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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토리얼] 아베의 초가역적 망언에 부쳐
주성철 2016-01-08

“내가 그때 위안부로 끌려가지 않고 공부를 더 했으면 국회의원이든 뭐든 대단한 사람이 될 수도 있었을 거야”라는 박두리 할머니의 말에 변영주 감독이 “그럼요, 맞아요” 맞장구를 친다. <낮은 목소리2>(1997)에서 내내 웃음을 주며 관객의 눈에 하트를 그리게 만들었던 박두리 할머니는, 술기운에 노래를 부르며 그처럼 한 많은 세월을 회고했다. 화요일이면 “내일 데모 하재?”라며 수요집회만 기다렸던 할머니는 <낮은 목소리> 3부작이 마무리된 1999년이 지나 2006년, 그러니까 그 말 많은 평화의 소녀상 자체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떴다. (본래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는) ‘불가역적’이라는 표현은 합의문구 따위(‘일본군 위안부 협상이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으로 타결됐다’는 아베충의 얘기)에 쓰는 게 아니라, 바로 그들 할머니의 삶에 적용되는 것이다. 팟캐스트 <노유진의 정치카페>에서 노회찬 전 의원이 얘기한 것처럼, 할머니가 다시 부푼 장래희망을 꿈꾸던 바로 그 소녀 시절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 불가역적인 것이다. 그 말에 갑자기 울컥했다.

박두리 할머니가 아픈 기억 속에서도 환하게 웃을 수 있었던 건, 어찌됐건 세상이 조금씩 더 나아지고 있다는 기대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전히 일본의 보상이나 사과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지만, ‘내가 죽은 뒤에라도 언젠가는’이라는 순진한 믿음 말이다. 과연 지금의 ‘초가역적’ 풍경을 예상이라도 하셨을까. 그즈음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헌법재판소의 기념비적 개소리(1995년 7월)도 고 김영삼 대통령 집권기의 5•18 특별법을 통해 신속하게 처벌되어야 한다는 판결로 바뀐 일도 있었다. 그렇게 전두환은 1심 법원에서 사형, 2심 법원에서 무기징역 판결을 받았지만, 어쨌거나 지금은 자기 집에서 VOD로 <26년>을 보며 버젓이 잘 살고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문득 옛 <씨네21>을 뒤적였다. 1995년 가을, 무려 24호에 장선우 감독의 <꽃잎> 촬영현장 취재 기사가 실려 있다. 도청 앞 금남로에서 계엄군이 첫 발포를 하는 ‘그날 그 거리’ 장면을 위해, 아침 7시부터 오후 4시까지 9시간에 이르는 촬영이 진행되는 동안 5천여명의 엑스트라를 비롯해 1만여명의 광주시민들이 참여했다. 그 만명이 도시락 5천개를 나눠먹었다고도 쓰여 있다. 참 많은 생각이 든다. 우리는 그런 시간을 채우며 걸어왔다.

장영엽, 이주현, 송경원 기자가 머리를 맞대고 힘들게 완성한 이번 호 <씨네21> 특집은 ‘역사 혼돈의 시대’에 부치는 대안 콘텐츠 특집이다. 정통으로 다룬 영화도 있고, 유머로 다룬 영화도 있다. 사실 그 거대한 역사를 한번의 특집으로 다루는 것부터 무리일지도 모른다. 선정한 텍스트들을 여러 방면으로 이해해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끝으로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 한글 워드프로그램 화면에서 ‘국민학교’를 타이핑해보라. 순식간에 자동완성기능으로 ‘초등학교’로 바뀌는 광경을 목격할 것이다. 과거 역사바로세우기 운동을 통해 바뀌어야만 하는 역사의 찌꺼기들은 이미 뒤안길로 물러났고, 컴퓨터조차 경기를 일으키며 그 국민학교를 뱉어내게 됐다. 되돌아가서는 안 되는 길도 있는 법이다. 영화의 프리퀄은 재밌을지 몰라도 현실의 프리퀄은 재미없다. 바르게,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하지 않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