70대 관객이 손자의 손을 잡고 왔더라. 어엿한 성인이 고지라 인형을 뒤집어쓰고 회장을 걸어다니기도 하고, 사인회에 하루 500명 이상이 몰려 손이 떨릴 지경이었다. 몇년 전엔 개러스 에드워즈 감독의 <고질라>(2014)에 출연했는데 편집되어 아쉽다. 최근에는 안노 히데아키 감독이 괴수물을 만드는 데 고지라의 화석, 천연기념물 같은 존재라면서 출연해달라고 요청이 왔었다. 스케줄 때문에 참여하지 못해 많이 아쉽다.

-나루세 미키오 감독의 영화는 당신 필모그래피의 또 다른 한축으로 자리한다.

=구로사와 아키라, 나루세 미키오 감독 같은 도호 소속 감독들의 위상은 대단했다. 배우 생활한 지 5년째 되던 해인 1959년 <아이누의 휘파람>을 시작으로 나루세 미키오 감독의 영화에 출연했고 그 뒤로 6편의 작품을 함께했는데, 다카미데 히데코, 우에하라 겐, 모리 마사유키 등 당시 쟁쟁한 배우들이 사단처럼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젊은 배우가 그 현장에 참여한다는 건 굉장히 영광스런 경우였다. 당시는 소속 제작사의 작품에만 출연할 수 있는 법(메이저 영화사와 배급사간에 맺어진 협정으로 감독과 배우가 다른 회사의 작품에 출연할 수 없었다)이 있어 닛카쓰 영화사를 대표하는 젊은 배우가 “다카라다, 부럽다”며 본인도 도호 감독의 작품에 참여하고 싶다고 자주 말하기도 했다.

<딸, 아내, 엄마>

-영화제에서 상영된 <딸, 아내, 엄마> <방랑자>를 직접 선택했다고 들었다. <딸, 아내, 엄마>는 당시 일본영화계를 대표하는 여배우들이 대거 출연한다. 촬영장 분위기는 어땠나.

=정말 그 작품은 대여배우들의 향연이었다. 그중 하라 세쓰코는 일본 여배우를 대표하는 가장 아름다운 배우였다. 안타깝게도 지난해 유명을 달리했고, 다른 배우들도 하나둘 세상을 떠서 슬프다. 그때 촬영이 일찍 끝나면 배우들끼리 호텔에서 모여 카드놀이를 하곤 했다. 하라 세쓰코는 그 자리에 끼지 않았지만 판돈으로 쓰라며 돈을 주고 가서 나중에 돌려주러 갔던 기억이 난다. 화장을 지운 민낯을 봤는데 정말 아름다웠다. 그녀가 은퇴한 후 주간지 등에서 내게 인터뷰 자리를 좀 마련해달라며 연락이 끊이지 않아 그녀와 통화를 한 적이 있었다. 그때 그녀가 “배우 생활에서 완전히 손을 뗐으니 양해해달라”고 하더라. 계속 활동했다면 50대, 60대, 70대 그 나이에 맞는 연기를 표현해낼 수 있었을 텐데 많이 안타깝다.

-나루세 미키오, 오즈 야스지로, 이타미 주조 등과 함께하며 배우로서 성장해갔다. 현장에서 그들의 모습은 어땠나.

=나루세 감독을 우리는 ‘못된 할아버지’라고 불렀다. (웃음) 감독님이 대본을 절대 안 보여주셔서 다들 ‘다카라다는 키가 크니 훔쳐보고 오라’고 해서 항상 내가 뒤에서 시도를 했는데, 내 인기척이 나면 대본을 바로 덮으셨다. 사전에 대사를 받긴 하지만 촬영 시작하면 감독님이 갑자기 중얼중얼하시면서 대사를 바꾸셨다. 그럴 때 무조건 알아들어야 한다. 다시 물어보면 배우로서 능력이 부족하다고 한소리 들었다. 현장에서 그렇게 찍은 컷을 그냥 이어붙이기만 하면 편집이 필요 없이 영화가 될 정도로 현장 컷이 완벽했다. 오즈 야스지로 감독은 “다카라다, 슬플 때 슬픈 표정을 짓거나 기쁠 때 기쁜 표정을 짓는 건 연기가 아니야”라고 하셨다. “슬픈 장면이라고 해서 무조건 울어달라고 요구하는 감독은 별로 좋은 연출가가 아니다, 인간은 그렇게 단순하게 표현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이 이후 좋은 지침이 되었다. 돌이켜보면 연기자가 된 이후 훌륭한 감독님들이 항상 함께했다. 새로운 감독을 만날 때마다 표현방식의 차이를 배우고, 감독 각각의 차이에 대응할 수 있는 연기를 알게 됐다.

-최근에는 ‘반전 발언’을 테마로 일본 전국 각지에서 활발히 강연 활동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지금 분위기에서 공개적으로 소리를 높이는 걸 우려하는 목소리가 많은데.

=아베 정권이 들어서면서 우경화가 점점 심화되고 있다. <NHK>에 출연해 “전쟁을 하지 않는 사람에게 투표하자” 이렇게 말하려고 하는데, 사회자가 제지를 하려고 하더라. 그 상황이 방송이 됐는데, 후에 시청자들이 격려를 해주더라. 일본은 지금 헌법구조가 무너지려는 등 개탄스러운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배우라면 중용을 지키고 좌우를 가르지 않고 지내는 게 좋을지 모르지만 인간으로서는 당당하게 참여하고 싶다. 그건 배우이기 이전에 인간으로서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최근 핵개발 문제로 인해 전세계적으로 긴장이 고조되는 상황이다. 만약 <고지라>에 다시 출연하게 된다면 고지라에게 “핵개발을 하는 나라들을 찾아가서 부숴버리면 어떻겠냐?”고 말해주고 싶다.

<방랑기>

괴로움 끝의 깨달음

도호 스튜디오 시절을 돌아보다

“<방랑기>에 출연하고 배우로 개안을 하게 됐다.” 다카라다 아키라가 출연작 중 가장 힘들었던 작품으로 손꼽는 건 나루세 미키오 감독의 <방랑기>다. 데뷔 8년차, 80편 이상의 연기 경력, 나루세 감독과도 이미 4편의 작업을 마친 경력의 배우였지만 <방랑기>는 그를 배우의 근본에 봉착하게 만든 작품이었다. “나루세 감독은 항상 현장에서 웃고 계셨고, ‘지금 그대로 좋아요’ 하고 자비로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봐주셨는데, 이때는 달랐다.” 다카라다를 애먹인 장면은 <방랑기>에서 작가인 자신보다 아내인 하야시 후미코(다카미네 히데코)의 작품이 먼저 잡지에 실리면서, 자존심이 단단히 상한 상태에서 아내를 원망과 질투로 바라보는 눈빛을 연기하는 장면이었다. “상대 배우를 쳐다보는 불과 12초의 연기였는데, 나루세 감독은 할 때마다 ‘그건 아니야, 아니야’ 하면서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지적도 안 해주었다.” 촬영은 결국 중단됐고, 스탭들도 모두 철수했다. 밤새도록 답을 못 구한 그가 다음날 선배인 다카미네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이랬다. “나는 알고 있지만 아까우니까 알려주지 않을 거야”였다. 선배의 쩨쩨함에 “영화계는 정말 더러운 곳”이라고 악에 받쳐 바닥을 치던 다카라다가 “한번만 카메라를 더 돌려달라”고 한 후 12초 뒤, 신기하게도 “바로 그거야!”라는 나루세 감독의 오케이가 떨어졌다. 작품이 개봉하고 평론가들에게서 다카라다의 연기에 대한 호평이 쏟아졌다. “아직까지도 나는 그 차이가 무언지 모르겠다. 20년 후 다카미네 선배에게 그 일을 이야기했더니, 최근 본인이 자서전을 집필했는데 한번 보라 하시더라. 당시 상황이 세세하게 적혀 있는데, 감독님도 선배도 내게 쉽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보다 철저히 혼자 괴로워하고 답을 얻는 방법을 가르쳐주려고 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다카라다는 앞서 <고지라>를 촬영하던 해, 도호에서 동시에 제작하던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7인의 사무라이> 촬영장을 방문했던 기억을 끄집어냈다. 미후네 도시라가 말을 만지며 결의를 다지는 장면에서 계속 NG가 났다. “구로사와 감독이 “이만큼의 연기밖에 안 되냐”며 역정을 내시는데, 너무 무서워 그 자리에서 5분을 지켜보는 것도 힘들었다. 그로부터 8년 뒤에 내가 그런 도호 스튜디오의 무서운 경험을 한 거다. 지금의 현장은 프로덕션 절차나 예산 문제로 누구도 기다려주는 사람이 없다. 하지만 그때는 다들 그런 고통 끝에 배우로 성장해나가던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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