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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가 필요해
송경원 사진 김명진(한겨레 기자) 2016-01-19

영화와 책, 음악으로 만들어진 역사 (대안) 콘텐츠를 권하며

일본군 위안부 문제 정의로운 해결 세계행동 및 제1212차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가 열린 1월6일 오후 서울 종로구 중학동 일본대사관 앞에서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가 위안부의 존재에 대해 최초로 증언한 김학선 할머니의 동상을 만져보고 있다.

할머니는 씨앗을 뿌리며 말씀하신다. “항상 얻어물 수만인나? 우리 힘으로 농사를 해가지고 오시는 분들도 맛있는 거 좀 이래 갈라주고, 갈라 묵는 세상이 돼야재.” 변영주 감독의 <낮은 목소리> 3부작은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기억과 오늘의 삶, 그리고 내일을 향한 시선을 담는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사연을 대중적으로 알린 1편(1995)과 할머니가 할머니를 인터뷰하는 독특한 형식이 인상적이었던 <낮은 목소리3: 숨결>(1999)도 기억에 남지만, <낮은 목소리2>(1997)를 처음 접했을 때의 충격은 아직도 생생하다. 할머니들의 사연이 특별해서만이 아니었다. 그토록 모진 세월을 버텨낸 그녀들이 그토록 환하게 웃을 수 있다는 사실이 생경하게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위안부라는 거대한 사건에 시선을 빼앗겨 사람의 얼굴을 보지 못할 때, <낮은 목소리2>는 그녀들도 우리와 다를 바 없이 이 땅 위를 버티고 살아가는 이웃, 자매, 누이, 어머니임을 일깨워줬다. 영화가 역사를 기록한다는 건 그런 것이다. 기억은 기록이 되고 기록은 역사가 된다. 목격자는 바로 당신이다. <낮은 목소리>와 같은 영화는 우리로 하여금 오늘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되돌아보게 한다.

진실은 막간에 있다

역사의 시곗바늘은 거꾸로 가지 않는다고들 한다. 그러나 요 근래 시곗바늘을 물리적으로 돌리려는 사람들이 있어 곳곳에서 파열음들이 들려온다. 지난해 12월 28일 또 하나의 어처구니없는 소식이 들려왔다. 한•일 외교 담당자들이 피해자들의 의견을 배제한 채 일본군 위안부 합의를 졸속으로 마무리해버린 것이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은 급작스럽게 타결된 위안부 합의를 뉴스로 접하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뉴스를 보며 느낀 참담함은 이내 죄책감에 가까운 감정으로 번져갔다. 정부는 연일 가만히 있으라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현재를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지배하고, 과거를 지배하는 자는 미래를 지배한다.” 조지 오웰은 소설 <1984>에서 이 한 문장으로 역사와 권력의 속성을 압축적으로 표현했다. 권력은 필연적으로 역사를 탐하기 마련이다. 권력자는 지지기반이 약할수록 역사에 집착하고 과거에서 정당성을 찾으려 한다. 모든 역사는 사후적이며 무수한 순간 속에서 현재의 근거를 위해 선택된 사실의 파편들이다. 따라서 권력자들은 자신의 정당성을 위해 역사적 사실을 선별하려 애써왔다. 하지만 권력이 역사를 두려워해야지 역사가 권력의 눈치를 보는 순간 그것은 필연적으로 부패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역사를 있는 그대로의 진실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다양한 목소리 중 하나로 행간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역사는 현재와의 대화이며, 마땅히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 되어야 한다.

<낮은 목소리2>

사실 역사란 기본적으로 폭력적인 배제를 전제로 한다. 우리가 서구 중심으로 서술된 세계사를 두고 불편해하듯, 역사란 특정 관점을 중심으로 실처럼 꿰나간 사실의 나열이다. 하지만 선택된 관점에 부합하지 않는 사건들까지 일일이 서술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은 행간이 생략된 서술이 될 수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를 지닌다. 물론 사학자들도 이같은 한계를 인지하고 있다. E. H. 카는 <역사란 무엇인가>의 서문에서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표현을 통해 과거를 사실로서 기록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언급한 바 있다. 말하자면 건강한 역사는 하나의 관점으로 결정될 수 없다. 다만 끊임없이 사실에 가까워지려는 노력과 과정, 현재적인 시도들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그 어떤 기준도 ‘올바르고 절대적인’ 기준이 되어선 안 되고, 그 어떤 합의도 불가역적일 수 없다. 그런데도 2016년 현재 대한민국에서 국정 교과서를 주장하는 이들은 그것이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

역사 교과서 국정화 문제부터 12•28 위안부 합의까지 정부가 보여준 태도와 역사 인식은 그래서 우려스럽다. 여기서 역사 인식 자체보다 두려운 건 결정을 밀어붙이는 과정이 생략되어 있다는 점이다. 민주주의의 다양성이란 이를 주장하고 설득시키는 과정이 보장된다는 전제하에 그 가치를 발한다. 그러나 현재 국정 교과서나 위안부 합의에서는 그같은 설득의 시간과 과정을 찾아볼 수 없었다. 토론과 설득 없이 ‘올바른’ 같은 단어를 앞세워 다른 목소리에 귀를 막는 순간 인류의 역사는 독재의 출발을 목도하곤 했다. 단일한 ‘올바른’ 역사가 있다고 믿는 이들은 의견이 다른 순간들을 역사에서 배제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국사편찬위원장의 “(국정 교과서를 채택한 국가로는) 북한과 베트남”이라는 발언은 그 연장선에 있다. 암담하고, 또한 슬프다.

최근 넘쳐나는 기이한 말의 조합들을 떠올려보자. ‘공정 해고’, ‘착한 가격’처럼 주체가 모호한 말들은 긍정적인 단어를 활용해 사람들을 현혹한다. 이 기괴한 조어가 만들어진 불순한 의도는 짐작 가능하다. 전체주의의 전조는 능수능란하게 조작된 말에서 읽을 수 있다. 역사 인식을 둘러싼 논쟁들도 별반 다르지 않다. 역사 앞에 절대로 올 수 없는, 논리적으로 모순된 단어들이 오늘날 아무렇지 않게 역사를 수식하고 있다. 역사 교과서의 국정화를 홍보하는 ‘올바른’이라는 단어가 그렇고, 일본군 위안부 피해 보상 합의 뒤에 갖다붙인 ‘불가역적 합의’라는 말이 그렇다. 우리가 <암살> 속 시대정신에 호응하는 것은 그것이 올바른 역사이기 때문이 아니다. 안옥윤(전지현)의 대사처럼, 아플지언정 “그들이 거기서 싸우고 있었”음을 기억해야 하기 때문이다. 기억은 살아남은 자들의 특권이자 의무다.

대안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이 시점에 더욱 절실한 것이 다양한 관점과 대안적 상상력이다. 영화로 대표되는 대중예술이 지속적으로 시도해온 것이 바로 역사가 말하지 않은 빈칸을 메우는 작업들이다. 영화는 거대 서사가 놓치고 지나갔을지도 모를 가능성들, 한 사람의 기억, 수많은 민중의 미시사를 재조명한다. 영화는, 그리고 무수한 대중예술 장르는 기본적으로 우리가 잊고 지나간 것들, 중심에서 멀어진 것들, 문장과 문장, 단어와 단어 사이의 메워지지 않을 무수한 행간을 사랑해왔다.

영화가 역사를 재현하는 방식을 두고 다양한 윤리적인 고민들이 있지만, 적어도 대안적인 상상력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영화는 역사, 역사가 될 것들 혹은 지나간 것들과 끊임없이 대화를 이어왔다. 역사의 물길을 막으면 균열이 생기기 마련이다. 순리를 거스르는 거짓이 올해도 이어질 걸로 예상되는 현재, 우리는 끊임없이 새로운 물길을 찾아 저 견고한 장벽에 균열을 낼 필요가 있다. 그것이 우리가 이 시점에 다양한 역사적 관점의 단초가 될 대안 콘텐츠들을 새삼 소개하려는 이유다.

이 리스트들은 정답이 아니다. 다만 여러 대안적인 상상력과 질문을 주고받으며 때로는 동의하고 때로는 부정하는 과정에서 한없이 사실에 가까워질 수 있을 거라 믿는다. 진실은 막간에 있다. 거짓이 손쉽게 진실로 포장되는 시대일수록 막간에 깃든 진실을 찾고자 하는 훈련을 멈춰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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