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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bituary] 신화, 영화 속으로 사라지다

하라 세쓰코 原節子(1920~2015)

하라 세쓰코

‘오즈의 뮤즈’ 하라 세쓰코가 지난 9월5일 폐암으로 가나가와현의 한 병원에서 별세했다. 향년 95살. 임종 사실은 비밀에 부쳐졌다가 지난 11월26일 세간에 알려졌다. 하라 세쓰코는 16살에 데뷔한 이래 오즈 야스지로,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작품을 통해 1940, 50년대 일본을 대표하는 배우로 활동했다. 1962년 은퇴 이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터라 갑작스런 부고가 안타까움을 더한다. 한창호 영화평론가가 하라 세쓰코에게 전하는 추모사를, 정성일 영화평론가가 하라 세쓰코의 최고작인 구로사와 아키라의 <백치> 속 그녀의 모습을 추억한다.

전범국이었던 일본의 체면을 다시 세우는 데는 영화의 역할이 컸다. 역시 전범국이었던 이탈리아와 더불어, 일본도 부끄러운 역사를 영화를 통해 일부 씻을 수 있었다. 먼저 이탈리아의 네오리얼리스트들이 있었고, 곧이어 일본 거장들의 행보가 이어졌다. 그들이 갖고 있던 오랜 문화의 매력이 다시 주목받은 것이다. 구로사와 아키라, 미조구치 겐지, 그리고 좀 늦게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들이 세계영화사를 장식하기 시작했다. 문화라는 것이 만들어지기도 어렵지만, 전쟁으로 쉽게 지워지지 않듯, 예술의 전통이 깊은 두 전범국에서 쏟아져 나오는 걸작들은 한때 파시스트들이었던 이들 국가의 치부를 잊게 만들 정도였다.

만약 일본영화가 관객에게 일본 문화의 품위까지 기억시켰다면, 그 공은 하라 세쓰코에게 돌리는 게 맞을 것 같다. 하라 세쓰코는 일본의 거장들, 특히 구로사와 아키라, 오즈 야스지로, 그리고 나루세 미키오 등과 함께 일하며 배우의 경력을 쌓았다. 알다시피 최고의 조합 파트너는 오즈였다. <만춘>(1949)으로 시작하여, 협업은 <고하야가와가의 가을>(1961)까지 모두 여섯 작품으로 이어졌다. ‘노리코’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전반부의 세 작품, 곧 <만춘>, <초여름>(1951), <동경 이야기>(1953)에서 하라는 결혼 적령기를 맞은 딸 또는 미망인 독신(<동경 이야기>)으로 나온다. 말하자면 하라 옆엔 부각되는 남성 파트너가 없다. 대신 하라는 아버지(<만춘>), 오빠(<초여름>), 시아버지(<동경 이야기>) 등 가족의 남성 보호자들과 더 깊은 사랑을 표현한다. 그럼으로써 하라에겐 ‘영원한 처녀’라는 별칭까지 붙었다. 설핏 마리아가 떠오르는 별명인데, 세속적인 성인 남자라면 그 누구도 소유할 수 없는 ‘동정녀’로 남기고 싶은 욕망일 테다. 이때부터 하라에겐 신화적이고, 종교적인 이미지가 씌워진 셈이다.

<동경 이야기>

세 작품 모두에서 하라는 화사한 미소, 겸손한 말투와 자세, 양보하고 사랑하는 아량을 표현하며 별명에 걸맞은 비현실적인 페르소나를 만들어낸다. 오즈의 걸작들이 사랑받는다면, 하라의 몸에서 표현된 이런 미덕들이 호소력을 갖는 점도 큰 이유일 터다. 설사 그런 캐릭터가 현실감을 갖지 못한다 하더라도 관객은 하라의 신화적인 품위에서 ‘오인’의 동일시를 경험했다. 그런 이미지에서 관객은 자신을 보고 싶어 했고, 또 갖고 싶어 했다.

신화의 이미지를 만든 데는 오즈의 역할이 결정적인데, 그의 작품에서 ‘영원한 처녀’에 큰 변화가 온 것은 <도쿄의 황혼>(1957)에서다. 독신이 아니라, 딸이 있는 기혼녀 다카코로 출연한다. 약간 폄훼의 의미가 낀 소위 ‘아줌마’ 역이다. 하라는 어느덧 나이도 37살이 됐고, 그래서 주역이기보다는 조역에 가까운 역할을 맡았다. 화사한 미소의 기품은 보기 어렵고, 그의 미덕을 굳이 찾자면 체념에 가까운 양보의 아량 정도다. <도쿄의 황혼>은 단조(短調)가 특징인 나루세 스타일의 멜로드라마인데, 관객은 변화된 하라의 이미지를 낯설어 했다.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작품으로 남은 까닭일 테다.

오즈와의 마지막 두 작품에선 하라는 중년이지만 다시 독신으로 나온다. <늦가을>(1960)에선 결혼 적령기를 맞은 딸을 둔 미망인으로, <고하야가와가의 가을>에선 어린 아들이 있는 미망인으로 나온다. <늦가을>은 <만춘>의 변주곡으로, <만춘>이 독신 아버지와 딸의 사랑을 다뤘다면, 이번엔 독신 어머니(하라 세쓰코)와 딸(쓰카사 요코) 사이의 관계를 다룬다. 두 작품에서 주목되는 것은 하라가 사랑하는 상대로 딸 혹은 시누이인 ‘여성’이 등장하는 점이다. 곧 하라는 자신의 영화적 이미지대로 중년이 돼서도 세속적인 남성과는 거리를 둘 때, 과거와 같은 주목을 받을 수 있었다.

독신남 오즈 야스지로는 기이하게도 1963년 자신의 환갑날 죽었다. 그러고는 자신의 영화에 자주 등장하던 도쿄 근처의 가마쿠라에 묻혔다. 묘석에 ‘무’(無)라는 한 글자만 남긴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독신녀 하라는 오즈가 죽은 뒤, 곧바로 은퇴했다. 아쉽게도 기억에 남을 미사여구는 남기지 않았고, “대가족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배우를 했다”는 짧은 말만 남겼다. 그러고는 오즈의 묘지가 있는 가마쿠라에서의 50년 넘는 은둔 생활에 들어갔다. 사람들은 두 전설에 대해 많은 상상들을 했지만, 하라는 그 점에 대해 단 한마디도 남기지 않았다. 역시 ‘무’(無)가 떠오르는 삶이었다.

<백치>

소중한 실패작 <백치>

영화평론가 정성일이 선택한 하라 세쓰코 최고의 작품

어느 자리에서 누군가 하라 세쓰코가 웃는 얼굴을 보고 있으면 부처님의 미소가 떠오른다고 말했다. 나는 그 표현이 이상할 정도로 절묘하다고 생각했다. 하라 세쓰코가 웃을 때는 기쁘다거나 즐겁다는 기분이 전혀 들지 않는다. 그냥 그 자리에서 이제까지 벌어진 일들을 고스란히 견디면서 그저 미소 하나로 무심하게 지나쳐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건 연기라기보다는 하라 세쓰코의 존재 그 자체처럼 여겨진다. 아마 오즈 야스지로도, 나루세 미키오도, 요시무라 고자부로도, 이마이 다다시도, 구로사와 아키라도 별다른 연기 지도 없이, 아니 차라리 하라 세쓰코 앞이라면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데, 속수무책으로 그저 그녀의 존재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고, 그렇게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카메라 앞에 세워놓고 바라보았을 것이라고 멋대로 상상해보고 싶어진다. 그러므로 원래 이 글은 하라 세쓰코의 가장 좋은 영화를 선정해 달라는 것이었는데, 밤새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가장 하라 세쓰코답지 않았던 영화를 말하는 것이 진심으로 그녀에게 올바른 헌사를 바치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 영화는 구로사와 아키라의 <백치>다. 여기서 구로사와는 하라 세쓰코에게 (도스토옙스키 원작 속의) 나스따시야를 맡긴 다음 그녀에게서 요염하면서도 사악한 기운을 끌어내기 위해 무진 애를 쓴다. 물론 하라 세쓰코도 최선을 다한다. 하지만 어떻게 해도 하라 세쓰코라는 존재 자체가 가진 신비하리만큼 무심한 고요함과 맑은 기분이 모든 노력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백치>는 그런 의미에서 하라 세쓰코의 존재 자체를 기록하고 있는 소중한 실패작으로서의 위대한 다큐멘터리다. 그녀는 그런 배우였다. 그냥 거기 있으면 되는 존재. 아무도 대신할 수 없는 사람. 그러므로 하라 세쓰코의 부고 소식은 단지 슬프다거나 안타깝다기보다는 갑자기 마음속의 큰 빛 하나가 꺼져버린 것만 같은 기분이다. 여기서 감히 사요나라, 따위의 말을 해버리면 안 될 것만 같은 상황. 그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용기를 내서 정말 오랜만에 다시 <백치>를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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