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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파르 파나히는 건재하다
정지혜 2015-11-18

그가 직접 운전대 잡고 로드무비 <택시>를 완성하기까지

이란의 영화감독 자파르 파나히가 택시 운전사가 돼 돌아왔다. 올해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된 신작 <택시>에서 그는 직접 택시를 몰며 손님들을 맞는다. 이란 정부가 그의 영화 제작 활동을 철저히 금지하고 있는 상태이지만 그는 기어코 영화를 만들어냈다. <택시>는 택시에 오른 승객들과 택시에서 바라본 테헤란의 사람들을 통해 현재 이란에서 영화를 만든다는 것의 의미와 한계, 이란 사회의 모순에 대해 말한다. 결코 쉽지 않았을 <택시>의 제작 과정을 짐작해보며 영화에 관한 짧은 글을 전한다. 독자들이 정치적 탄압 속에서도 때론 유쾌하게 때론 묵직하게 영화를 향해 달려나가는 자파르 파나히의 택시에 함께 올라 그가 전하려는 진솔한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길 바란다.

이란의 영화감독 자파르 파나히, 그는 여전히 건재했다. 올해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택시>(2015)로 황금곰상을 수상하며 그는 전세계 영화인들에게 이 사실을 확인시켜줬다. 시치미 뚝 떼고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를 유려하게 넘나들며 이란에서 영화를 만든다는 의미를 되짚어보게 만드는 <택시> 그 자체가 하나의 증거다. 무엇보다도 감독이 이 영화를 만든 과정, 그러니까 자파르 파나히가 자신을 향한 이란 정부의 집요한 정치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이처럼 경쾌한 로드무비를 완성했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택시>가 이룬 성취의 놀라움은 배가 된다. 자파르 파나히에게도, 그를 응원하는 사람들에게도 기념비적인 작품이 될 만하다. 엄밀히 말하자면 2010년 12월부터 자파르 파나히가 이란 내에서 만든 모든 영화는 위법적이고 탈법적인 행위의 결과물들이다. 이란 정부가 그에게 향후 20년간 영화의 연출, 제작, 시나리오 집필을 불허한다고 선고했고 이란 내 매체와의 그 어떤 인터뷰도 허락하지 않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는 국경 밖으로 단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으며 가택연금 상태에 처해 있다(<버라이어티>에 따르면 2013년 8월 이란의 대통령직에 오른 하산 로하니 대통령의 임기에 접어들면서 자파르 파나히는 집 밖 외출이 가능해졌다). 자파르 파나히가 이토록 엄혹한 시절을 보내고 있는 데는 2009년 이란의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벌어진 부정선거 논란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당시 선거 무효화를 요구하는 대대적인 대중운동이 들끓었고 이 과정에서 시위에 참여한 한 여대생이 민병대가 쏜 총에 맞아 목숨을 잃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나와 그녀의 죽음을 애도했고 정부에 극렬히 항의했다. 이란의 정치개혁운동을 지지해온 자파르 파나히 역시 이 현장에 있다 체포됐다. 이후 한 차례 풀려나긴 하지만 이듬해 2월 그는 또다시 체포돼 20년간 창작 활동이 금지되는 끔찍하고 치명적인 선고를 받게 된다. 그때부터 그에게 조국 이란은 그 자체로 자신을 옥죄는 거대한 감옥이 돼버렸다. <닫힌 커튼>(2013)이 체코의 카를로비바리영화제에 초청됐을 당시 그는 스카이프를 통해 자신의 심경을 이렇게 전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나는 이란의 정치에 앞서 이란 사회에 관한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사회와 격리된 지금의 나는 더없이 멜랑콜리한 세계에 살고 있다. 상당히 고통스럽다.” 암흑의 시간 안을 걸으면서도 그는 계속해서 시나리오를 쓰고, 영화를 찍고 있다. 2010년 이후 그는 2년 간격으로 세편의 영화를 쉬지 않고 내놓았다. 영화가 들어 있는 USB를 케이크 안에 몰래 숨겨 칸국제영화제로 보내 상영까지 했던 다큐멘터리 <이것은 영화가 아니다>(2011)를 시작으로 2013년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은곰상을 수상한 <닫힌 커튼>, 그리고 올해 공개된 <택시>까지가 바로 그의 굳건한 족적이다.

그는 왜 택시를 택했을까

<택시>는 택시라는 탈것의 특징과 장점을 최대한 살려 완성한 한편의 로드무비다. 심지어 자파르 파나히가 운전사로 등장한다. 제일 먼저 드는 궁금증 하나가 있다. 그는 왜 택시를 택했을까, 그리고 그는 왜 직접 운전대를 잡은 걸까. 특정한 장소에 정박돼 있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이고 이동해야만 (돈을 벌어 먹고) 살아갈 수 있는 게 택시(운전사)의 운명이다. 그런 택시의 운전석에 표현과 창작, 운신의 자유마저 빼앗긴 자파르 파나히가 앉은 것이다. 비록 그가 차를 몰고 갈 수 있는 곳이라고는 테헤란의 복잡한 도로가 전부이겠지만 그는 계속해서 이동하고 달리며 새로운 사람들을 만난다. 택시를 모는 행위 자체로 그는 정지가 아니라 움직일 수 있는 상태에 있고 택시에 누군가를 태움으로써 그는 고립되지 않고 언어와의 만남을 이어갈 수도 있다. 그러니 택시를 몰며 앞으로 나아가는 파나히를 보는 것은 그 자체로 현재 자신의 처지에 대한 파나히 나름의 항변이자, 이런 항변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든 현실에 대한 묘한 풍자로까지 읽힌다. 게다가 택시는 좁은 공간 안에 소수의 승객들이 타기에 인물들간의 대화는 그 어느 때보다 가깝게 전달된다. 낯선 타인과의 느닷없는 대화도 가능하다. 밀폐된 공간이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은밀하거나 친숙하게 만들기도 한다. 다시 말해 <택시>에서 택시는 이 영화 속 인물들을 위한 중요한 배경이자 무대인 동시에 제한적인 촬영 여건에 처한 감독에게는 통제 가능하고 안정적인 영화적 장치, 형식으로서의 역할까지도 가능해진다.

2010년 이전의 자파르 파나히는 종종 자신의 영화에서 주인공들을 탈것을 통해 이동시켰다. <거울>(1997)에서는 주인공인 어린 소녀 미나가 엄마를 만나기 위해 헤매다 낯선 아저씨가 태워주는 오토바이를 타고 가는 롱테이크 숏과 미나가 콩나물시루같이 북적이는 버스에 혼자 올라 집으로 가고자 하는 장면과 같은 군중숏이 대표적이다. 이때의 인물의 이동은 기필코 집으로 가는 길을 찾고야 말겠다는 어린 소녀의 고집스러움, 단호함과 맞물리며 이야기를 전개시킨다. <오프 사이드>(2005)에서도 남장을 한 소녀가 소년들이 우글대는 버스에 탑승해 축구장으로 향한다. 이때의 이동은 축구 경기를 보고 싶지만 여성의 축구장 출입이 엄격히 금지돼 있는 이란 사회의 남녀 차별적 관습을 거스르는 소녀의 의지와 하나가 된다. 이러한 이동의 순간이 <택시>에서도 택시를 통해, 택시 안에 오른 승객들을 통해 재현되고 있는 듯하다. 저마다의 사연을 갖고 이동 중인 승객들의 다양한 이야기가 달리는 택시 안을 점점 더 채워나간다. 이란의 엄벌주의를 놓고 찬반 논쟁을 벌이는 남녀 승객, 영화의 검열이 극심한 이란에서 자신과 같은 비디오 대여업자가 없었으면 자파르 파나히조차도 우디 앨런의 영화를 볼 수 없었을 거라고 말하는 남자, 성차별이 극심한 사회를 풍자하게 만드는 부부, 미신을 숭배하는 나이 지긋한 자매들이 차례로 택시에 오른다. 이들의 대화는 그 자체로 이란의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 이어져내려오는 전통 혹은 통제 사회의 면면들에 대한 구술처럼 들린다.

허구와 진실 사이

영화가 시작되면 관객은 택시의 대시보드에 고정된 카메라를 통해 전방의 도로부터 보게 된다. 신호를 받고 이동하는 택시는 얼마 뒤 승객 두명을 연이어 태운다. 하지만 관객은 한참을 더 대시보드의 고정 카메라를 통해 전해지는 정면의 전경만을 보게 된다. 이때까지도 관객은 영화 속 인물들의 얼굴을 전혀 알지 못한 채 그들의 대화만 외화면 사운드로 듣는다. 한참을 가다 남자 승객이 카메라를 보며 “도난 방지 장치 같은 것이냐”고 묻는다. 운전석의 남자는 “일종의 그런 거라고 볼 수 있다”고 대꾸한다. 그때 고정 카메라의 앵글이 조수석쪽으로 휙 하고 돌아가고서야 처음으로 영화 속 인물들이 앵글에 잡힌다. 영화가 시작된 지 3분이 넘은 시점이다. 조수석의 남성과 뒷좌석에 앉은 여성 승객이 앵글에 잡히며 그들의 대화가 이어질 뿐 이때도 역시 반대편의 운전석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운전석쪽 시야가 확보되는 때는 세 번째 손님이 뒷좌석에 타고 러닝타임이 9분대를 넘겼을 때다. 이때 관객은 두번 놀랄 것이다. 운전석에 앉은 택시 운전사가 감독 자파르 파나히라는 데 한번 놀란다. 영화에서 감독의 얼굴을 봤을 때 드는 생경함과 반가움이 놀람의 이유다. 이 순간 ‘이 영화는 자파르 파나히가 직접 출연하는 그의 자전적 다큐멘터리인가’라는 궁금증이 생기기도 한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관객이 더욱 놀라게 되는 건 세 번째 승객이 감독에게 하는 말에 있을 것이다. “자파르 파나히 감독님이시죠? 지금 영화 촬영 중인 거죠? 좀전의 승객들도 배우였죠? 그 남자가 내리면서 (감독의 전작) <붉은 황금>(2003)의 카페 장면의 대사를 하더라고요.” 만약 감독이 경력 있는 배우가 출연하는 극영화를 촬영하는 것이라면 감독은 어째서 운전석에 앉아 있는 것일까. 혹은 만약 감독의 자전적 다큐멘터리라면 세 번째 승객이 감독의 전작을 본 듯하다는 이 기시감은 그저 우연에 불과한 것일까. 이어지는 카메라의 움직임도 이런 질문들을 이어가게 만든다. 이를테면 카메라가 처음으로 운전석과 세 번째 승객을 비추는 과정에서는 러닝타임 3분대에서 고정 카메라가 조수석쪽을 휙 하고 돌아가며 움직이는 것과 같은 순간이 없다. 이후에도 운전석쪽과 조수석쪽은 양분된 채 앵글에 비칠 뿐이다. 추측건대 대시보드에는 두대의 고정 카메라가 설치돼 있었고 좌우를 나눠서 찍고 있을 것이다. 영화 안에 다분히 의도된 카메라의 움직임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다. 인물들의 대화, 카메라의 움직임 등이 단서가 돼 앞으로 이 영화가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를 흩트려가며 전개될 것임을 짐작해본다. 그리고 영화가 진행될수록 <택시>는 다큐멘터리인 척하는 픽션이거나 어쩌면 무엇이 다큐멘터리적 현실 기록이고 무엇이 극영화적 드라마인지를 구분할 수 없을 만큼 두쪽이 묘하게 오버랩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자파르 파나히가 추구하는 영화의 리얼리즘이 아닐까 싶다.

과연 올바른 영화는 있는가

<택시>를 통한 자파르 파나히의 질문은 계속된다. 택시에 오른 감독의 친조카인 초등학생 하나의 등장을 주목해보자. 만나기로 약속한 시간보다 한참 늦은 데다 이상한 택시까지 몰고 온 삼촌 때문에 화가 난 조카는 “내가 <거울>에 나오는 아이처럼 집에 혼자 찾아가고 그럴 줄 알았느냐”며 삼촌에게 항의해본다. 어린아이의 합리적 응대에 궁지에 몰리는 건 삼촌 파나히 감독이다. 이때 하나는 자신의 것으로 보이는 소형 디지털카메라를 들고 삼촌을 찍는다. 학교의 영화 제작 수업에 제출할 과제물을 만들기 위해서다. 사실 하나는 이미 영화 한편을 다 찍은 상태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도 덧붙인다. “배급할 만한 영화”가 아니라는 이유에서다. 선생님의 말대로라면 배급할 만한 영화란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이슈를 다루지 않고 남녀간 접촉을 삼가며 추악한 리얼리즘과 폭력적 장면을 넣지 않아야 하는 등의 규칙을 엄수한 영화다. 이후 창밖을 보던 하나는 제 또래의 아이가 누군가가 떨어뜨린 돈을 몰래 줍는 장면을 자신의 카메라에 담게 된다. 그러면서 하나는 소년의 거짓되고 잘못된 행동 때문에 지금 촬영 중인 자신의 영화가 엉망이 되고 있다며 전전긍긍해한다.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되 현실이 어둡고 불편하다면 보여주지 말라, 는 선생님의 말씀이 생각나면서 하나의 괴로움은 더해간다. 하나의 이 에피소드를 통해서 감독은 이란에서 배급할 만한 영화, 사람들이 볼만한 영화가 무엇이며 정부가 말하는 ‘올바른’ 영화가 실은 얼마나 부조리한가를 아이의 맑고 예리한 눈을 통해 드러내 보인다.

이어서 또 한명의 중요한 탑승자가 있다. 길에서 장미꽃을 한아름 안고 서 있던 여성이다. 그녀는 다름 아닌 이란의 인권변호사 나스린 소투데다. 감독과는 각별한 인연이 있는 사이다. 그녀는 자파르 파나히와 같은 이유로 6년간 수감 생활을 했고 이란의 변호사협회로부터 3년간 변호사 자격을 정지하겠다는 통보를 받은 상태다. 그런 그녀는 지금 곤체 가바미를 면회하러 가는 길이다. 곤체 가바미는 실제로 2014년 6월에 이란과 이탈리아간 남자 배구 경기 관람을 갔다 체포된 여성이다. 감독과 나스린 소투데는 자신들과 다른 정치적 의사를 표명한 사람들을 강제로 잡아들여 그들의 삶을 산산이 부서뜨리는 이란 정부의 추악한 얼굴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들은 정치적 폭거에 휘말린 사람들 대부분이 자신들의 친구들과 적이 돼버리고 결국 이 사회를 탈출(이민, 망명)하거나 다시 감옥으로 가게 되는 악순환에 빠졌다고 증언한다. 이때 두 사람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어린 하나가 하는 말이 이 모든 상황의 문제를 정확히 꿰뚫는다. “(어른들 혹은 이란 정부는 추악한) 현실을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으면서 현실에서는 그런 짓을 하잖아요.”

결국 <택시>는 자파르 파나히가 현재 자신이 처한 한계 상황 속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방식으로 자신이 꼭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풀어낸 과감한 영화적 시도다. 영화적 이야기란 무엇이고 영화는 어떻게 만들어지며 영화의 생명력은 어디에서 오는가에 대한 자파르 파나히의 자문자답이기도 하다. 감독이 직접 모는 택시로, 그 안의 사람들을 통해, 그들과 함께 지나간 이란의 심장부 테헤란의 거리에서 그는 이 질문들에 대한 나름의 답을 찾은 듯하다. 자파르 파나히 그는 여전히 건재하다. 이것은 명확한 사실이며 진짜다.

<닫힌 커튼>에 출연한 캄보지아 파르토비.

자파르 파나히의 영화적 동지들

2010년 이후 자파르 파나히가 계속해서 영화 작업을 할 수 있었던 데는 그의 든든한 영화적, 정치적 동지들의 힘이 지대했다. <이것은 영화가 아니다>의 공동 연출자인 다큐멘터리스트 모즈타바 미르타마스브, <닫힌 커튼>의 연출을 함께하며 영화의 주인공까지 맡았던 영화감독 겸 시나리오작가 캄보지아 파르토비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자파르 파나히와 함께 영화를 만들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들은 수난을 겪어야 했다. 모즈타바 미르타마스브는 2011년 9월에 체포됐고 재판까지 치렀다. 캄보지아 파르토비는 <닫힌 커튼>을 들고 베를린국제영화제를 방문했을 당시 이란 정부로부터 귀국과 동시에 해외 출국을 금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함께 베를린을 방문한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인 배우 마리암 모콰담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택시>를 함께 만든 동지들에는 누가 있을까. 현재로서는 안타깝게도 그들의 이름을 확인할 길이 없다. <택시>의 엔딩 크레딧에 유일하게 이름을 올린 사람은 자파르 파나히 감독뿐이다. 사정이 이렇게 된 데에 대해 감독은 영화의 끝에 자막으로 짧게 설명을 해뒀다. 그의 말의 요지는 감독이 영화를 완성하기까지 애써준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전하는 크레딧조차 감독의 의지대로 쓸 수 없게 한 이란 정부의 검열과 탄압의 그림자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는 것이다. 대신 <택시>는 꿋꿋하게 영화를 만들고 있는 이란의 영화인들에 대한 고마움을 영화 속에 드러냈다. 나스린 소투데가 장미 한 송이를 대시보드 위 카메라에 두며 하는 말, “이 장미는 영화인들에게 바칩니다. 영화인들은 믿을 수 있잖아요. 당신처럼요. (웃음)”가 그렇다. 감독이 자신의 영화적 동지들에게 보내는 헌사를 그녀가 대신 읽어준 것이라 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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