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요한 마음에 서서히 몰입되다보니 어느새 돌아갈 길이 막막하다. <남과 여>는 고요히 흐르며 격한 결절점들을 만들어가는 사랑영화다. 불륜을 소재로 했지만 치정보다 감정의 묘한 동요에 공을 들였다. 표현이 애매한 남자 기홍(공유)은 선한 본성에 쉽사리 결단을 내리지 못한다. 좀처럼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여자 상민(전도연)은 거듭 숙고하고 나서 어렵게 한 걸음을 내딛는 성격이다. 정서장애 아이를 둔 두 남녀는 핀란드 국제학교 캠핑장에서 우연히 만난다. 폭설로 발길이 묶인 이들은 숲속 산장에서 마음이 이끄는 대로 몸을 맡긴다. 각자 일상으로 돌아간 후 서울의 현실 속에 문득 남자가 나타나자 여자는 내밀한 관능의 동요를 겪게 된다.
숲과 호수와 눈은 영화의 기본적인 무드로 작용한다. 핀란드의 이국적 풍경은 현실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는 환상적 무대를 마련한다. 시리게 뻗은 설원은 이들이 품은 내면의 쓸쓸함을 시각적으로 처연히 펼쳐낸다. 눈 덮인 호수 위 빙판을 가로지르듯 둘의 만남은 위험하기도 무모하기도 한 것이다. 남자와 여자는 아이와 가족과 같은 윤리적 올가미에 보이지 않게 묶여 있다. 고독했던 그들은 서로의 공허를 따뜻하고 격렬하게 파고들고자 하는 욕망에서 좀처럼 벗어날 수 없다.
이윤기 감독의 <멋진 하루>에 이어 전도연이 여주인공인 디자이너숍 대표 상민을 맡았다. 데뷔작부터 전작 <무뢰한>, 그리고 <남과 여>에 이르기까지 그녀가 맡았던 캐릭터를 통해 ‘한국 멜로영화사’를 쓸 수 있을 만치, 이번에 소화한 캐릭터도 기존 멜로의 전례를 넘어서는 것이다. 속 깊고 우유부단한 남자 기홍 역의 공유는 성큼성큼 거리를 좁혀오는 제스처와 독특한 템포의 대사로 우아하고도 자연스럽게 캐릭터를 소화해냈다. <과거가 없는 남자> <르 아브르>에서 열연한 핀란드의 국제적 여배우 카티 오우티넨은 전도연과 함께한 영화의 엔딩 신에서 진한 여운을 남긴다. 고요한 마음의 흔들림을 따라가는 아름다운 음악과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연출된 공간들은 오롯이 남자와 여자의 마음에 집중하게 한다. 이윤기 감독의 기품 있는 멜로 <남과 여>는 앙상한 겨울의 사랑영화다. 사박사박 눈 쌓이듯 시리게 젖어들어가는 마음의 애잔한 여로를 따라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